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서울 회기동 경희대 노조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는 백영란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경지부 경희대 부분회장. 최미랑 기자.
거리에 나가서 싸우는 건 노조 활동을 하는 노동자들만의 몫인 줄을 알았다. 그만큼 외로웠다. 싸우고 또 싸워도 벽은 깨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계속 일어났고 목이 터져라 외쳐도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2016년 광장에서 촛불이 타오르기 전까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청소노동자인 백영란 공공운수노조 서울경기지부 경희대 부분회장(59)은 말했다. “촛불집회가 시작되면서 노조 뿐만 아니라 시민들, 가족 단위까지 많이 나왔잖아요. 아, 진짜 좀 뭔가 희망이 보인다, 대한민국에 이제 뭔가 희망이 보인다고 생각했어요.”
경희대 청소노동자들이 처음으로 조합을 만든 것은2011년이다. 백씨는 그해 처음 청소 일을 시작했다. 아내로, 엄마로, 자식으로서만 살다가 50대 초반에 처음 시작한 사회생활이었다. 80만원도 안 되는 월급과 용역회사 직원들의 일상적인 폭언은 그야말로 “이곳이 진짜 대한민국인지 의심이 들게 했다”고 한다. 백씨는 “노조 결성을 도운 경희대 학생들이 아니었다면 일을 그만두고 말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즈음부터 서울지역 각 대학 청소노동자들은 속속 뭉치기 시작했다. 백씨는 경희대 분회장을 맡아 타 대학 청소동자들을 도와 밤낮으로 연대활동을 벌였다. 7년간 가정은 거의 돌보지 못했고 남편과 불화도 생겼다. 가족들의 걱정은 커졌다. 텔레비전을 켜면 뉴스에서는 집회 현장에 일어난 폭력사태만 집중적으로 비추었다. 가족들은 백씨가 이런 집회에 나가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지난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하던 무렵, 경희대 청소노동자들은 학교와 밀고 당기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경희대는 2015년 10월부터 학교와 청소노조, 민간연구소인 희망제작소로 구성된 ‘사다리포럼’이 학내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경희모델’을 추진해 왔다. 학교법인 경희대에 자회사를 설립해 청소노동자를 직고용하는 방안이 나왔지만 학교는 세부안을 내놓지 않았다. 진척이 없는 채로 임금협상이 시작되는 2017년 1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이 시작되자 노조원들은 사업장의 투쟁조차 뒷전으로 놓고 촛불집회에 열정적으로 나갔다.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던 청소노동자들까지 나섰다. 조합원들에겐 “탄핵이 되면”이란 말이 일상이 됐다. “얼굴에 잡티가 많아서 좀 빼러 가야하는데”라고 누군가 말하면 “박근혜 탄핵 되면 가”라고 답했다. 누군가의 김치 걱정에도 조합원들은 “김장은 탄핵되면 해야지”라고 말하며 서로 웃었다.
“그 판단이 옳았다”고 백씨는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이 되고, 새 정권이 들어서니 수많은 문제들이 거짓말처럼 해결됐다. “죽어라 싸웠던 ‘성과연봉제’가 폐지됐고, 또 세월호에서 목숨을 잃은 기간제 교사들의 순직이 인정되는 것을 보면서 ‘안 되던 것들이 이렇게 순식간에 바뀌는구나’ 하고 희망을 봤어요. 그런 희망에 기대어 경희대 교섭도 최대한 합의를 이끌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난 7월 경희대는 자회사를 설립하고 청소노동자 전원을 채용해 정년은 70살까지 보장한다고 밝혔다. 자회사 케이에코텍과 노조는 8월부터 임금, 복지, 근로환경 등을 높고 교섭을 벌인 끝에 9월말께 협상이 타결됐다.
다른 대학 청소노동자들도 올해 하반기에 속속 임금협상을 타결했다. 공공운수노조 서경지부는 올 하반기 카이스트(시설직종 제외), 한예종, 동덕여대, 덕성여대, 이화여대, 연세대, 서강대, 광운대, 고려대, 한성대 등에서 대학 사업장 집단교섭을 통해 시급 830원 인상(미화직 기준7780원)에 합의했다. 시급 인상을 놓고 갈등을 겪던 홍익대도 마지막으로 9월에 시급을 830원 올리기로 했다.
물론 갈 길은 아직 멀다. 백씨는 “경희대의 경우 자회사를 설립한 것은 ‘큰 한 발’을 내딛은 것이지만 앞으로가 문제”라며 “모든 노동자들이 민주적으로 자회사 경영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촛불은 가정도 바꾸어 놓았다. 백씨는 지난 겨울의 어느 토요일, 처음으로 남편과 막내딸과 집회에 나갔던 날을 잊지 못한다. “굉장히 추운 날이었어요. 초를 두 개씩인가 썼는데 촛농이 다 떨어져서 끼고 간 장갑은 결국 버리고. 그런데 굉장히 즐거웠어요.” 도로부터 인도까지 꽉 메운 인파에 밀려 조합원들과는 흩어지고 셋이서 끝까지 집회 현장을 지켰다. “촛불집회가 아닌 다른 집회들도 경찰이 막지 않으면 굉장히 평화로웠잖아요. 저도 노조 활동을 해보기 전까진 몰랐죠. 촛불집회에 같이 나가 보니 가족들도 ‘시위가 이런 곳이구나’ 하는 것을 이해하게 됐죠. 탄핵 이후로 노조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도 바뀌는 걸 느껴요. 지금은 딸도 사위도 저를 보고 ‘멋지다, 대단하다’고 한답니다.”
지난 겨울, 온 국민이 다 같이 했던 고생을 새 정부는 앞으로도 배반하지 않아야 한다고 백씨는 힘주어 말했다. “고생한 성과를 지켜 내야죠. 이 정부가 앞 정권에서 잘못했던 것들은 다시 반복하지 않고 국민들에게 상처 안 줬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진짜 의미가 있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