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많은 노인은 정년퇴직 뒤에도 일한다. 올해 3분기 60세 이상 고령층 취업자 수는 432만2000명으로 사상 최대였다. 전체 취업자 중 고령층 비중은 2013년 1분기 11.8%에서 16.1%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15~29세 청년층 비중은 15.5%에서 15%로 낮아졌다.
급속한 고령화로 노인 인구는 늘어나는데 저출산으로 청년 인구가 감소한 탓이다. 빈약한 노인복지와 갈수록 줄어드는 청년 일자리도 이 같은 현상을 심화시킨다. 노인 일자리는 대부분 안정적이지 못하고 보수도 적어 질이 낮은 편이다. 통계청이 집계한 지난 5월 기준 65~79세 고령층 취업자의 취업분포를 보면, 이들 취업자 100명 중 37명은 단순노무, 27명은 농림어업에 종사한다. 관리자·전문가, 사무 종사자는 7명뿐이다.
최근 금융권에 노인 취업 열풍이 뜨겁다. 김용덕 전 금융감독위원장(67)이 손해보험협회장에 취임했다. 엊그제 차기 회장 선임절차에 들어간 은행연합회는 홍재형 전 부총리(79)가 유력한데, 김창록 전 산업은행 총재(68)와 신상훈 전 신한금융지주 사장(69) 등이 경합한다고 한다. 생명보험협회장 후보로는 양천식 전 수출입은행장(67)과 진영욱 전 정책금융공사 사장(66) 등이 거론된다.
이들 일자리는 절반 이상이 단순노무와 농림어업인 보통 노인 일자리와는 다르다. 정권이 바뀌지 않는 한 임기 3년을 꼬박 채울 수 있다. 연봉은 손보와 생보 협회장이 4억원, 은행연합회장은 8억원이다. 여기에는 성과급이 포함돼 있다는데, 비영리법인에서 어떻게 성과를 측정하는지 알 수 없다. 물론 퇴직금도 두둑하다. 민간 금융사가 모여 설립한 단체인 만큼 회장으로서 책임도 적다. 그래서 ‘꿀알바’로 불린다.
갑자기 전면에 등장한 올드보이들은 10년 전 현업에서 손을 뗐던 관료 출신이 대부분이다. 손보협회 관계자는 “민간 출신을 모시려면 대형 손보사에서 회장을 맡아야 하는데 여의치 않았다. 금융위원회에 ‘관료 출신도 괜찮냐’고 물었더니 ‘알아서 하라’는 승낙을 받았다”고 전했다. 그는 “새 정부와 코드를 맞춰야 하는데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일했던 사람을 쓸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10년 건너뛰어 전에 일했던 관료 출신을 물색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금융권 관계자들은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고 있다고 의심한다. 애덤 스미스가 얘기한 시장경제 자율작동 원리가 아니다. 이른바 ‘관치’가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일련의 사태를 보면 전혀 근거 없는 음모론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시작은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첫 금융권 인사였던 BNK금융지주 회장 인선이었다. BNK금융은 전 회장이 주가조작 혐의로 물러난 뒤 회장 공모자격을 처음 외부로 넓혔다. 외부 영입설이 나오자마자 김지완 전 하나금융지주 부회장(71)이 유력 후보로 떠올랐고 지난 9월 회장으로 선임됐다. 금융경험이 풍부하지만 오래전 현업에서 떠난 인물이었다. 김 회장은 부산상고 출신으로 2012년 대선 때 문재인 캠프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다. 한국거래소는 2차례 공모를 거쳐 유력 후보들을 물리치고 부산 출신 정지원 전 증권금융 사장(55)을 이사장으로 선임했다. 두 사람 모두 ‘낙하산’ 시비에 휘말렸다.
이광구 전 우리은행장은 채용비리 때문에 사임한다고 밝혔지만,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금융계 인사는 거의 없다. 실적도 좋고 지주전환을 앞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강대 출신 금융인 모임인 ‘서금회’ 출신이어서 정권에 미운털이 박혔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KB금융은 최근 경찰 압수수색을 당한 뒤 “다음은 우리 차례 아니냐”며 긴장하고 있다. 윤종규 회장이 연임하면서 내부 출신 은행장까지 선임한 데 대해 윗선에서 마뜩지 않게 여긴다는 것이다. 두 금융사는 과거 정권이 내려보내는 낙하산이 요직을 차지했던 곳이다.
최고경영자(CEO)에 대한 퇴진 압박과 정권 입맛에 맞는 코드 인사가 금융권 전체를 흔들고 있다. 한국 금융산업이 발전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수십년째 관치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관치의 핵심은 낙하산이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은 “관(官)은 치(治)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하지만 현실의 관은 ‘자기 밥그릇 챙기는 존재’일 뿐이다.
은행의 한 관계자는 최근 상황에 대해 “박근혜 정부에서도 없었던 일인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새 정부가 들어선 뒤 세상이 달라졌다는 말을 많이 한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염치없이 밥그릇을 들이미는 올드보이의 행태는 문재인 정부가 청산해야 할 적폐와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