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후대 국가를 위해서라면…당대의 ‘적’도 사이 좋은 형제로 기억된다

염제·황제와 단군·기자

‘염제(炎帝)’와 ‘황제(皇帝)’는 중국인들이 중화민족의 조상으로 여기는 고대 신화 속의 인물들이다. 중국은 2007년 허난성 정저우 인근에 높이 106m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인물조각상 ‘염제’와 ‘황제’를 조성했다.

‘염제(炎帝)’와 ‘황제(皇帝)’는 중국인들이 중화민족의 조상으로 여기는 고대 신화 속의 인물들이다. 중국은 2007년 허난성 정저우 인근에 높이 106m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인물조각상 ‘염제’와 ‘황제’를 조성했다.

비가 내리던 지난 8월 하순, <만들어진 민족주의-황제신화>의 저자 김선자 교수와 중국 허난성 정저우(鄭州)를 거쳐 신정시(新鄭市)를 찾았다. 2007년 완공된 염제(炎帝)와 황제(黃帝)의 거대한 조형물을 찾아온 길이다. 106m나 되는 거대한 한 쌍의 두상(頭像)이 황하의 중하류를 가름하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래쪽 염황 광장에는 중국 역사를 수놓은 인물들이 줄지어 조성돼 있고, 멀리 염황을 우러러보는 자리에는 천단(天壇)의 제단 형상을 본뜬 듯 천원지방형으로 만들어진 제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인물상의 크기가 멀리 있는 관람자들조차 압도한다.

인물상이 자리한 산 아래쪽에 세워진 염황이제소상간개(炎皇二帝塑像簡介)에는 한글로 이렇게 적혀 있다. ‘염황이제의 조각상은 중화민족의 불요불굴하고 근노 용감하며 진취적으로 개척해 나가는 민족정신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맞춤법도 틀리고 각자(刻字)도 대충 해놓은 번역투의 문장을 보면서 왜 중국어·영어 밑에 굳이 한글 설명서를 붙여 놓았을까, 의문이 들었다. 한글의 영향력이 그만큼 커서? 아니,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복잡한 질문이 머리 안을 맴돌았다. 둘은 왜 저기 있는가?

‘염제’와 ‘황제’ 조형물에 대한 설명 가운데 왼쪽 아래는 한글 설명문이다.

‘염제’와 ‘황제’ 조형물에 대한 설명 가운데 왼쪽 아래는 한글 설명문이다.

사실 염제와 황제는 적이었다. 중국 고대 역사서 <국어(國語)>에는 둘을 형제라고 했고, <신어(新語)>에는 아비가 다른 형제라고 했지만 그것은 후대의 분식일 뿐이다. <사기(史記)>의 ‘오제본기(五帝本紀)’는 황제로부터 시작된다. 황제는 태어날 때부터 신령했고 자라서는 정이 많고 총명했다는 것. 다음에 바로 염제 신농씨의 세력이 약해지자 제후들이 서로 싸워 백성들이 고초를 겪는 상황이 제시된다. 영웅의 출현을 고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황제는 이런 대망에 부응해 제후들을 정벌하고 판천의 들에서 세 번을 싸워 염제 신농씨를 제압한다. 다시 치우가 난을 일으키자 저 유명한 탁록의 들에서 사로잡아 죽인다. 이 승리를 바탕으로 황제는 제후들의 추대를 받아 천자가 된다. 그리고 동서남북 천하를 순행하고 관직을 설치하며 제사제도를 도입한다. 백성을 덕으로 다스리고, 금수와 초목마저도 순화시킨다. 사마천의 필설에 의해 황제는 전형적인 건국 영웅이 되고 염제는 제물이 된다.

그렇다면 황제보다 먼저 있었던 염제는 어떤 존재였을까? 황제에 비해 관련 기록이 상대적으로 적지만 <백호통(白虎通)>에 따르면 ‘염제는 태양’이고, <역사(繹史)>에 의하면 ‘염제 신농씨는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지닌 모습이다. <주서(周書)>에는 신농 시절에 하늘에서 오곡이 비처럼 내려 신농이 밭을 갈고 씨를 뿌렸으며 각종 농기구와 질그릇을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술이기(述異記)>에 따르면 신농에게는 신농원(神農原)이라는 약초산이 있었고, <회남자(淮南子)>는 신농은 온갖 풀맛을 보다가 하루에 일흔 번이나 중독됐다고 전한다. 이런 전승들은 염제가 농업과 관련된 신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태양, 소, 오곡, 농기구 등이 모두 농사와 관련돼 있지 않은가! 동시에 염제는 제 몸을 실험실로 삼아 의약·의술을 선물한 신이기도 하다. 그래서 신화학자들은 염제를 신석기 농경문화와 연관 지어 해석하기도 한다. 어쨌든 중국 신화에서 염제는 문화와 문명을 인민들에게 선사한 주인공이다.

