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혼자 있으니까...” 불안에 떠는 1인 여성 사업장

이유진·유수빈 기자
경향신문 일러스트

경향신문 일러스트

“일부러 많이 놔둔 거예요. 사람 많아보이려고.”

서울 서대문구에서 피부 관리실을 운영하는 강혜정씨(53·가명)는 가게 신발장에 놓인 신발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14년 간 혼자 피부 관리실을 꾸려가고 있는 강씨는 “손님이 많은 것처럼 해놓아야 나쁜 사람이 들어와 해코지를 하지 않을 것 같다”면서 “항상 신발을 여러 켤레 놔두고 있다”고 했다.

예약제로 운영되는 강씨의 피부 관리실은 예전엔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받았지만 이젠 여자 손님만 받고 있다. 강씨는 “건전업소라 소개하고 있는데도 찾아온 남자 손님들이 ‘얼굴 아래도 마사지 해달라’고 요구하거나 ‘특정 신체 부위를 경락해달라’는 등의 요구를 해 이젠 일절 남자 고객은 상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1인 꽃집을 운영하는 30대 여성 김모씨도 “여자 혼자 가게를 운영하다보니 겪는 어려움이 많다”고 했다. 김씨는 “저녁시간이면 술 취한 남성들이 꽃집에 들어와 ‘꽃이 시들었다’는 등 시비를 거는 일이 있다”면서 “좁은 공간에 둘만 있는 상태에서 그런 일이 생기면 무서워 제대로 말도 못하고 공포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또 다른 1인 꽃집 운영자 최모씨(28)도 “한 번은 밤에 꽃집 문을 닫고 집에 가는데 대학생쯤 돼 보이는 남자가 ‘혼자 일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남자친구가 없어 보이는데 나랑 만나자’며 쫓아와 도망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최씨는 최근 발생한 왁싱샵 살인사건에 대해 “나이를 불문하고 여자 혼자 운영하는 사업장은 범죄나 스토킹 위험에 노출돼 있는 것 같다”고 불안에 떨었다.

부산에서 혼자 미용실을 운영하는 임모씨(30)는 “왁싱샵 살인사건 이후 3~4시간마다 남편에게 전화로 ‘생존신고’를 하고 있다”면서 “원래 진상 고객이 많았는데 이제는 그게 살인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에 고민이 많다”고 말했다.

지난달 5일 배모씨(31)가 여성 혼자 일하는 왁싱샵을 찾아가 주인을 성폭행하려 시도한 뒤 살해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혼자 사업장을 운영하는 여성들의 불안이 커지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왁싱샵여혐살인사건’ 등의 해시태그와 함께 1인 여성 사업장에서 일어나는 성희롱이나 범죄등에 대한 경험담이 공유되고 있다.

한 누리꾼은 자신의 트위터에 “‘왁싱샵여혐살인사건’ 이 해시태그를 보자마자 혼자 에스테틱 가게를 운영하시는 엄마가 생각났다”며 “남자손님은 받지 않는데도 카톡으로 ‘예쁜 원장님~’이라며 상담을 받고 싶다고 하거나 뜬금없이 자기가 이사가는 동네를 알려오는 남자들이 있다. 엄마는 성격대로라면 당장 욕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길거리 지나가다 들어와 찌를까 무서워 그냥 웃어 넘겼다고 했다”고 적었다.

국세청 국세통계연보에 따르면 2015년 말 기준 국내 총 사업자 670만2000여명 중 여성사업자 비율은 37.5%다. 개인사업자 중 여성 비율은 40.2%로서 5년 전인 2011년 38.7%보다 1.5% 포인트 증가했다. 이에 따라 여성 혼자 가게를 운영하는 1인 사업장도 늘면서 이를 노린 범죄도 잇따르고 있다.

지난달 경기도 안산시에서 50대 여성이 운영하는 마사지 업소에 강도가 침입해, 주인을 폭행하고 휴대전화와 체크카드 훔쳐 달아난 일이 발생했다. 지난 2월엔 여성이 혼자 운영하는 식당만 노려 현금과 가방 등을 훔친 혐의로 이모씨(48)가 서울 동작경찰서에 구속됐다. 지난해 9월엔 여성 혼자 일하는 가게에 손님을 가장해 들어가 물품을 빼앗고 성폭행을 한 40대 남성이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단순히 사업장에 폐쇄회로(CC)TV 하나 단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며 “어린시절부터의 꾸준한 성평등 교육, 인권교육 등 다각적인 접근과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권김현영 성공회대 외래교수(여성학)는 “여자 혼자 일하는 영업장이 불안한 건 너무 당연하다”면서 “단순히 1인 창업주에 대한 지원, 인큐베이팅의 문제로 해결할 수 없으며 여성에 대해 남성들이 가지는 차별 문화가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오는 6일 오후 12시 서울 지하철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는 ‘이번에도 여자라서 죽었다’는 표어 아래 ‘왁싱샵 살인사건 규탄집회’가 열릴 예정이다. 강남역 10번 출구는 지난해 5월 강남역 인근 한 건물 화장실에서 한 남성이 일면식 없는 여성을 살해한 사건 이후 피해자를 추모하는 쪽지 수천장이 붙었던 곳이다.


Today`s HOT
혹독한 겨울 폭풍, 미국을 강타한 후의 상황 오스트리아의 한 마을에서 일어난 공격으로 현장은 추모의 분위기 해변에서 여유를 만끽하는 프랑스 시민들 꽃 피운 계절이 온 스페인의 여유로운 일상
남세균으로 인해 녹색 물이 든 살토 그란데 호수 리알토 다리 아래에서 모두가 즐기는 카니발
여자 싱글 프리 금메달 주인공, 한국의 김채연 창립 50주년을 맞이한 피나왈라 코끼리 고아원의 현장
홍수와 산사태 경보 발령된 미국 캘리포니아 여성에 대한 폭력 근절, '10억 라이징' 캠페인 뮌헨 베르디 시위 중 일어난 차량 돌진 사고.. 발렌타인데이 맞이 태국의 '풍선 사랑' 행사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