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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명랑사회를 위한 ‘부랑인 청소’…결국 우리도 공모자였다

입력 2017.06.18 20:59

수정 2017.06.18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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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소영 | 제주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

건전사회의 적, 부랑인

1987년 1월 부산 사상구 형제복지원 수감자들이 운동장에 모여 있다. 형제복지원은 국내 최대 규모의 부랑인 수용시설로 1987년 직원의 구타로 원생 1명이 숨지고 35명이 탈출하면서 인권유린 사태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1975년 설립돼 1987년 폐쇄될 때까지 형제복지원에서 모두 55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7년 1월 부산 사상구 형제복지원 수감자들이 운동장에 모여 있다. 형제복지원은 국내 최대 규모의 부랑인 수용시설로 1987년 직원의 구타로 원생 1명이 숨지고 35명이 탈출하면서 인권유린 사태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1975년 설립돼 1987년 폐쇄될 때까지 형제복지원에서 모두 55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연고 있는 이, 정상인 대 부랑인?

“일정한 주거 없이 관광업소, 접객업소, 역, 버스정류소 등 많은 사람들이 모이거나 통행하는 곳과 주택가를 배회하거나 좌정하여 구걸 또는 물품을 강매함으로써 통행인을 괴롭히는 걸인, 껌팔이, 앵벌이.” 이들은 우리 법이 ‘부랑인’이라 정의했던 대상이다. 아울러 “사회에 나쁜 영향을 주는 노변행상, 빈지게꾼, 성인 껌팔이 등”은 ‘준부랑인’으로 이름 붙여졌다. 1975년 12월 제정된 내무부훈령 제410호는 이들을 “신고, 단속, 수용, 보호하고 귀향조치 및 사후관리”하여 “도시생활의 명랑화를 기하고 범법자 등 불순분자의 활동을 봉쇄하는 데 만전을 기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특히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부랑인의 시설격리는 양 대회를 ‘명랑한’ 분위기 속에서 치르기 위한 ‘환경미화’의 일환으로 이야기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설립되어 성장한 전국 36개 부랑인보호소 가운데 하나가 형제복지원이었다. 형제복지원은 1970~1980년대 국내 최대 규모의 사회복지시설로, 적게는 1700여명에서 많게는 3900여명을 수용하여 매해 18억~20억원대 국고지원을 받아 운영되었다. 사회복지시설의 모범사례처럼 거론되며 수차례 국가표창도 받았던 형제복지원의 내부비리와 인권유린실태는 1987년 한 검사가 우연히 강제노역현장을 목격하여 수사에 착수한 것을 계기로 세상에 드러났다. 감금, 상습적인 구타·기합, 노동력 착취, 513명에 달하는 사망자들의 사망 경위와 시신유기 등도 언론에 공개되었다. 당시 주요 일간지 머리기사에서는 다음의 문구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씨(32)는 ‘연고가 있고 부랑인이 아닌데도 귀가조치되지 않고 있었다’고 말하며….”(중앙일보 1987·2·1)

“이곳은 복지원이 아니라 민간인을 포로처럼 수용하면서 정부지원금을 착취하는 사설교도소입니다. 거리를 방황하는 진짜 보호받아야 할 사람은 몇 명만 데려다 놓았을 뿐 나머지 사람들은….”(동아일보 1987·2·2)

“수용자의 70% 이상이 정상인으로 수용 부적격자였다.”(경향신문 1987·2·3)

주지하듯 기사들은 매한가지로 ‘부랑인 아닌 사람들도 수용되었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연고 있는 이’(중앙일보), ‘민간인’(동아일보), ‘정상인’(경향신문)까지 그곳에 섞여들어 있었다는 사실이 당시 큰 사회적 충격과 공포로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형제복지원 관련기사가 신문 정치면과 사회면을 채우고 TV뉴스 첫 꼭지로 보도되던 연일 동안 반복적으로 나타났던 서술이다. 이렇듯 사람을 격리하여 시설에 수용하는 일 자체가 아니라 억울하게 잘못 수용된 것이 핵심 문제라 한다면, 억울하지 않은 수용자의 표지란 무엇인가? ‘연고 있는 이’ ‘민간인’ ‘정상인’ 등으로 호명된 이들과 대척점에 놓인 부랑인은 누구인가? 정상·비정상의 잣대로 비부랑인과 부랑인을 분리하는 사유는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어 왔을까?

