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교육 표준안 논란 후 수정안도 미혼가정 폄훼·동성애 등 성소수자 내용 빠져…
나아진 것 없다는 현장 반응에 교육부 “참고자료일 뿐”
윗줄의 그림들은 2015년 당시 교육부가 공개했던 성교육 자료에서 문제로 지적됐던 내용들. 기존의 성별 고정관념을 되레 강조하거나, 성폭력 예방책이라며 ‘허무 개그’에 가까운 내용들을 소개했다. 아랫줄은 최근 교육부가 수정, 배포한 교육안에 실린 삽화와 자료들로 여전히 옷차림에 차별적 이미지를 강조하고 미혼모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들어가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과 왁싱숍 살인사건부터 잊을 만하면 터지는 대학가의 ‘단톡방 성희롱’ 사건까지, 여혐(여성혐오) 범죄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아프리카TV에서는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발언을 일삼는 BJ들이 별풍선을 끌어모으며 인기랭킹 상위를 달리고, 성평등을 요구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꼴페미’로 매도당한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성평등 교육을 하면 (성인보다) 공감을 잘해요. 그런데 5~6학년만 돼도 쉽지 않아요. 이미 기존의 성역할에 충실하게 행동하는 게 아이들 사이에서 프라이드가 돼버리는 거예요. 3학년 때 가르쳤던 아이를 5학년 때 다시 가르치게 됐는데 사고방식이 달라져서 깜짝 놀란 적이 있어요.”
초등성평등연구회의 서한솔 상천초 교사는 어릴 때부터 ‘성인지 교육’을 하는 것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한번 잘못 주입된 성 인식은 성장할수록 더욱 공고화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은 성인보다 인권 감수성이 뛰어나요. 왜냐하면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사회에서 약자의 입장이거든요. 여성인 제게 ‘위험하니까 밤에 돌아다니지 말라’는 말이 모욕적이란 걸 성인 남성들은 쉽게 공감하지 못하지만, 아이들은 이해해요. 왜냐면 자기들도 같은 이유로 밤에 놀 수 없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약자라는 이유로 자유를 부당하게 제한당하는 것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거죠.”
서 교사의 말처럼 아직 사회의 잘못된 통념에 길들여지지 않은 초등학교 시절은 성평등 인식이 뿌리내릴 수 있는, 가장 절호의 시기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국민권익위원회가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간 접수한 학교 성폭력 민원 750건 가운데 가장 많은 213건(28.4%)은 초등학교에서 발생했다. 교육부가 지난 2월 발표한 학교 성폭력 실태조사에서도 피해 경험은 초등학생(2.1%)이 가장 많았다. 초등학생 성폭력 사건은 2013년 130건에서 2015년 439건으로 3배 이상 늘었다.
교육부는 2015년 체계적인 성교육 강화를 내세우며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적용할 수 있는 국가 수준의 ‘성교육 표준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교육부가 제시한 성교육 자료의 내용이 오히려 성차별과 성폭력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성교육 자료가 오히려 성차별 조장
성교육 표준안에 대한 비판은 정확히 말하면 표준안을 활용한 교사용 지도서 등 교육자료에 좀 더 집중된다. 표준안 도입 배경과 취지, 구체적 교육과정 등을 담은 총론 성격의 성교육 표준안은 “남녀 간에 조그만 편견이라도 가져서는 안된다” “성교육 교사는 양성평등을 전제로 지도해야 한다” “교사의 일방적인 가치의 주입보다는 학생 스스로 다가치(多價値) 안에서 자기 기준을 정해 자율적으로 학습하도록 해야 한다” 등 비교적 상식적인 언급을 하고 있다.
문제는 교실에서 실제 수업에 활용하라며 만든 당시 교육부의 교육자료엔 정작 이와 반대되는, 성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부정확한 사실이 넘쳐났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남녀의 뇌 구조를 그림으로 보여주면서 남자는 운동과 게임, TV 생각만 가득하고 여자는 외모와 수다, 화장에만 관심 있는 것처럼 표현(중등)한 것은 기존의 성별 고정관념과 차별적 성역할을 강조하는 대표적 사례다. 미혼 남녀의 배우자 선택 요건에서 여성은 외모를, 남성은 경제력을 높여야 한다는 서술(초등)도 나온다.
성욕에 대해서도 잘못된 통념을 강화하고 자칫 성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표현이 등장한다. “여성은 한 특정 남성에게만 성적으로 반응하는 데 비해 남성은 성적으로 매력적인 여성들과 널리 성교할 수 있다”(고등) “남자의 경우 성에 대한 욕망은 충동적으로 급하게 나타나”(초등) 등의 언급은 남성의 성욕이 여성보다 왕성하며 제어하기 힘든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데이트 비용을 많이 사용하는 남성 입장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원하게 마련이고, 이 과정에서 원치 않는 데이트 성폭력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등)는 황당한 내용도 들어 있었다.
성폭력에 대한 서술도 부적절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성교제가 건전하지 못했을 때 성폭력이 발생할 수 있다”(중등) “성관계를 갖겠다는 생각이 없으면 함께 숙박업소에 가지 않는다”(고등) “평소 단호하게 의사결정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등) 등 성폭력의 원인과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하는 듯한 내용들이 다수 포함됐다.
이 밖에도 ‘야동’과 ‘자위’ 같은 단어조차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잘못된 피임법(체외 사정)을 안내하는 등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다양하게 제기됐다. 처음으로 성관계를 맺는 연령이 10대 초반까지 내려온 상황에서 청소년들에게 무조건 ‘성충동’을 억제하라는 식의 금욕주의적 교육은 퇴행적이라는 지적이 잇따랐다.
