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ㄱ씨의 자녀가 구입한 유머집으로, 가로 7.5㎝ 세로 9cm 크기에 ‘유머인생 40년’이란 제목이 적혀있다. 독자 제공
초등학교 3학년 딸을 둔 학부모 ㄱ씨는 얼마 전 아이가 들고 온 유머집의 내용을 보고 당황했다. 손바닥 만한 유머집에 비속어와 왜곡된 성의식을 담은 내용들이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ㄱ씨는 8일 “성인들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에 욕설까지 버젓이 담긴 유머집이 애들이 매일같이 들락거리는 문방구에 유통되고 있어 놀랐다”며 “인터넷, 모바일 시대에 아직도 이런 것들이 아이들의 푼돈을 야금야금 뜯어먹으며 팔리고 있는 게 의아하다”고 말했다.
ㄱ씨 자녀는 이 유머집을 서울 강북구 한 초등학교 앞 문구점에서 구입했다. ‘유머인생 40년’이란 제목의 이 유머집은 총 72페이지 분량의 가로 6.5cm, 세로 9cm로 아이들의 손바닥에 딱 맞는 크기다. 500원에 팔리는 유머집에 제작사는 표기돼 있지 않았다. 유머집에는 ‘개XX’, ‘십XX’와 같은 비속어는 물론 딸과 함께 영화관에 간 엄마가 성추행을 당하는 딸을 부러워하는 등 성범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내용도 담겼다.
다음은 ‘유머인생 40년’에 실린 내용 중 일부이다.
■어떤 모녀
어떤 모녀가 영화관에 갔다. 한참 영화에 빠져있는 엄마에게 딸이 소근거렸다.
“엄마, 옆에 남자가 자꾸 내 허벅지를 만져.”
그러자 발끈한 엄마 왈
“나랑 자리 바꿔.”
■<이런 게 진짜 강적!>
어떤 노처녀가 더운 여름날 주변에서 간곡하게 부탁을 해 겨우 맞선을 보게 됐다. 온갖 멋을 부려 약속 장소에 나갔는데, 맞선을 보기로 한 남자가 2시간이 지나서야 어슬렁 나타난 것이었다. 평소 한 성깔하던 그녀는 열 받아서 가만히 앉아 있다가 드디어 남자에게 한 마디 했다.
“개 새 끼…키워 보셨어요?”
그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그 넘(놈)은 입가에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십 팔 년…동안 키웠죠”
헉~ 강적이다!
■부부 가사 분담
[Q]부부 가사 분담은 어떻게?
*여자=일 전부
*남자=준비와 뒷처리
*시어머니 방문시=여자가 전부 다!!!
(ex)
-여자가 식사를 준비하면 남자는 장보기와 설거지
-여자가 빨래 버튼을 누르면 남자가 빨래 널고 개기
*여자가 임신했을시
-마일리지 10000포인트 적립
-청소, 빨래, 식사=10점 차감
-12시 이후 심부름시=100점 차감
-제철 과일이 아니거나 구할 수 없는 것=500점 차감

초등학교 앞 문구점에서 판매 중인 ‘유며인생 40년’이란 유머집에 ‘연인들의 스킨십’이란 제목의 글이 실려있다. 독자 제공
경향신문이 8일 서울 시내 초등학교 앞 문구점들을 살펴본 결과 실제로 다수의 초등학교 앞 문구점이 비슷한 유머집을 판매하고 있었다. 서울 동대문구의 한 문구점은 해당 유머집을 가장 눈에 띄는 출입문에 내걸고 판매 중이었다. 원색 표지에 카카오톡 프렌즈 캐릭터가 그려진 ‘크게 웃어봐’라는 제목의 이 유머집 역시 가로 6.5cm 세로 9cm 크기로 가격은 500원이었다. 해당 유머집에도 성인들이나 이해할 법한 내용과 여성 비하 등 문제적 내용이 담겨 있었다.