형제복지원 피해자인 한종선씨가 2015년 5월 국회 앞에서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왼쪽 사진). 형제복지원 재소자 살해사건 등을 계기로 정부가 마련한 개선책이 실린 1987년 2월3일자 경향신문(오른쪽). 당시 수용자의 70%가 부랑인이 아니라는 조사단의 발표 내용도 실렸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형제복지원 피해자인 한종선씨가 2015년 5월 국회 앞에서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왼쪽 사진). 형제복지원 재소자 살해사건 등을 계기로 정부가 마련한 개선책이 실린 1987년 2월3일자 경향신문(오른쪽). 당시 수용자의 70%가 부랑인이 아니라는 조사단의 발표 내용도 실렸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끌어내어 전시할’ 무능함: 식민지시기 부랑인

사실 부랑인 단속은 현대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정책은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부랑은 “방랑” “노숙” “걸식” “무뢰배적인” “일할 능력이 있음에도 일하지 않는” “빈곤” 등과 연계되어 시기별로 상이한 형사법적 제재·단속과 구빈법적 보호·관리의 대상이 되어 왔다. 한국의 경우 이에 대한 국가적인 관리가 시작된 것은 식민지시기였다. 1912년 3월25일 발포된 ‘경찰범처벌규칙’ 제1조에서는 “일정한 주거 또는 생업 없이 사방을 배회하는 자”(2호)를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여기서 “구걸을 하거나 하게 한 자”(7호)를 부랑인과 별도로 규정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식민당국의 부랑인 개념범주 안에 “노숙” “걸식” “빈곤” 등의 표지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시사한다. 주된 단속장소 또한 걸인들이 상주할 법한 길거리나 역전이 아닌 기생집이나 연극장 주변, 요리점과 여관 등 유흥가였으며, 주요 단속대상은 부호층 청년자제, 양반유생, 무뢰배 등이었다. 왜였을까? 가장 큰 이유는 식민지 구지배계층에게 “날마다 기생집과 요릿집에서 부랑을 교육”하는 부랑조선인의 이름표를 부착함으로써 이들의 무능과 부패를 선전하기 위함이었다. 이로써 차후 민족저항운동의 물적·심적 주동세력이 될 잠재성을 제거하는 효과도 기대하였을 것이다.

1914년 제1차 부랑자대청결 기간 중 서대문형무소에 징치되었던 부랑인들에 관한 매일신보 보도자료는 이를 잘 드러내고 있다. 두 달에 걸친 검거과정에서 잡혀온 700~800여명 가운데 구류처분을 받은 이는 80여명이었는데, 이들은 “진흙 물든 바지저고리”로 갈아입고 “양심을 감복시키는 훈시”를 들으며 노동을 학습하였다는 것이다. 출소과정에서는 포승줄로 묶인 채 이름을 크게 쓴 종이를 두루마기 동정에 달고 경찰서까지 행렬하였다. 부랑인 단속의 이와 같은 볼거리화는 이들을 무대 위로 끌어내어 전시함으로써 식민지 조선의 열등함을 선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읽힌다.

■ ‘감추어 가려둘’ 부끄러움: 해방·전후시기 부랑인

해방 직후 만주와 일본 등지로부터 귀환하는 동포들과 분단에 따른 월남 등으로 거리 기숙과 걸식은 해방된 사회의 고민거리로 다시금 부각되었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가족을 잃거나 굶주림을 면하고자 집에서 뛰쳐나온 아이들이 급증하면서, 거리를 떠돌며 무리 지어 구두닦이, 껌팔이, 넝마주이, 구걸행위 등을 하는 ‘부랑아’ 문제에 사회적 논의가 집중되었다. 1954년에는 남대문시장과 자유시장 미군PX 일대 및 명동 뒷골목에 수백명의 부랑아가 상주하였고, 종로3가와 동대문시장 일대에도 150여명이 집단을 이루었던 것으로 기록된다.

