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와 라면 등을 생산하는 오뚜기는 소비자에게 익숙하지만 삼성이나 현대차처럼 한국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기업은 아니다. 한국 경제계 대표 인사들의 모임인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원사도 아니다. 그런 회사가 대통령 간담회에 참석했다. 간담회에 중견기업은 오뚜기가 유일했다.
며칠 전 대기업 관계자들은 오뚜기 회장이 27·28일 양일 중 언제 참석하는지 알아보느라 분주했다. 오뚜기와 같은 날 참석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한 지인은 “오뚜기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급’이 다른 작은 기업인데, 오히려 격이 맞지 않는다고 불편해하지 않을까?” 하고 물었다.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대기업들은 굳이 오뚜기에 ‘묻어가기’를 원했다. 간담회는 문재인 대통령이 기업에 ‘일자리 창출과 동반성장’을 당부하는 자리가 될 것으로 사실상 예고됐다. 대기업에 가장 부족한 부분이지만, 오뚜기는 비교적 잘 실천하는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 대기업으로서는 오뚜기를 방패 삼아 자신들의 잘못을 숨기려고 한 것이다.
문 대통령이 취임한 지 얼마 안됐을 때 한 대기업 고위 임원을 만났다. 기자는 대기업이 이익을 많이 내면 협력사에 이익을 나누는 게 바람직하지 않으냐고 했다. 당시 그의 논리는 단호했다.
“우리만 그렇게 하면 다른 회사로부터 엄청 욕먹을 텐데 그럴 수 있겠어요? 협력업체와 이익을 나누면 주주들이 강력하게 반발할 게 뻔해요. 계약도 없이 그렇게 했다가는 배임이 될 수도 있어요.”
대기업의 이익 공유는 기업 생태계 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기자의 이상쯤으로 치부하는 것 같았다. 2차 이하 협력업체에도 대금이 제대로 지급되도록 대기업이 지원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부당한 경영간섭이 될 수 있으니 위법 소지도 있다”고 했다.
진보 정권이 들어섰어도 단박에 달라지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불과 한두 달 사이에 세상이 급히 변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펀드를 조성해 1차 협력사가 2차 협력사에 물품대금을 전액 현금으로 지급하도록 했다. 협력사 간 대금 지급 과정에 ‘간섭’하고 나서겠단다. 현대기아차그룹은 협력업체 지원을 2·3차 협력사로 확대했다. 뒤질세라 SK그룹도 협력업체와의 상생펀드 규모를 대폭 증액하기로 했다.
일간지 경제면을 제작하는 기자 입장에서는 깜짝 놀랄 일이 연일 이어지고 있다. 전 같으면 톱기사로 처리할 만한 사안이지만, 대기업마다 비슷한 사례를 쏟아내고 있으니 박스나 작은 크기로 줄여야 할 형편이 됐다.
그사이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김상조의 공정거래위원회가 첨병 역할을 했다. 경제사회적 약자 보호를 우선순위로 꼽은 김 위원장은 ‘갑질’에 강력한 제재를 가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새 정부 경제민주주의 출발은 재벌개혁이 될 것”이라며 “스스로 변화해야 한다”고 대기업을 압박했다. 법을 개정하지 않고도 시행령, 고시 개정을 통해 개혁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정권의 시녀라는 검찰도 소매를 걷어붙였다. 검찰은 미스터피자(MP) 창업주 정우현 전 MP그룹 회장을 횡령·배임, 공정거래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공정위 고발이 없었음에도 검찰이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를 조사해 재판에 넘긴 것은 이례적이다.
변화의 결정판은 ‘일자리 중심 경제, 소득주도 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를 앞세운 새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이다. 가계소득을 늘려 분배와 성장을 꾀하는 이른바 ‘사람 중심 경제’이다. 문 대통령은 “우리 경제의 패러다임을 전면적으로 대전환한다는 선언”이라고 밝혔다.
개혁은 이미 진행 중이다. 대기업이 협력사를 지원하고, 비정규직을 없애겠다는 계획을 앞다퉈 내놓고 있다. 한결같이 막대한 자금이 들어간다. 그 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질 수는 없다. 과거 같으면 투자하거나 미래를 위해 유보했던 자금이다. 주주 배당이나 총수 일가 주머니를 채우는 데도 쓰였다. 하지만 이제는 사람을 위해 쓰겠다고 한다. 전에도 할 수 있었지만 바꾸지 않았던 일이다.
바람직한 방향이 분명해도 변화에는 고통이 따른다. 가보지 않은 길인 만큼 개혁이 반드시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장담할 수 없다. 자발적인 모양새를 취하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 ‘5년만 버티자’고 되뇌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역사가 짧은 한국은 기업문화가 성숙할 시간이 부족했다. 이제부터라도 건전한 기업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모든 시민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의지가 개혁을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