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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가자…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얼굴 찾기’ 여정

입력 2017.06.17 15:06

<아 지갑놓고 나왔다> 연재한 ‘미역의 효능’ 작가 인터뷰

<아 지갑놓고 나왔다>의 한 장면. / 다음웹툰

<아 지갑놓고 나왔다>의 한 장면. / 다음웹툰

‘아홉 살의 여름, 교통사고로 죽은 아이와 혼자 남겨진 채로 살아가는 엄마. 한 사람은 가야 할 곳으로 가고 한 사람은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곳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두 사람이 정말로 이별하는 이야기.’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최근 연재가 종결된 웹툰 <아 지갑놓고 나왔다>는 이 세 개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예고편의 세 문장이 3년에 걸쳐 연재한 웹툰의 전체 줄기다. 엄마와 딸이 ‘정말로 이별하는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 담겨진 내용은 간단치 않다. 성폭력 경험과 그에 얽힌 트라우마, 미혼모, 낙태 문제까지. 소박한 그림체와 절제된 색채로 결코 간단할 수 없는 주제를 풀어냈다.

어린 시절 사촌들에게 성폭행을 당한 주인공 노선희는 사람들의 얼굴이 닭, 백조 등 모두 ‘새’로 보이는 정신질환을 겪는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임신하고 가출해 딸 노루를 낳는다. 노루는 선희에게 유일하게 ‘새’가 아닌 ‘사람’으로 보이는 존재이며, 관계의 단절을 겪는 선희의 집착이 투영된 대상이기도 하다. 그런 노루가 교통사고로 죽고 난 이후, 웹툰은 혼백이 돼 엄마 곁을 맴도는 노루와 ‘사람’ 없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 선희, 그리고 선희의 엄마 경자까지 3대의 이야기를 다룬다.

웹툰은 시작부터 독자의 고정관념을 여러 차례 배반한다. 지갑놓고 나왔다는 제목 때문에 ‘일상툰’으로 생각되지만 막상 내용을 들여다 보면 심각한 소재에 주인공들의 복잡하고도 처절한 심리 묘사가 주를 이룬다. 엄마와 딸에 대한 이야기 전개는 얼핏 모성에 관한 내용을 연상시키지만, 작가는 모성애 코드를 철저히 배제한다. 첫 편부터 심상치 않은 전개를 예고하며 모녀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흡입력 있게 풀어간 이 웹툰은 더욱이 신인 작가의 데뷔작이다. 새 연재물이 올라올 때마다 “오늘도 울면서 봤다”는 독자들의 댓글이 이어졌고, 어린 시절 선희의 성폭력 사건이 다뤄진 대목에선 자신이 겪은 성폭력을 이야기하며 ‘위로를 받았다’는 독자들의 반응도 올라왔다.

지난 5월 15일 서울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미역의 효능’ 작가(30·필명, 이하 미역 작가)는 “의미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은 했는데, 엄청난 사명감을 가지고 쓴 것같이 비쳐질까봐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 때부터 페미니즘 이슈에 대해 관심이 많았지만, 저도 이 주제로 만화를 그리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리다 보니 <아지갑>이 나왔어요”라며 웃었다.

처음 연재를 시작할 때는 유령이 된 노루와 세상에 홀로 남겨진 선희, 엄마와 딸에 대한 이야기만 구상했다고 한다. 선희가 겪은 성폭력 사건과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살을 붙였다.

주인공 선희는 꽤 입체적이고 복잡한 인물이다. 아홉 살에 사촌들로부터 강간을 당한 이후, 선희의 시간은 아홉 살에 멈춰 있다. 일상에선 딸 노루보다 철없고 때로는 실없는 모습을 보이지만, 어떤 순간에는 광기를 드러내기도 한다. 상처받고 연약한, 사회가 규정하는 ‘성폭력 피해자’의 상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그래서 오히려 현실적인 인물이다. 선희가 노루를 대하는 태도 역시 딸에 대한 모성보다는 어쩌면 훼손된 ‘자기애’를 찾는 과정에 가깝다. 환각상태에서 거울에 비춰지는 선희의 일그러진 얼굴과 교통사고 이후 노루의 일그러진 얼굴이 같은 점 역시 작가가 만들어둔 장치다.

“1부 연재가 끝나고 ‘선희의 모성애가 느껴져셔 좋았다’는 반응이 있어서, 제가 좀 덜 보여줬나 싶었어요.(웃음) 그래서 3부에 좀더 강하게 선희의 감정선을 몰고 간 부분도 있고요. 모성애 코드를 뺀 이유는 그냥 선희라면 안 그럴 것 같아서예요. 실제로도 모든 엄마들이 동일한 모성애를 갖고 있는 건 아니기도 하고요. 어쨌든 만화의 주인공이니 선희가 광기를 드러내면서도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캐릭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아니면 공감을 안 해주니까. 다행히 선희를 많이 사랑해주신 것 같아요.”

웹툰의 결말은 해피엔딩이지만, 섣부른 용서나 화해 시도를 하지 않는다는 점 역시 작품의 미덕이다. 오히려 선희는 과거 아들의 강간 장면을 목격했으면서도 외면했던 큰엄마, 사건을 덮어두려고만 했던 아빠에게 통렬한 복수를 시도한다. 미역 작가는 “웹툰 내용이 워낙 심각하고 처절해 작업을 하면서도 심리적으로 힘들었는데, 선희가 큰엄마에게 복수하거나 무당님이 나와 꿈에서라도 복수를 해주는 장면을 담으면서 어느 정도 위로도 되고 나름 희열도 느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미역 작가는 제목의 의미를 연재의 끝부분에서 밝혔다. 연재 처음부터 ‘아 지갑놓고 왔다’는 웹툰의 제목은 뒤에 이어질 말을 염두에 두고 지었다고 한다. 이어진 다음 문장은 ‘집에 가자’이다. 웹툰의 마지막 장면, 선희는 애증의 존재였던 엄마 경자를 찾아간다. “집은 선희가 그리워했던 엄마 경자의 집일 수도 있고, 새로 생긴 가족이나 친구에게 가게 되는 의미일 수도 있어요. 자기 안에 꽁꽁 갇혀 있었던 혼자만의 세계를 벗어나 주변 사람들과 진짜로 만나게 되는 과정인 거죠.”

몸에 각인된 고통의 경험, 그로 인해 갇힌 세계에서 서서히 빠져나와 자기 자신과 마주하게 된 과정. 그 과정 역시 고통과 혼란의 연속이지만 주인공 선희는 그렇게 잃어버렸던 얼굴을 되찾는다.

만만치 않은 주제의 데뷔작을 마무리한 미역 작가는 “원래 자기 비하가 심하고 소심한 성격이라 댓글을 잘 못봤는데, 다행이 댓글 반응이 대부분 좋아서 이제는 댓글들을 다 찾아 읽고 있다”고 말했다.

차기작은 작가 본인의 얘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아직 구상단계이긴 한데, 다음 얘기는 ‘미역은 왜 만화를 그리게 되었나’가 될 것 같아요.” 대학시절 사회학과 심리학을 전공한 그는 한 커뮤니티에 웹툰을 연재하게 되면서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선희와 노루가 아닌 ‘미역’의 이야기는 빠르면 올 가을쯤 독자들을 찾아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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