이런 염제는 사마천이 기획한 황제 중심의 새로운 스토리텔링에 따라 주변화된다. 염제에 대한 국가 단위의 제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중심은 어디까지나 화하족(華夏族·한족의 딴 이름)의 기원으로 자리매김된 황제였다. 염제는 황제의 주변부에서 중화의 기원이 아니라 문명의 표상으로 존재했을 따름이다.

그 결과 문화와 문명의 기원인 염제와 국가의 시조인 황제라는 이원적 프레임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원적으로 존재하던 염황 프레임은 근대의 민족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하나로 통합된다. 양계초는 이렇게 노래한다.

‘혁혁한 우리 조상의 이름은 헌원(軒轅), 곤륜산에서 내려와

북으로 흉노 남으로 묘만(苗蠻)을 쫓아내려 말을 치달렸지.

이족(異族)을 쓸어내고 주권을 확정하여 자손들에게 물려주었으니

아, 우리 자손들이여 잊지 말자 잊지 말자 조상의 영광을.

푸근한 우리 조상의 이름은 헌원, 세계 문명의 선구자.

문자와 음양오행, 역수(曆數)를 가르치고 의약도 전해 주셨지.

과학사상도 근원을 찾노라면 문명은 우리가 가장 앞섰느니

아, 우리 자손들이여 전하고 전하자 조상의 영광을.

‘황제사수(黃帝四首)’의 첫째, 둘째 수다. 첫 수는 황제 헌원의 본래 형상, 건국 시조의 모습을 노래한다. 그런데 둘째 수가 노래하고 있는 역할들은 본래 염제에게 부여됐던 것들이다. 그런데 염제는 사라지고 염제의 역할마저 황제한테로 넘어간 형국이다. 중국 근대 지식인들에게 이족의 상징인 염제 신농씨는 민족의 순수를 해치는 존재로 인식된다. 그 결과 염제의 위상은 격하된다. 적어도 덩샤오핑(鄧小平)이 1980년대 후반 염제를 언급한 뒤, 1990년대 이래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 이어진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과 같은 일련의 국가적 프로젝트가 개시되기 전까지는.

염제-황제와 유사한 짝을 우리한테서 찾자면 단군-기자 짝이 아닐까? 조선 정조 3년(1779) 2월15일, 경기도의 유생 안발 등이 상소를 올린다. 기자묘(箕子廟)를 문묘(文廟) 옆에 따로 세우고 공자와 똑같이 높여 제사를 지내게 해달라는 상소였다. 그러나 정조는 허락하지 않는다. 그 후에도 기자의 묘우(廟宇)를 중건해 달라, 묘우의 품계를 역대 왕과 동급으로 올려 달라 등의 상소가 올라왔지만 정조는 부정적 반응을 보인다. 왜 유생들은 기자에 집착했고, 정조는 그것을 무시했을까?

한반도의 역사에서 기자의 위상을 보여주는 첫 문장은 <삼국사기>에 보인다. ‘현도와 낙랑은 본래 조선의 땅으로 기자가 봉함을 받은 곳이다. 기자가 그 백성을 가르치기를 예의와 전잠(田蠶)과 직작(織作)으로 하고 8조의 금(禁)을 베풀었다. 이로써 그 백성이 서로 훔치지 않고 문을 닫지 않고 부인은 정신하여 음란하지 않고 음식은 변두(변豆·제사 때 쓰는 그릇)로써 하니 이는 인현(仁賢)의 교화였다.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三方)과 다르니 고로 공자가 중국에 도가 행하여지지 않음을 슬퍼하여 바다에 배를 띄워 여기 동방에 거하려고 한 것은 까닭이 있는 것이다.’ ‘고구려본기’ 보장왕조에 붙인 김부식의 논찬이다. 김부식을 필두로 한 고려와 조선의 유자들에게 기자는 예의와 누에치기·베짜기를 가르치고, 법률제도를 설립한 성인이다. 말하자면 기자는 염제에 필적하는 문화와 문명의 기원이다.

그렇다면 단군은 어떤 존재였을까? 이승휴가 <제왕운기>에서 ‘밭 갈고 우물 파는 예의의 나라/ 중화인들이 소중화라 불렀네./ 누가 처음 개국의 풍운을 열었던가?/ 석제의 손자 이름은 단군’이라고 노래했듯이 개국시조이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는 환웅에 대해서는 지상에 내려와 신시를 열고 제반 인간사를 주관한 사실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지만 단군에 대해서는 나라를 세운 사실만 언급한다. 뒤이어 ‘주나라 무왕이 즉위한 기묘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되었다’라고 했다. 기자가 문명을 전해준 존재라면 단군은 나라를 세운 존재인 것이다.

