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농단 1년 만에 법정에 국가정보원에서 특수활동비 40여억원을 받아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전달한 혐의로 최근 구속된 이재만(왼쪽 사진)·안봉근 전 청와대 비서관이 17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국회 국정농단 청문회 불출석 사건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정농단’ 사태가 폭발하기 시작하던 지난해 10월30일. 박근혜 전 대통령(65)은 대통령비서실 인사를 단행하면서 이른바 ‘문고리 3인방’으로 불려온 이재만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51), 안봉근 전 청와대 국정홍보비서관(51),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48) 등을 교체했다. 이들은 1998년 박 전 대통령이 정계에 입문했을 때부터 19년간 박 전 대통령을 근거리에서 보좌하며 운명을 같이해온 최측근들이다.
이후 정 전 비서관은 ‘비선 실세’ 최순실씨(61)에게 청와대 기밀문서 등을 유출한 혐의(공무상 비밀누설) 등으로 지난해 11월6일 구속됐다. 그러나 이 전 비서관과 안 전 비서관은 검찰 특별수사본부의 수사도,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수사도 피해갔다.
지난해 12월 국회 국정농단 청문회에 불출석한 혐의(국회증언감정법 위반)로 올 7월 불구속 기소됐을 뿐이다. 검찰은 17일 열린 결심공판에서 이들에게 각각 징역 1년을 구형했지만 이들이 이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두 사람은 박 전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심판을 받을 때 증인 출석도 하지 않았고, 박 전 대통령이 수감된 이후 면회도 하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국정농단 사태에 적지 않은 책임이 있다는 지적이 쏟아졌지만 이들은 사법처리를 용케 피해가는 듯했다.
그랬던 이·안 전 비서관은 현재 박 전 대통령과 같은 수형자 신세가 됐다. 지난달 31일 검찰은 박근혜 정부 청와대가 국가정보원으로부터 특수활동비를 상납받은 혐의(뇌물수수) 등으로 두 사람을 체포하고 서울 궁정동(이재만)과 삼성동(안봉근) 자택을 압수수색했다.
정장을 하고 검찰 관계자와 함께 서울중앙지검에 나타난 두 사람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들이 청와대를 떠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최순실씨가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한 후 체포된 지 정확히 1년 만이었다.
같은 날 검찰은 이들에게 특활비 40억여원을 상납한 혐의를 받는 박근혜 정부 국정원장인 남재준(73)·이병기(70)·이병호(77) 전 원장의 자택과 사무실도 압수수색했다. 이날 압수수색 대상에는 국정원에서 특활비를 별도로 받은 혐의가 있는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51) 자택도 포함됐다. ‘적폐청산’ 정국의 태풍의 눈으로 부상하고 있는 이른바 ‘국정원 특수활동비 게이트’의 막이 오른 순간이다.
▶청와대·정치인 상납 ‘연쇄 폭발’…파괴력·종착역 예측불허
검찰의 국정원 특활비 청와대 상납 수사의 단초는 특검의 ‘화이트리스트’ 수사였다. 특검은 지난 3월6일 “박근혜 정부 청와대가 2014~2016년 전국경제인연합회를 통해 보수단체에 68억원을 지원했다”고 밝히고 관련 기록과 증거를 검찰에 넘겼다.
특검에 파견돼 이 수사를 담당했던 양석조 대검 사이버수사과장(44)은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실시된 지난 8월 인사에서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특검에 함께 파견 나갔던 한동훈 대검 부패범죄특별수사단 2팀장(44)은 서울중앙지검 3차장으로 승진해 왔다.
이후 서울중앙지검 3차장 산하 특수3부는 특검의 화이트리스트 수사 자료를 바탕으로 박근혜 정부 시절 허현준 전 청와대 정무수석실 국민소통비서관실 행정관(49)을 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한발 더 나아가 박근혜 정부 국정원도 보수단체를 지원한 정황을 포착하고 수사를 확대했다. 국정원 요청에 삼성그룹은 15억원을, 현대자동차그룹은 26억원을 대한민국재향경우회 등에 지원한 사실이 확인됐다.
검찰은 국정원 화이트리스트 수사를 위해 박근혜 정권 4년 동안 국정원 예산을 총괄한 이헌수 전 국정원 기획조정실장(64) 자택을 지난달 11일 압수수색했다. 기조실장은 차관급으로 국정원장에 이어 ‘넘버2’로 불린다. 검찰은 10월24일부터 지금까지 이 전 실장을 수차례 불러 조사했고, 이 전 실장은 검찰이 확보한 단서와 증거를 보고 국정원의 청와대 상납 사실을 실토한 것으로 전해진다. 검찰 안팎에서는 국정원 핵심 관계자였던 이 전 실장이 지금까지 구속되지 않은 것은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검찰 관계자는 지난달 첫 압수수색 직후 “청와대 관계자들이 국정원으로부터 돈을 상납받은 혐의는 화이트리스트 수사 과정에서 단서를 포착해 자체적으로 착수했다”며 “외부에서 이첩받은 사건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 산하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가 자체 조사 후 검찰에 수사의뢰해 진행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 국정원’ 수사와는 성격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체포된 이재만·안봉근 전 비서관은 검찰 조사에서 “박 전 대통령 지시로 돈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정권 초기에는 이 전 비서관이, 이후에는 안 전 비서관이 각각 국정원에서 돈을 전달받아 박 전 대통령에게 건넸다고 한다. 남재준 전 국정원장 재임기간(2013년 3월~2014년 5월)에 월 5000만원이었다가 이병기 전 국정원장이 취임한 2014년 7월부터 월 1억원으로 증액됐다. 5만원권 현금이 담긴 007가방이 청와대 인근 북악스카이웨이 등 은밀한 곳에서 청와대 측에 전달됐다.
