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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그들은 어디에 발 딛고 있을까

입력 2017.05.07 20:58

수정 2017.05.07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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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동료들과 가벼운 술자리가 있었다. ‘장미 대선’의 향방에서부터 요즘 사는 얘기까지 오갔다. 그러다 이야기는 훌쩍 1997년 외환위기가 일어난 무렵까지 거슬러갔다. 올해가 2017년이니 만 20년이나 됐다.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은 때여서일까. 20년이란 세월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때의 기억들은 모두 또렷한 듯했다. 특히 동료 ㅇ씨가 그랬다.

[아침을 열며]20년 전 그들은 어디에 발 딛고 있을까

1998년 5월 당시 사회부 경찰팀 소속이었던 ㅇ씨는 ‘서울역 노숙인 체험’ 르포를 하게 됐다. 팀장(현장에선 ‘캡’이라고 부른다)이 아이디어 회의에서 그를 콕 집어 지목했다. 캡의 지시에 놀란 그는 “저 같은 안경 낀 노숙인들은 없을 거예요. 그리고 또….” 이것저것 핑계를 대며 저항했다. 그러나 캡은 강경했다. “갑자기 노숙인이 된 인텔리들도 많거든. 그럼 다른 대안을 내놓든가!” 별다른 아이디어 없이 회의에 숟가락을 얹었던 그는 결국 다음날 해 질 무렵 서울역으로 향했다. 당시 밤이면 서울역 광장과 지하보도에만 500여명의 노숙인이 모였다. 정부가 집계한 실업자 수는 150만명, 노숙인은 3000여명, 연말 노숙인 수가 1만여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던 때였다. 이들을 위한 정부 예산은 고작 57억원이었고, 현실에 맞는 정책을 제안하기 위한 현장 르포였다.

서울역 지하보도에서 보낸 첫날 밤. 악취가 진동하고 소주병이 나뒹굴고 멱살잡이하는 이들이 많았다. 자정이 지나자 모두 신발을 베개 삼아 자는 바람에 고린내로 머리가 지끈지끈 아플 지경이었다고 한다. ㅇ씨는 가방을 베고 잤다. 그런데 잠들고 30분쯤 지났을까. 누군가 신발을 벗겨가 버렸다. ㅇ씨는 다음날 새벽, 공중전화로 회사에 무사하다는 소식을 몰래 전했다. 공중전화 옆 부스에서는 공장이 부도나는 바람에 도망자 신세가 된 40대 가장이 초등학교 5학년 딸과 통화하며 울먹이고 있었다. 그곳에서 가장 고급 정보는 ‘무료급식 스케줄’이었다. 서울역 앞과 근처 교회 등에서 하루 4~5번의 무료급식이 이어졌다. 무료급식의 긴 대열에 끼어 저마다의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어느새 ㅇ씨는 그 시절 서울역 앞에 있는 듯했다. “노숙인들 중에는 주민등록증을 팔아 용돈을 마련하는 사람도 있었어. 불법게임 사업장에 민증을 빌려줘서 바지사장이 되는 거지. 민증을 팔기 전에 신용카드 발급도 받고. 그때는 카드발급이 쉬웠으니까. 카드로 고가의 카메라를 사서 그걸 팔아 현금화하는 거야. 신참 노숙인일수록 돈이 많은 거지. 근데 며칠 있으니까 다른 신문사 기자 2명이 취재를 하러 온 거야. 기자라면서 이것저것 묻다가 맞을 뻔했지. 그중에 한 명을 몰래 술 사주며 ‘사실 나도 기자다. 빨리 가라. 나까지 위험해진다’ 했지. 그때는 노숙인, 홈리스에 대한 개념이 없을 때라 제대로 된 정책도 없었어. 노숙인들은 부랑자들과 격리하는 것이 중요하거든. 미국의 경우에는 부랑자들과 격리해서 잠잘 수 있는 곳을 마련해줘. 다음날 일을 찾아나설 수 있게. 부랑자들과 어울리게 되면 일을 한다거나 어떤 의지를 갖게 되기 힘들거든. 우리의 경우는 잠자리보다 밥주는 데에만 신경을 썼지. 엄마, 아빠, 아이들이 함께 있는 노숙인 가족에 대한 배려도 없었고. 시설에 들어가면 가족이 헤어져야 하니까 트럭이나 공원에서 따로 노숙을 했지. 나도 한두 달 이렇게 지내면 그냥 이러고 살게 되겠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병 얻고 무기력해지고 아무 희망 없이 하루하루 사는 거. 3박4일간 노숙하고 돌아와서 한 달간은 몸이 근지러웠어.”

그렇게 ‘웃픈’ 얘기는 한참 만에 끝났다. ㅇ씨의 얘기를 듣고 있던 동료들은 “20년 만에 다시 쓰는 현장르포를 해야 한다, 외환위기 20주년 아니냐” 하며 취재를 권했다. 역시나 ㅇ씨는 난색을 표했다. 당시 ‘우리들의 슬픈 종착역’이란 제목의 기사에 등장했던 노숙인들은 그 후 어떻게 됐을까. 가정으로 돌아갔을까, 사회로 복귀했을까. 기사에는 서울역 광장에서 있었던 당시 서울시장 선거 유세 얘기도 나온다. 그때도 쩌렁쩌렁한 스피커를 통해 현란한 공약들이 무수히 나왔겠지.

동료들과 헤어진 뒤 숭례문 근처의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다가 어둠 속 좁은 박스 안에 웅크린 채 누워 있는 노숙인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20년 전처럼 수백명의 노숙인이 한꺼번에 길에 나와 있지는 않다. 그때는 경제재난에 가까운 외환위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불평등한 사회시스템이 이름만 노숙인이 아닐 뿐 수많은 이들을 어디론가 끊임없이 쫓아내고 있다.

9일은 새 대통령을 뽑는 날이다. 우리 사회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사람들이 수면 위로 올라와 발 딛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그와 함께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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