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사는 사람, 한 가족임을 증명하는 혼인신고서와 가족관계증명서는 성별과 나이, 주민등록번호, 본관까지 적혀있다. 같이 살지 않는 이들이 ‘가족 구성원’으로 기입돼 있기도 하고, 사이가 좋지 않은 이들이 한 가족으로 묶여있기도 하다. 서로 의지하며 한집에 살아도 혈육이 아니거나 혼인 등 법적 관계를 맺지 못하면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디자이너 박철희씨(30)는 지난해 자신만의 ‘혼인신고서’를 디자인했다. 커다란 동그라미 사슬 안에 같이 사는 사람들의 지문이나 손자국, 입술 등을 찍어 한 가족임을 증명하도록 했다. 누군가는 이 사슬 안에 반려동물 발자국도 찍을 수 있고, 키우는 식물의 ‘잎맥’을 찍을 수도 있겠다. 박씨는 “가족의 정의를 현대사회가 다시 내려야 한다. 가족 구성원이 성별이 다른 남녀와 자녀로만 될 필요는 없다. 내 곁에 다양한 이들이 있지 않은가. 이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게 ‘가족’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디자인한 문서에 ‘이 서류는 사랑으로 연결된 위 생명들의 연합을 증명합니다’라는 문구를 넣었다. ‘생명연합증명서’라는 제목이 달렸다.
경제활동을 하는 남성과 집안일을 전담하는 여성, 차세대 경제활동인구인 자녀로 구성된 소위 ‘정상가족’은 근대화의 산물이다.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과정에서 개인의 노동력은 총동원됐고 가족은 구성원을 먹이고 키우고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국가는 이들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관리했다. 정상가족에는 세금 감면, 아파트 분양권 혜택, 대출 자격 완화 등 다양한 특혜가 부여됐다. 대기업에 다니는 남성 가장에 30평대 아파트에 거주하는 4인 가족 모델은 개발시대 산물이자 모든 이들의 꿈이 됐다.
하지만 더 이상 그렇게 살 수 없는 시대다. 이제 다른 형태의 가족들이 나타나고 있다. 경향신문이 신년을 맞아 다섯 가족을 만났다. 같이 살지만 각자 벌고 아이는 낳지 않으려는 비혼 동거 커플도 있고,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미혼모 가족도 있었다.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입양한 여성도 있었다. ‘4년차 부부’인 레즈비언-바이섹슈얼(양성애자) 커플도 만났다. 디자이너 박씨도 동성 연인과 함께 사는 게이다.
가족의 틀을 넓히는 건 불가피하다. 지난 10월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부부를 ‘생활동반자’로 인정해 법적으로 서로의 보호자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의 청원글이 올라왔다.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생활동반자법률안은 기독교계의 반대로 국회에서 발의조차 되지 못했다.
미혼모나 입양모, 그들의 자녀에 대한 편견도 여전하다. 경향신문이 만난 미혼모, 입양모들은 “자녀를 그렇게 키워서는 안된다” “아이에겐 아빠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산다고 했다. 자신의 삶을 인정하지 않는 혈연보다, 서로의 삶을 응원하는 이웃이 새로운 가족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누가 이들에게 당신들은 가족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