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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이슈기획-거절의 기술

예스맨 기자의 ‘거절왕’ 도전기

  • 김형규 기자
“요즘 창비가 어렵습니다.” 바바리코트를 입은 중년의 사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데 듣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요즘 취직하려면 영어는 필수인 거 아시죠?” 커리어우먼처럼 차려입은 여성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해도 속수무책이었다. 막 대학에 입학한 나는 시쳇말로 ‘호구’였다. 캠퍼스 지리도 잘 모를 때였다. 그렇게 강의실에서, 매점에서, 캠퍼스 한구석에 주차된 봉고차 안에서 나는 각종 계약서와 신청서에 사인을 해댔다. 집에는 읽지도 않을 전집과 계간지, 영문 주간지가 차곡차곡 쌓였다. 학자금 융자로 등록금도 간신히 내는 주제에 터무니없는 지출이었다.

‘내가 그래도 명색이 문학도인데.’ 지적 허영이 없었다고는 말 못한다. ‘그래도 남들만큼은 해야지.’ 막연한 불안감도 한몫했을 것이다. ‘노련한 영업사원의 준비된 코멘트에 어리바리한 대학생이 배겨낼 재간이 있나.’ 늘 피해자인 것처럼 말했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면 다 변명이다. 지금은 안다. 거절 못하는 우유부단한 성격이 모든 문제의 원흉이라는 것을. 더 이상 실속 없는 ‘예스맨’ 노릇 하지 말고 ‘거절왕’에 도전해보라는 토요판팀의 제안에 내가 솔깃했던 건 당연지사였다. 그래, 결심했어!

시내 대형서점에서 거절에 대한 책을 찾았다. 대충 추려도 10여권이나 됐다. 대부분 자기계발서 코너에 있었다. 더러는 심리학 서적으로 분류됐다.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거절은 당연한 권리이고, 진정한 관계의 시작이며, 시작이 어려울 뿐 막상 해보면 별것 아니야…. 참나, 남의 얘기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니니? 어쨌든 실전에 돌입해보기로 했다.

석 달 전부터 진행 중인 기획 시리즈 회의 시간. 밤새 준비한 기사 계획안을 팀장은 한마디로 뭉갰다. “A기사하고 B기사를 합쳐서 하나로 만들어봐.” 애초에 다른 주제로 취재한 각각의 기사인데 하나로 합치라니, 무리한 주문이다. “그건 어렵겠는데요.” 결론은 분명했지만 말은 끝내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자 다음 아이템.” 거부의 기회는 이미 사라졌다. 다음 회의 때까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팀장의 지시대로 해보는 수밖에 없다. 누구를 탓하랴. 말을 꺼내보지도 않고 갈등 상황을 피하려고만 한 내가 바보지. 후회, 그리고 자책. 익숙한 패턴이다.

다음날 미용실에서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다. 평소처럼 조금만 다듬어달라는 말에 미용사는 “날도 더운데 옆머리를 시원하게 쳐보라”고 권했다. 전혀 그러고 싶지 않지만 입씨름하기도 귀찮다. “네 뭐 적당히….” 바리캉이 부지런히 움직인다. 10여분 후 거울 앞에서 나는 표정관리에 애를 먹었다. ‘이참에 다른 스타일도 시도해보는 거지 뭐.’ 금세 자기합리화를 하는 스스로에게 기가 막힌다. 자책은 점점 좌절감으로 변해간다. 나는 왜 이렇게 생겨먹은 걸까….

‘NO’라고 쓰인 종이를 들고 카메라 앞에 선 K기자 /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NO’라고 쓰인 종이를 들고 카메라 앞에 선 K기자 /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정말 안되겠다. 내 마음을 한 번이라도 솔직하게 말해보자. 책에서 배운 대로 쉬운 것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 부서 선배들과 점심식사 후 카페에 들렀을 때 나의 작은 ‘거사’가 시작됐다. 모두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할 때 조그맣게 말했다. “저는 수박주스요.” 안 땡기는 쓴 커피를 억지로 마시는 대신 달콤한 주스를 마시며 생각했다. 오 진짜 별거 아니네.

내친김에 더 큰 도전에 나섰다. 저녁 먹고 퇴근했는데 ‘김치찌개 끓였으니 맛 좀 보라’는 장모님의 서든 어택. 난 결혼하고 한 번도 장모님 말씀을 거역해본 적이 없다. 평소 같았으면 군말 없이 숟가락을 들었을 거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잠시 정적. “저 밥 먹고 왔어요.” 의외로 장모님의 안색은 큰 변화가 없었다. “그래 밥은 먹고 다녀야지.” 이렇게 쉬운 걸 왜 그동안은 혼자 오만 상상을 하며 생쇼를 한 걸까. 아차차, 자꾸 자책하면 안된다고 했지. 이대로 한 번 쭉 가보자. 난 그래도 돼. 눈치도 배려도 없는 거절왕의 길로!