“부랑아” “전쟁고아” “슈샤인보이”에 대한 1950년대 언론보도에서는 폭력과 착취 등의 아동인권 문제도 언급은 되었으나, 주된 관심은 시민들의 불편함과 ‘창피함’에 맞추어져 있었다. 슈샤인보이가 객실 한 칸을 독차지하다시피 하여 정작 일반손님은 밀려나와 퀴퀴한 냄새가 비위를 뒤집어놓는 널빤지의자에 앉아야 했다거나, 부녀자 옷자락을 잡고 곤란하게 돈을 요구하는 꼬마거지에 난감함을 토로하는 독자투고란의 목소리들이 그러하였다. 특히 슈샤인보이들이 기지촌 여성과 미군을 연결시켜주는 “펨푸(호객꾼)” 역할을 하는 것은 국제망신으로 간주되었다. 주권이 부재했던 식민지시기와는 다른 맥락에서 국가체면 등을 손상시킨다는 점이 부랑아 단속의 주요 논거로 부상한 것이다. 이 시기 부랑인은 그렇기에 ‘끌어내어 전시할’ 대상이 아닌 ‘감추어 가려둘’ 대상이었다.

■ ‘재건되고’ ‘청소될’ 이중적인 몸: 발전주의시기 부랑인

반면 5·16쿠데타 세력이 사회악 일소를 내걸고 시행한 사회정화사업에서 부랑인은 더 이상 ‘감추어 가려둘’ 대상만은 아니었다. 사회의 치부 혹은 빈곤을 표상하던 존재들은 산업화를 위한 일꾼 만들기에 동원되었다. 1961년 6월12일 공포된 ‘재건국민운동에 관한 법률’에 따라 그해 8월 발족한 국토건설군은 국토개발사업에 필요한 노동력으로 깡패, 실업자 등과 함께 부랑인들을 대거 동원하였다. 이에 1961년 6월 서울의 부랑자 850명이 대관령 국토개발사업에 동원되었으며, 경남 창원의 황무지개간사업에는 재건소년개척단이, 그리고 전남 장흥 간척지사업에는 인지면개척단이 각각 투입되었다. 과포화상태인 보호시설에 격리하기보다는 황무지나 간척지 등으로 보내어 저임금 혹은 무임금으로 노동하게 하였던 것이다.

한편 주요 사회입법인 ‘윤락행위 등 방지법’(1961), ‘갱생보호법’(1961), ‘아동복리법’(1962), ‘생활보호법’(1962) 및 그 시행령들은 공공복리를 증진시키며 사회를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강제)시설수용규정을 두고 있었다. 아동복리법 제3조는 요보호아동을 위한 아동복리시설에 부랑아보호시설을 포함시키고, 생활보호법 제15조 2항은 “요보호자를 국가가 경영하는 보호시설에 의하거나 다른 보호시설에 위탁하여 보호를 행할 수 있”음을 명시한다. 법이 부랑인들을 재건의 일꾼으로 호명하는 동시에 시설에 위탁될 요보호자로 규정하는 이면에는, 아래 기사에서 드러나듯 주권국가의 대외적인 체면 문제가 여전히 자리하고 있음이 보인다.

