지금으로부터 364년 전 제주도에서 드라마와 같은 만남이 있었습니다.
1653년 네덜란드인으로 이미 귀화했던 박연(벨테브레이)과, 난파된 배에서 표류하다가 제주도에 닿은 하멜 일행이 조우한 것입니다. 이미 조선인 아내와 아이까지 두었던 박연은 “매우 유감스럽지만 조선법으로는 도저히 돌아갈 길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역만리에서 고향사람을 만난 박연과 하멜은 ‘옷깃을 적실 때까지 울었다’고 합니다.
이미 조선사람이 다 된 박연에 비해 하멜은 운신의 폭이 좁았습니다. 30여 명의 동료들이 함께 있었으니 의견을 맞출 수도 없었습니다. 이미 조선말을 배우고, 조선 풍습에 익숙해진 박연은 정식으로 무과(과거)를 통과해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박연은 조선에 새로운 화포제작법을 가르쳐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멜은 달랐습니다.
일행 중 일부가 마침 조선을 방문한 청나라 사신에게 ‘돌아가게 해달라’는 시위까지 벌였습니다. 네덜란드인이 조선에 있다는 사실을 만약 청나라 조정이 안다면 어찌 되는 것입니까. 북벌을 계획하던 효종 임금의 야심이 들통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조선은 청나라 사신들에게 뇌물을 주어 입단속을 시키는가 하면 하멜 일행에게 유배형을 내렸습니다. 이후 7년간 전남 강진에서 유배를 당했던 하멜일행은 결국 탈출하고 맙니다. 조선땅을 밟은 지 무려 13년여만의 일입니다. 하멜은 그 13년 여 동안 받지못한 임금을 청구하려고 보고서를 씁니다.
그것이 바로 하멜표류기입니다. 반면 조선에 정착한 박연은 조선판 히딩크의 역할을 해낸 뒤 아이까지 낳았습니다. 그러나 박연의 후손이 어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26회, ‘조선판 히딩크 박연이 하멜을 만났을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