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취임 후 첫 해외순방 중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24일(현지시간)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나 마주 앉았다. 다소 어색한 분위기 속에 두 사람은 30분가량 대화를 나눴다. 교황은 트럼프에게 “평화를 이루는 올리브가 되어달라”고 뼈있는 당부를 남겼다. 바티칸 | AP연합뉴스
“난민은 숫자가 아닌 사람”이라고 호소하며 검소와 겸손의 미덕을 강조하는 성직자. 이민자를 막으려 국경에 거대한 장벽을 세우겠다는 백만장자 대통령. 프란치스코 교황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간) 바티칸에서 마침내 만났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의 기고 글에는 “역사상 가장 기묘한 조합”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 방문에 이어 전날 이탈리아에 도착한 트럼프는 이날 오전 8시30분 바티칸 교황 관저인 사도궁전을 방문했다. 게오르크 겐스바인 대주교가 먼저 나와 트럼프를 맞이했다. 안내원들을 따라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트럼프 부인 멜라니아와 장녀 이방카가 교황에 대한 예우의 의미를 담은 검은 베일을 머리에 쓰고 뒤따랐다.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고문,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 등도 동행했다. 교황은 궁전 3층의 개인 서재 앞에서 트럼프를 맞았다. 로이터통신은 “서재로 향하는 트럼프는 불편해 보였고, 교황의 미소는 희미했다”고 전했다. 나무 탁자를 사이에 두고 교황과 마주 앉은 트럼프는 “뵙게 되어 대단히 영광”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통역 1명만을 대동하고 30분가량 비공개로 대화했다. 바티칸은 성명에서 낙태와 기독교인 박해 문제를 언급하며 예배, 양심의 자유를 위한 공동의 노력을 얘기했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대화 직후 기자들에게 “그(교황)는 대단한 사람(something)”이라고 말했으나 기후변화에 대해 이야기가 오갔냐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교황은 기후변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해 왔지만 트럼프는 “기후변화는 사기”라고 주장한다. 트럼프의 멕시코 장벽 건설 공약을 두고 교황은 “다리를 놓지 않고 벽을 세울 생각만 하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교황은 전날 트위터에 “우리는 대화로 평화를 건설한다”고 적었다. 영국 가디언은 “트럼프와 교황은 인간적, 정치적, 지적, 정신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상징적인 첫 만남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전했다.
교황은 트럼프와 대화가 끝난 후 멜라니아, 이방카와 인사를 나눴다. 그는 슬로베니아가 고향인 멜라니아에게 “남편에게 어떤 먹을 것을 주는가”라고 농담을 건네며 포티자를 거론했다. 포티자는 교황이 즐기는 슬로베니아의 빵이다.
교황은 트럼프에게 소책자 3권과 올리브 나뭇가지가 그려진 메달을 선물했다. 통상적인 선물이지만, 소책자 중 ‘찬미 받으소서(Laudato Si)’가 포함된 것이 눈길을 끌었다. 교황은 트럼프에게 “(책에) 당신을 위한 메시지를 따로 적었다”고 하자 트럼프는 “읽어보겠다”고 답했다. 교황이 2015년 발표한 ‘찬미 받으소서’는 지구환경과 생태위기에 관한 회칙이다.
교황은 메달을 선물하며 “평화를 이루는 올리브 나무가 되어달라”고 당부하자 트럼프는 “우리는 평화를 이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교황에게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저서 초판본 5권과 청동 조각품을 선물했다. 트럼프가 “하신 말씀을 잊지 않겠다”고 말하자 교황은 “행운을 빈다”고 답했다.
유진 디온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지난 21일 워싱턴포스트에 쓴 칼럼에서 트럼프를 감화시킬 수 있는 인물은 교황뿐이라고 썼다. 그는 “(트럼프처럼) 심각하게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 자아성찰을 한다는 것은 강줄기를 바꾸고 지구의 태양 공전궤도를 변화시키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지만, 그 기적을 믿는 사람이 있다면 교황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