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안 피해도 학생·20대 집중…계층 간 ‘안전 격차’ 불가피
“영국산 유기농 생리대 ○○○ 추천해요.”
깨끗한나라의 릴리안 제품으로 불거진 생리대 파문 속에 온라인에선 ‘해외 생리대’ 직접구매(직구) 바람이 불고 있다. 특히 화학물질 안전성 기준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 유럽의 생리대가 인기다. 경기 일산에 사는 한모씨(35)는 식품의약품안전처의 대응이 수시로 바뀌는 것을 보면서 결국 ‘해외 직구’를 결심했다. 그는 “처음에는 세계에서 생리대의 VOC(휘발성유기화합물)를 검사하는 나라는 없다며 그동안 해온 품질검사를 그대로 한 번 더 하겠다고 하더니, 논란이 계속되니까 이번에는 릴리안에서 문제가 된 VOC만 얘기하는 걸 보고 믿음을 완전히 잃었다”고 했다.
한씨 같은 요즘 소비자들에게 생리대 해외 직구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미 여러 가전제품을 해외 직구로 사본 경험이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믿을 수 있는 해외 생리대’에 대한 정보가 돌아다닌다. 국내 제품보다 돈이 더 많이 든다고 하지만, 어차피 국산도 ‘오가닉 코튼(유기농 순면)’을 내세운 생리대 값은 만만치 않다.
SNS에서는 “한국에서 가임기 여성으로 사는 서러움” “한국 것만 아니면 된다”는 글들이 올라온다. 정부가 생활과 밀접한 물건의 안전성에 대해 적극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사이에, 시민들은 안전을 돈으로 사야 하는 형편에 놓였다. 해외제품에 대한 정보를 잘 찾아낼 수 있고 온라인 쇼핑에 시간과 돈을 쏟을 수 있는 여성들은 ‘좀 더 안전한’ 생리대를 찾아나선다. 하지만 저소득층 여성들에게 해외 직구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사치다. 고급이 아닌 일반 생리대조차도 값이 너무 비싸 쓰지 못하는 소녀들의 고통이 사회문제가 됐던 것이 지난해 일이었다. ‘릴리안 공포’도 주로 주머니가 가벼운 계층에 쏠려 있다. 여성환경연대가 릴리안 제품 건강피해 사례를 접수한 결과를 보면 20대가 44.1%, 30대가 36.8%였다.
젊은층이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제보했다는 사실도 고려해야겠지만 이 제품의 구매자 중에 젊은층이 많은 탓도 있다. 지난 26일 찾은 서울의 한 대형마트 생리대 코너 판매원은 “릴리안은 처음 나올 때부터 1+1 같은 할인행사를 많이 했고, 다른 제품들보다 많게는 5000원가량 싸기 때문에 학생들이나 20대 여성들이 많이 사갔다”고 말했다. 생리대 안전문제에서도 ‘계급 격차’가 나타나는 것이다. 릴리안 제품은 저소득층 생리대 지원에 활용되기도 했다. 좋은 의도로 지원한 것이라 해도, ‘돈 없어 생리대조차 못하는 아이들에게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은 물건이 전달된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나올 수밖에 없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화학물질 안전망’을 만들지 않는 한 경제적 형편이나 문화자본에 의한 계층 간 안전의 격차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몸 안에 삽입하는 반영구적 생리용품인 ‘생리컵’ 수입을 허용할지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을 때에도 이런 차이가 드러났다.
여성환경연대의 고금숙 팀장은 “정부가 일회용 생리대의 건강 역학조사를 하고 엄격한 안전기준을 만들어 유통시키지 않는 한 ‘안전한 생리대를 쓸 권리’는 경제력에 좌우되고 말 것”이라고 우려했다. 고 팀장은 “저소득층을 위한 생리대 지원사업 같은 것은 당연히 계속해야 하지만, 화학물질로부터 안전할 권리를 계층에 상관없이 모든 시민이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