우리는 왜 거절하지 못하는가

사례 1. 홍보대행사에 다니는 김길수 팀장(34·가명)이 이끄는 팀에 최근 비상이 걸렸다. 퇴근 무렵 클라이언트가 예정에 없던 보고서 제출을 갑자기 독촉해온 것이다. 전 팀원이 이틀 동안 꼼짝없이 야근을 하게 생겼다. 다들 저녁 약속을 취소하고 집에 늦는다는 전화를 하느라 바쁘다. “누가 봐도 무리한 요구이고 제 선에서 잘랐어야 하는 게 맞는데….” 안된다는 한마디가 김 팀장에겐 너무 힘들었다. 말없이 커피와 간식거리를 사다 나르며 수없이 자책하는 그의 속마음을 다행히 팀원들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사례 2. “요새 많이 피곤한가봐. 피부가 왜 그래?” 부장이 점심 먹으며 한 말이 처음엔 걱정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일종의 ‘작업 멘트’였다. 그가 부업으로 다단계 화장품 판매를 하는 줄 그제야 알았다. 불쾌했지만 그래도 거절은 못했다. 대기업에 다니는 고혜수 과장(41·가명)은 울며 겨자 먹기로 20만원짜리 화장품 세트를 구입했다. “어쩌겠어요. 직속 상관인데. 화장품은 꼴도 보기 싫어서 아는 동생 줘버렸어요.”

김 팀장과 고 과장의 고민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정도와 종류의 차이는 있겠지만 제때 잘 거절하지 못해 난처했던 경험은 누구나 있다. 피하고 싶어도 거절은 누구에게나 인생의 ‘상수’다.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다. 물론 마음처럼 쉽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내키는 대로 거절하면서 회사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호구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착한 등신’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게 우리들이다.

타고난 오지랖, 소심한 성격, 부탁을 빙자한 ‘갑질’에 무너지는 ‘을’의 처량한 신세까지… 거절 못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결과는 비슷하다. 대책없는 ‘예스맨’에게 신체는 두통, 소화 불량, 이명, 심혈관 질환 등의 ‘신호’를 보낸다. 거절을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좌절이 커지면 우울증이 되기도 한다. / 이준헌 기자 ifwedont@khan.kr

타고난 오지랖, 소심한 성격, 부탁을 빙자한 ‘갑질’에 무너지는 ‘을’의 처량한 신세까지… 거절 못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결과는 비슷하다. 대책없는 ‘예스맨’에게 신체는 두통, 소화 불량, 이명, 심혈관 질환 등의 ‘신호’를 보낸다. 거절을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좌절이 커지면 우울증이 되기도 한다. / 이준헌 기자 ifwedont@khan.kr

■나는 왜 거절하지 못하는가

심리학적으로는 거절 못하는 성격을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설명한다. 내가 상대방을 거절하면 상대방 역시 나를 미워하고 배제해 관계가 단절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반대로 부탁을 다 들어주는 나는 언제나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사랑받을 것이라 믿는다. 이른바 ‘착한 사람 콤플렉스’다.

전 세계 어디나 거절해야 하는 상황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관계지향적’인 특성이 강한 한국인에게 거절은 특히 더 쉽지 않다. 김태훈 경남대 교수는 “흔히 서양은 개인주의, 동양은 집단주의 성향이 강하다고 나누는데, 한국은 집단주의 못지않게 관계주의적인 성향이 아주 강하게 나타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일본의 경우 내가 속한 조직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이 상충할 때 대부분 전자를 택하는 반면, 한국인들은 나와 절친한 지인과 조직의 이익이 충돌할 경우 주저 없이 조직에 등을 돌린다는 것이다. 즉, 한국에서는 나와 관계 맺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하다 보니 더더욱 상대방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운 상황이 연출될 수밖에 없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는 어린 시절 가정에서부터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이승욱 닛부타의숲 정신분석클리닉 대표는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그 대가로 칭찬을 받는 단순한 인정 욕구가 지나치게 커지면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생존 전략으로까지 격상된다”고 지적했다. 모든 관계맺기의 시초가 되는 부모와의 관계부터 일방적인 수용이 내면화되는 것이다. ‘어른의 말을 잘 따르는 아이가 착한 아이’라는 흔한 가정교육은 이런 관계의 왜곡을 학교와 사회 전체로 확대재생산한다.

문제는 그렇게 누적된 불만과 억눌렸던 분노가 어느 순간 이유 없이 폭발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 방식은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 분풀이 대상은 대개 자기보다 약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밖에선 철저한 ‘예스맨’으로 살다 집에만 오면 자녀들에게 ‘헐크’로 변하는 부모가 대표적이다. 이 대표는 우울증을 경고하기도 한다. “거절을 못해서 엉뚱한 일로 한나절 고생하게 됐다면 엄청 화가 나겠죠. 무엇보다 부탁한 그 사람도 원망스럽지만 바보같이 거절도 제대로 못한 자기 자신에게 가장 화가 날 거예요. 스스로에게 향하는 분노가 깊어지고 그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면 우울증이 되는 겁니다.”