■교육부는 고쳤다는데… 고친 거 맞나?
논란이 계속되자 교육부는 지난해 6월 홈페이지에서 표준안과 교육자료를 슬그머니 삭제했다. 이후 외부 용역을 맡기고 1년가량 수정 작업을 해 최근 최종안을 다시 만들었다. 그러나 수정된 교육자료에도 문제점이 곳곳에서 발견됐다.
수정안은 청소년 미혼모·미혼부의 문제점으로 저소득·빈곤·저학력 등을 꼽고 ‘미혼모가 될 경우 평생 죄책감에 힘들 수 있다’ ‘학생이라는 평범한 행복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는 등 미혼모·미혼부에 대한 사회적 폄훼를 부추기는 내용이 담겼다. 초등성평등연구회에서 활동하는 서한솔·이신애 교사는 “사회교과 등에는 조손 가정 등 다양한 가족 형태에 대해 나와 다르다고 비웃거나 무시하면 안된다고 가르치는데, 성교육 표준안에서는 엄마·아빠로 구성된 소위 ‘정상’ 가족만 존재한다”면서 “학교 현장에는 한부모 가정이나 시설 아동도 있는데, 그들이 받을 상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성교육 자료에 실린 여성의 삽화도 대부분 치마·앞치마를 입거나 임신 상태를 보여주는 등 성역할에 대한 편견을 여전히 드러냈다. 성폭력에 대해서도 “술을 마시고 늦게까지 놀다가 성폭행을 당해” 등 잘못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피해자 유발론’에 해당하는 표현들이 그대로였다.
‘남녀에게 맞는 편안하고 안전한 옷차림 찾아보기’에서 여성이 배꼽티와 짧은 치마, 딱 붙는 바지 대신 치마를 입은 모습을 바른 옷차림으로 제시(초등)한 것도 마찬가지다. 성교육 강사로 활동 중인 백목련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성교육 표준안 전반에 성차별적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며 “성차별적 생각은 그저 생각에 머무는 게 아니라 종종 성폭력 가해나 2차 가해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교육부는 “성교육을 하면서 동성애 등 성소수자에 대한 내용은 가르치면 안된다”고 한 기존 입장도 고수했다. 앞서 교육부는 성교육 표준안을 발표하며 기존 교육안의 성소수자 내용을 삭제하라고도 지시했다. 이에 대해 교육부 관계자는 “성소수자 관련 내용은 찬반 대립이 첨예하고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이슈이기 때문에 성교육 시간에 가르치기엔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동성애 등 다양한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에 대한 내용은 이미 기존 교과서에서도 인권적 측면에서 다루는 내용인 데다, 성과 직접 관련된 주제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지난해부터 학생들과 성인지적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서한솔 교사는 “말로는 글로벌 인재가 되도록 가르치라면서 성소수자를 배제하는 건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편견을 가진 채 자란 학생이 나중에 동성애자가 최고경영자로 있는 애플 같은 세계적 기업에서 일할 수 있겠나. 인권 감수성의 부족은 학생들에게도 손해”라고 강조했다.
정민석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대표는 “성소수자 학생들은 청소년기의 주된 생활공간인 학교에서 자기 존재 자체를 드러내지 못하고 억압된 상황”이라며 “학생들에게 성교육 시간은 나와 다른 존재와 공존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여가부와 교육부 엇갈린 인식…수정 난항 예상
지난달 정현백 신임 여성가족부 장관은 취임 첫 기자간담회에서 현행 성교육 표준안의 개선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교육부와 함께 공동 개정작업을 시작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바 있다. 두 부처는 이달 초 실무자 회의를 열고 향후 이해 관계자들을 포함한 협의체를 구성해 구체적으로 성교육 표준안의 문제점과 개선 여부 등을 논의하기로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교육부는 표준안 수정이 불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교육부 관계자는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성교육 표준안은 이미 여러 차례 검증을 거쳤고, 교육자료 역시 비판을 받을 때마다 수정했기 때문에 우리로선 추가 수정 필요성이 낮다고 본다. 다만 여가부에서 먼저 제안했으니 검토를 해보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수정안에 크게 나아진 게 없다는 교육 현장의 지적에 대해서는 “성교육 자료는 하나의 참고자료일 뿐이니 시·도 교육청이나 각급 학교에서 자유롭게 실정에 맞춰 고쳐 사용해도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교육자료의 기본이 되는 성교육 표준안은 교육 현장에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가이드라인’으로 작용한다. 실제 교육부는 지난해 700여명의 성교육 담당 교사들이 신청한 성소수자 인권 관련 연수를 성교육 표준안에 어긋난다며 중단시키기도 했다. 사실상 교육부가 수억원을 들여 만든 성교육 표준안이 현장에선 수업에 적용하기 어려운 퇴행적 수준인 데다, 오히려 교사가 자유롭게 수업하는 걸 제약하는 용도로만 쓰이고 있는 셈이다.
이신애 교사는 양성평등과 인권 감수성을 강조한 성교육이 공교육의 체계 안에서 빨리 시작될수록 좋다고 강조한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사회화 과정을 통해 학생들이 기존의 고정관념과 관습에 익숙해지기 때문에 새로운 사고의 틀을 제시하는 게 어렵다는 것이다. “독립운동가 중에 왜 여성은 찾아보기 힘든지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는데 나중에 학생들이 와서 ‘왜 유관순은 누나라고 하는데 김구는 선생님이라고 하느냐’고 묻더라고요. 제가 예민하면 학생들은 저보다 두 배쯤 예민해져요. 저보다 더 낮은 곳에서 세상을 봐서 그런가 봐요. 그렇게 열린 시각을 만들어주는 성교육을 할 수 있도록 교육당국이 도와줬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