단군과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을 모시고 있는 북한 평양의 숭령전(崇靈殿). 고려시대에는 성제사(聖帝祠), 조선시대 초중기에는 단군묘(檀君廟)로 불렸으나 정조 5년(1729)에 숭령전으로 바뀌었다.

단군과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을 모시고 있는 북한 평양의 숭령전(崇靈殿). 고려시대에는 성제사(聖帝祠), 조선시대 초중기에는 단군묘(檀君廟)로 불렸으나 정조 5년(1729)에 숭령전으로 바뀌었다.

황제-염제와 비슷한 이원성이 단군-기자의 관계에도 구축돼 있었다. 그래서 유생들이 연이어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문명을 이 땅에 전한 소중화의 상징인 기자를 드높여야 한다고. 하지만 정조는 기자보다 단군에 더 관심이 많았다. ‘숭령전치제문(崇靈殿致祭文)’은 평양 단군사당에서 제사를 지낼 때 보낸 제문인데 이렇게 단군을 칭송하고 있다.

소중화에 비기고

예의의 나라라 일컬어졌으니

기자의 팔조법금만이 아니라

단군의 교화가 크게 미친 까닭이었네.

기자를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기자보다 단군의 교화를 정조는 강조한다. 정조의 단군에 대한 이런 평가는 홍만종의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1705)의 인식과 다르지 않다. 홍만종은 이 책에서 ‘단군은 우리 동방에 가장 먼저 나타난 성인으로 편발개수(編髮蓋首·머리카락을 땋아 상투를 틀어 올린 머리 모양)의 제도, 군신상하의 구분, 음식과 거처의 예절을 만들었다’고 했다. 예의와 제도는 기자가 아니라 단군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홍만종의 문장과 같은 표현을 승지 서형수는 정조 앞에서 사용한다. 그러면서 단군의 은택에 보답하기 위해서 존귀하게 받들어야 하는데 강동에 버려진 단군묘가 있으니 수리·관리해야 한다고 간언한다. 이에 정조는 관리자를 정하고 지방 수령이 직접 돌보라는 하교를 내린다(정조 10년). 단군에 대한 정조의 관심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다.

숭인전(崇仁殿)은 기자조선의 시조인 기자(箕子)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고려시대의 사당 건축물로 북한의 평양에 있다.

숭인전(崇仁殿)은 기자조선의 시조인 기자(箕子)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고려시대의 사당 건축물로 북한의 평양에 있다.

물론 정조가 단군을 강조한 것은 전략적 측면이 있다. 정조는 정통 존주론자(尊周論者)들의 입장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둠으로써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정조는 단군만이 아니라 역대 왕조의 개국자들에 대한 제사를 정비하고 제문을 짓는 등의 정치행위를 통해 ‘임금이자 스승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함으로써 스승의 길은 재야의 선비들에게 있다는 유생들의 입장을 견제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정조의 입장과 상관없이 우리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개국시조 단군-문명기원 기자’라는 유자 일반의 이원론 한쪽에 단군이 개국의 시조이자 문명의 창안자라는 일체론을 강조하는 흐름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일원론이 전면화되는 시기가 근대계몽기다. <조선역대사략>(1895)이나 현채의 <동국역사>(1899)와 같은 근대계몽기 역사교과서를 보면, ‘단군이 내려와 나라를 세웠고, 편발개수 등의 교화를 베풀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단군은 민족의 시조이자 문명의 시원이다. 기자의 상징성이 단군에 통합된 것이다. 나아가 김교헌의 <신단실기(神檀實記)>(1914)와 같은 대종교 문헌에 이르면 단군은 건국시조를 넘어 민족종교의 신이 된다.

중국의 국가적 과제는 이족의 통합이다. 신화상으로는 적대자였고, 역사적으로도 다른 상징적 의미를 지녔던 염제와 황제가 사이좋게 염황광장에 조성돼 있고, 중국의 각종 미디어들이 ‘염황의 후손’임을 강조하는 것도 통합의 일환이다.

신화는, 그리고 신화 해석은 이런 국가적 과업을 위해 종종 동원된다. 한반도의 국가적 화두는 대국 옆에서의 생존이고, 조화이다. 한반도의 국가들은 대국과의 조화를 위해 기자를 활용했고, 생존을 위해 단군을 높였다. 그리고 민족의식이 고양된 20세기에 와서는 기자를 버렸다. 염황의 거대한 소상을 갸우뚱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우리의 단군과 기자는 어디쯤 있는지 한번쯤 되새김질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런 물음을 던져보았다.

▶필자 조현설

한국 고전문학·구비문학을 전공했다. 서울대 교수(국문학)로 한국 신화를 포함한 동아시아 신화와 서사문학을 탐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동아시아 건국신화의 역사와 논리>(2004),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2006), <마고할미신화 연구>(2013) 등이, 논문으로 ‘해골, 삶과 죽음의 매개자’(2013), ‘천재지변, 그 정치적 욕망과 노모스’(201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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