■거절을 못하는 게 내 성격 탓일까

전문가들은 개인의 성장 과정이나 성격보다 거절을 힘들게 만드는 사회구조적 원인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나영 중앙대 교수는 “한국 사회는 다층적 위계질서로 구성돼 있고 그 안에서 사회적 약자가 어떤 부탁이나 명령을 거절하기 어려운 구조”라며 “거절이란 게 단순히 하나의 선택이 아니라 자기 위치의 불안정성과 연결되기 때문에 거절이 어려운 것”이라고 말했다. 효과적인 거절을 위해 때로는 외부의 개입이나 사회적 배려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현대카드는 최근 고객들이 성희롱(2회)이나 욕설(3회)을 하면 콜센터 상담원이 경고 후 먼저 전화를 끊을 수 있도록 정책을 바꿨다. 고객에게 감히 ‘노’라고 말하기 힘들었던 서비스 업종의 ‘을’들에게 확실한 거부권을 부여한 셈이다. 조치 이후 상담원 설문 결과 53%는 스트레스가 줄었다고 답했고 79%는 업무가 수월해졌다고 했다. 무례한 언사로 상담을 중단당한 고객의 97%는 태도를 고쳐 정상적으로 상담에 임했다. 제대로 된 거절의 표시가 소통 효율을 극적으로 높인 것이다.

거절은 내가 처한 상황과 나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진정한 대화’의 시작이다. 상대방이 나를 잘 이해할수록 관계는 오히려 튼튼해진다. 매끄러운 거절을 위한 요령도 여러가지다. 모든 부탁에 응하기 전 충분히 숙고하는 게 먼저다. 거절의 이유를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하면 상대방도 쉽게 납득할 수 있다. 상황 모면을 위한 거짓말은 절대 금물. / 이준헌 기자 ifwedont@khan.kr

거절은 내가 처한 상황과 나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진정한 대화’의 시작이다. 상대방이 나를 잘 이해할수록 관계는 오히려 튼튼해진다. 매끄러운 거절을 위한 요령도 여러가지다. 모든 부탁에 응하기 전 충분히 숙고하는 게 먼저다. 거절의 이유를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하면 상대방도 쉽게 납득할 수 있다. 상황 모면을 위한 거짓말은 절대 금물. / 이준헌 기자 ifwedont@khan.kr

커뮤니케이션 컨설팅 기업인 ‘더랩에이치’ 김호 대표는 지난해 거절에 관한 책 <나는 왜 싫다는 말을 못 할까>를 펴내고 여러 단체와 기관에서 강연을 해왔다. “한번은 강연을 하러 갔는데 주최 측에서 ‘부정 커뮤니케이션, 거절’이라고 강연 제목을 붙여서 플래카드를 붙여놨더라고요. 강연 시작부터 그 얘길 했어요. 거절은 부정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진정 커뮤니케이션’이라고요.”

‘윗사람 말을 거스르면 버릇없다고 하지 않을까’ ‘사랑하는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는 건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거절에 대한 흔한 오해들이다. 그러나 거절은 상대방 자체가 아닌, 부탁을 받아들일 수 없는 나의 상황에 대한 설명이다. 항상 남들한테 속마음을 숨기고 ‘괜찮아요’를 연발하고, 스스로 ‘착한 사람’이라고 자부하며 살아온 김 대표는 실제론 자신이 지독한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했다. “내 마음속 진심을 상대방에게 전달 못하고 눈앞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거잖아요. 거절은 절대로 부정적인 게 아니고 오히려 진정한 대화의 출발점이에요.”

거절은 한국 사회가 추구해야 할 민주주의의 방향이기도 하다. 심리학 용어 중에 ‘학습된 무기력’이란 말이 있다. 반복된 실패 경험을 통해 ‘어차피 해봤자 안될 거야’라는 생각이 굳어져 종국에는 상황 개선을 위한 시도조차 않는 무기력한 상태를 말한다.

“우리 사회 분위기가 그런 것 같아요. ‘거절해도 어차피 안 먹히겠지’라는 무기력감. 지난 30년간 절차적 민주주의는 발전했지만 집과 학교, 직장에서도 민주주의가 뿌리내렸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거죠. 매일매일 가정과 학교와 직장에서 ‘나는 생각이 달라요’ ‘미안하지만 그건 안되겠어요’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게 정말 생활에서 실천하는 민주주의가 아닐까요.” 김 대표의 말이다.

결국 민주주의의 바탕은 서로 다른 의견을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는 성숙한 소통문화다. 우리가 더욱 열심히 ‘거절’을 연습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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