국정원의 청와대 상납은 최순실 의혹이 불거질 조짐을 보이던 2016년 7월 청와대 지시로 잠정 중단됐다. 그러다 청와대는 2개월 만에 “대통령이 돈이 필요하다”며 국정원에 다시 상납을 요구했다. 국정원은 2억원을 정호성 전 비서관에게 건넸고, 정 전 비서관도 검찰 조사에서 이를 인정했다.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를 빼돌려 청와대에 상납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이병호 전 국정원장이 17일 오전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이 기각된 후 경기 의왕에 있는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국정원이 청와대에 건넨 특활비는 ‘월별 상납’ 외에도 수억원이 넘는다. 청와대 정무수석실은 2016년 4월 20대 총선을 앞두고 연초부터 수십차례에 걸쳐 대구·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이른바 ‘진박(친박계 중에서도 핵심 인물)’ 감별과 지원을 위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여론조사 업체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청와대 정무수석실 행정관이었던 이모씨(48)가 대표로 있는 곳이다.
정무수석실은 여론조사 업체에 대금 지급을 차일피일 미루다 2016년 8월 국정원에 여론조사 비용을 요구했다. 국정원은 5억원을 청와대에 줬고, 이씨의 후임 행정관인 원모씨(36)는 청와대 연풍문 근처에서 이씨에게 5만원권 현금 5억원을 전달했다. 여론조사를 실시할 때 정무수석은 현기환 전 수석(58·별건 구속), 대금을 지급했을 때 정무수석은 김재원 자유한국당 의원(53)이다.
국정원은 조윤선 전 수석(재임기간 2014년 6월~2015년 5월)과 현기환 전 수석(2015년 7월~2016년 6월)에게도 매달 각각 500만원의 특활비를 상납했다. 이들에 대한 배달은 신동철 전 청와대 정무비서관(56·별건 구속)이 맡았고, 그도 매달 300만원을 챙겼다.
검찰은 박근혜 정부 국정원장 3명을 차례로 불러 조사하고 지난 14~15일 전원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박근혜 정부 첫 원장이었던 남재준 전 원장은 지난 16일 열린 영장실질심사에서 “국정원장 청문회 준비를 할 때 누군가가 청와대에 돈을 내야 한다고 했는데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 “나중에 청와대에서 우연히 만난 안 전 비서관이 귓속말로 다시 얘기해줬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세 번째 원장인 이병호 전 원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직접 지시해 돈을 건넸다”고 고백했다. 이 때문인지 17일 남 전 원장과 이병기 전 원장은 구속됐지만 이병호 전 원장은 구속영장이 기각됐다.
검찰은 구속영장이 기각된 이병호 전 원장을 19일 다시 불러 박 전 대통령이 구체적으로 어떤 지시를 했는지 조사할 계획이다. 이어 조·현 전 수석도 조사한 후 최종적으로 서울구치소에서 박 전 대통령을 직접 조사할 것으로 보인다. “1원도 받은 적이 없다”던 박 전 대통령은 또다시 뇌물수수 혐의로 추가 기소될 것으로 보인다. 박 전 대통령 수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그가 받은 국정원 ‘뇌물’을 어디에 썼는가다. 검찰은 일단 “박 전 대통령이 받은 돈을 사적으로 사용했다”고만 밝힌 상태다. 검찰은 박 전 대통령이 지난 3월 서울 내곡동에 자택을 매입할 때 이 돈을 썼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당시 거래에 관여했던 인물을 소환조사했다.
이번 사건의 또 다른 뇌관은 ‘친박계의 좌장’으로 박근혜 정부 최고 실세 중 한 명으로 불린 최경환 한국당 의원(62)이다. 검찰은 이병기 전 원장이 재임기간 중 당시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었던 최 의원에게 1억여원을 전달한 정황을 포착하고 수사 중이다. 최 의원은 의혹을 부인하면서 “돈을 받았다면 동대구역에서 할복하겠다”고 밝혔지만 이병기 전 원장은 “이헌수 전 기조실장 건의로 줬다”고 실토한 것으로 전해졌다.
옛 청와대 수석비서관과 대통령에 대한 조사는 수사 초기부터 어느 정도 예측된 부분이다. 그러나 최 의원에 대한 검찰 수사는 여파를 가늠하기 쉽지 않다. 국정원이 정부 부처 예산권이 있던 기재부 장관뿐 아니라 또 다른 친박계 국회의원이나 장관 등 구여권 정치인들에게도 특활비를 건넸을 수 있다. 이에 한국당은 검찰의 국정원 특활비 수사에 대해 “정치보복이다” “특활비 상납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도 관행이었다”며 반발하고 있는 상태다.
일각에서는 국정원을 담당하는 국회 정보위원회의 여야 의원들은 물론, 심지어 언론인들도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검찰이 도대체 어디까지 수사를 확대할 것인지에 대해 서초동 법조타운과 여의도 정가에서는 설왕설래가 한창이다.
이번 사건의 파장이 정치권 전체를 휩쓸 전방위 사정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커지면서 검찰이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는 말도 나온다. 국정원도 ‘특활비가 여야 의원들에게 전달된 근거 자료가 남아 있다’는 일부 언론보도에 대해 “사실무근”이라며 서둘러 해명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