“외국인의 눈도 있고한데 나라 체면이 손상되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 불구자나 병약자라면 적당한 수용대책을 강구하고 노동력이 있는 사람은 정도에 따라 근로의 기회를 주어 일소하여 주기를”(동아일보 1976·4·8)

이렇듯 부랑인의 표상에는 ‘불우-개조-재건’과 ‘질병-범죄-치안’의 이미지들이 뒤섞여 있었다. 이들은 명랑사회와 대립되는 “무위걸식하는 불우한 동포”이면서 건전사회와 대립되는 비위생적이고 위험한 존재로 각인되었던 것이다. 1976년 명동정화운동지침에서 앵벌이와 부랑인에 대한 단속이 하루 세 번 점포 앞 쓸기와 쓰레기 무단투기금지 등과 함께 제기되었던 것이나,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해외관광객을 위한 도시이미지 정화사업에서 부랑인 단속이 ‘주요지역 악취제거’와 같은 층위에서 논의되었던 것이 이를 방증한다. 부랑인은 산업일꾼으로 개조되어야 할 동시에 사회에서 청소되어야 할 이중적인 몸으로 규정되었으며, 법의 테두리 안에서 바로 그 법의 보호 바깥에 위치 지어졌다. 형제복지원 보도에서 비부랑인 수용자들이 부랑인으로 몰린 억울한 존재로, 부랑인 수용자들은 적절한 교화와 보살핌을 받지 못한 가여운 존재로 각각 분리되어 다루어진 것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였다.

■ 법이 부착한 부랑인 표지, 그리고 ‘우리’의 공모

1987년 대전 성지원 사건과 충남 양지원 사건 등이 연이어 담론화되자 정부는 부랑인 시설수용 정책의 근거규정인 내무부훈령 제410호를 폐지하기로 결정하였다. 문제의 형제복지원 또한 폐쇄되고, 인권유린이 확인된 여타 부랑인 수용시설들에서도 2개월 동안 1800여명이 귀가조치되거나 분산수용되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과 이듬해 봄, “민폐부랑인 보호조치”(경향신문 1987·11·14), “대구 부랑아 급증 사회문제로”(동아일보 1988·1·15)라는 제목의 기사가 각각 보도되었다. 독자란에 글을 투고한 어느 시민 또한 “복지원생들을 무더기로 석방함으로써 부산의 여러 지역이 부랑인들의 무법천지가 돼가고 있다”며, 정부가 “억울하게 복지원에 끌려간 사람은 석방하고 알코올중독·정신이상·가정파괴자 등 부랑인들을 수용할 시설을 마련하고 교화하여 재생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호소하였다(한겨레 1988·7·28). 요컨대 악덕시설은 나쁘지만, 자신의 생활공간 주위에 부랑인은 없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렇듯 부랑인은 단지 법령과 이를 악용한 자들의 사유에서만 건전·명랑사회의 적으로 각주된 것이 아니었다. 형제복지원 인권유린을 연일 폭로하던 언론보도에서, 야당 사건진상 조사보고서에서, 판결문에서, 그리고 시민투고란에서, 이들은 여전히 격리되고 관리될 대상으로 기입되어 있었다.

이제 법률에서 부랑인이라는 개념은 삭제되었다. 일상에서도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는 (부랑인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는 인식은 그때와 지금을 가로지르며 우리 안에 각인되어 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서울역>은 노숙인을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좀비와 같은 존재로 간주하는 사회적 두려움을 포착해낸 바 있었다. “일반시민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부랑인 소굴”에 대한 후속조치를 요청하던 1988년 어느 시민의 목소리와 서울역에 상주하는 노숙인들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을 표명하며 시설수용대책을 요구하는 지금 여기 목소리가 겹쳐짐을 자각할 때, 우리는 몇몇 악덕 사회사업가 및 과거 국가폭력에 대해 분노하는 ‘정의로운 시민’의 위치만이 아닌 공모자의 위치에 서 있기도 한 자신을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필자 이소영

[금지를 금지하라](5)명랑사회를 위한 ‘부랑인 청소’…결국 우리도 공모자였다

제주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다. 법학을 전공하였고, 법사회사와 법문학, 법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법을 통한 과거청산’ 문제와 한국 발전주의시기 ‘규제·단속의 법사회사’가 근래 관심 분야다. 주요 논문으로 <“건전사회”와 그 적들: 1960-80년대 부랑인단속의 생명정치> <법문학비평과 사회적 기억의 구성: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법을 통한 과거청산의 아포리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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