8일 오전 서울 시내 한 문구점에서 ‘크게 웃어봐’라는 제목의 유머집을 판매하고 있다. 유수빈 기자
다음은 ‘크게 웃어봐’에 실린 내용 중 일부이다.
■얄미운 년 시리즈
1. 툭 치는데도 멀리보내는 년
2. ‘아구구구’ 비명 지르면서 홀 속으로 쏙 집어넣는 년
3. 매일 땡볕에서 놀아도 기미 안 낀다고 자랑하면서 씻고 쌩얼로 집에 가는 년
4. 허구헌 날 공치러 다니는데도 공부 잘해 SKY대 다니는 자식 둔 년
5. 안 된다고 궁시렁 거리면서도 절대로 90타 안 넘기는 년
6. 그늘 집마다 들어가 처먹고 마시고 회식 땐 미친 듯이 먹는데도 똥배 안 나오는 년
7. 이렇게 얄미운데도 동반자 구하는데 어려움이 없는 년
■마누라와 애인 구별법
1. 부부는 별 말이 없지만 애인 사이는 다정하게 소곤거린다
2. 부부는 각자 자기 채를 빼어들지만 애인에게는 다음 칠 채를 갖다준다
3. 아내가 뒤땅을 치면 머리가 나쁘다고 하고 애인에게는 잔디가 나쁘다고 한다
4. 아내 공이 벙커에 빠지면 넒은 FAIRWAY 놔두고 왜 하필 거기로 치냐고 하고 애인에게는 이 골프장은 벙커가 너무 많다고 불평한다
5. 아내의 샷은 못 친 것만 기억하고 애인의 샷은 잘 친 것만 얘기한다
6. 그늘집에서 아내가 뭘 마시겠다고 하면 냉수 먹고 속 차리라 소리치고 애인에게는 생과일주스가 좋다고 한다
■사례
일주일 전에 성당에서 결혼을 했던 신혼 부부가 신부님을 찾아왔다.
신랑: 저희 주례봐주신 거 조금이나마 사례를 하려고 왔는데 얼마 드리면 될까요?
신부님: 하하 거짓말 시키지 말고 신부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만큼 성의껏 주시면 됩니다
신랑: 10만원 드리면 됩니까? 하고 수표 한 장을 내밀었다
그러자 신부님이 신부 얼굴을 가만히 보더니…
9만원을 신랑에게 거슬러 주었다

8일 경향신문 기자가 서울 시내의 한 초등학교 앞 문구점에서 구입한 유머집 표지에 ‘크게 웃어봐’라는 제목과 함께 카카오톡 프렌즈 캐릭터가 그려져 있다. 이유진 기자
문구점 주인 반모씨(77)는 “포켓유머집을 사가는 것은 주로 초등학생 3~4학년 남학생들”이라며 “한 명이 사면 주변 친구들이 따라서 사는 식”이라고 말했다. 그는 “유머집이라고 해서 문구 납품업자한테 주문해서 받는데, 누가 만드는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4학년 이모군(10)은 “한 번 궁금해서 봤는데 웃기고 재밌었다며 친구들이랑 하나씩 사서 봤다. 신기해보여서 처음 샀는데 재밌어서 2~3번 샀다”고 했다. 이군은 “내용이 이상한 건 전혀 못 느꼈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5학년 박모양(11)은 “포켓유머집을 학교 앞 문구점에서 본 적이 있다”며 “사본 적은 없지만 친구들이 이상한데 재밌다고 하면서 많이들 본다”고 말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아직 판단력이 미숙한 어린 학생들은 왜곡된 성의식과 나이에 맞지 않는 내용의 유머를 접하면 이를 유머로 받아들이기 보단 무비판적으로 학습을 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곽 교수는 “엄밀히 말하면 이런 유머집은 남한테 해를 가하고 부정적 인식을 심어준다는 점에서 제대로 된 유머집이라고 할 수도 없다”면서 “오히려 아이들에게 해를 입히는 유해물”이라고 말했다. 곽 교수는 “제작사들이 이를 제작하지 않도록하는 게 가장 좋은 대책이지만 이와 더불어 아이들 주변의 어른들이 이러한 내용이 잘못됐다는 걸 알려주고 인지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