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의 변화
4년 투쟁, 정권 바뀌며 폐쇄 결실
동지가 된 선생님·학부모·주민
마을 연대 넓히며 협동조합까지
성심여중·고 학부모, 교사, 주민들로 이뤄진 ‘용산화상경마도박장 추방 대책위원회’ 회원들이 25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동 용산화상경마장 옆 대책위 천막농성장에서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1년 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에 분노해 촛불을 들기 시작한 시민들 사이에는 서울 용산구에 있는 화상경마장 추방 투쟁을 벌이던 주민들도 있었다. 이들은 촛불집회에서 학교(성심여중·고)와 200m 남짓 거리에 있는 ‘도박장’의 부당함을 알렸다. 4년간 두드려도 꿈쩍 않던 장벽이 촛불집회와 새 정부 출범 이후 무너졌다. 화상경마장은 내년 1월 폐쇄된다.
용산 주민들과 성심여중·고 구성원들은 이런 승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 마을의 미래를 바꾸기 시작했다. ‘성심학교 사회적협동조합’을 결성키로 한 것이다. 조합은 교복이나 생활복을 물려주는 행사, 친환경 먹거리를 공급하는 시민단체와 함께 학생들에게 아침밥을 제공하는 사업 등을 구상하고 있다.
오는 30일 조합 창립총회에는 학생·교사·학부모 등 설립동의인 50명이 모인다. 조합원으로 가입하겠다는 주민 중 상당수는 용산화상경마장 옆 농성천막에서 투쟁을 함께해온 ‘동지’들이다. 설립동의인인 주민 이원영씨(47)는 “투쟁을 하면서 성심학교 선생님들, 학부모들하고 정이 쌓이다보니 조합에 참여하려는 주민들이 많이 있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한국마사회가 화상경마장을 이전키로 결정한 2013년 5월부터 반대투쟁을 해왔다. 하지만 주민들의 노력에도 결국 2015년 5월 화상경마장은 개장했다. 반대투쟁은 계속됐지만 해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지난해 10월29일 시작된 촛불집회에 주민들도 대책위 깃발을 내걸고 동참했다. 성심여중·고 학생들은 촛불집회에서 화상경마장 추방을 뜻하는 ‘노란 호루라기’ 깃발을 들었다. 지난해 11월12일 3차 촛불집회 때는 학생들이 무대에 올라 동문 선배인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어서 그 자리에서 내려오라”는 편지를 낭독하기도 했다.
촛불집회는 박 전 대통령 탄핵과 더불어 각종 ‘적폐’ 정책들도 바꾸어 놓았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8월 화상경마장 폐쇄를 결정했다. 주민들과 학생들이 싸워온 지 4년 만이다.
촛불집회 이후 용산의 마을공동체는 단단해졌다. 같이 촛불을 든 몇몇 주민들은 ‘용산 미군기지 온전히 되찾기 주민모임’ 활동도 했다. 주민들은 세월호 3주기인 지난 4월에는 마을 합창단을 조직해, 용산 지역 세월호 추모문화제에서 추모곡을 불렀다. 지난 8월에는 주민 모금으로 용산 이태원 초입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기리는 ‘평화의 소녀상’도 세웠다. 김율옥 성심여고 교장수녀는 “경마장 반대투쟁과 촛불집회를 거치면서 마을공동체의 연대가 넓어졌다. 힘든 시기를 지냈지만 저희가 받은 선물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두 자녀가 성심여중·고를 다니는 정현옥씨(48)는 “이전에는 ‘우리 아이들이 커서 살아가는 세상은 얼마나 절망스러울까’ 하고 걱정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스스로 주변을 바꿔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