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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빼앗긴 그들의 4000일

3999일. 어떤 날을 거기까지 세어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최강 한파가 덮친 지난 금요일, 세종로공원 한편에 세워진 작은 텐트를 찾았다. 기타 생산업체인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농성장이다. 4000일, 예정된 특별한 행사는 없다고 했다. “해탈한 것 같아요. 4000일이라고 뭔가 요란스레 할 것도 없고.” 그리고는 언제부턴가 시작한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의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라고 했다.

[고병권의 묵묵]‘내일’을 빼앗긴 그들의 4000일

나오는 길에 책 한 권을 받았다.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 임재춘씨의 농성일기를 묶어 펴낸 것이다. 집에 돌아와 한쪽한쪽, 그러니까 이들의 하루하루를 읽어가며, 나는 억울했던 날, 희망찼던 날, 정의를 울부짖던 날을 보았다. 그러다 책 제목을 다시 보고 알았다. 3999일이라는 긴 시간에도 가질 수 없었던 날이 있었음을. 하루를 이어 붙여 4000일을 만들어도 이를 수 없는 날이 있었음을. 그건 바로 ‘내일’이다. 해고된 날 사장이 빼앗아간 ‘내일’ 말이다.

5년 전쯤 이들과 짧게 인사를 나눈 적이 있다. 우리 송년행사에 이들이 결성한 밴드 ‘콜밴’이 왔다. 그때 표정이 너무 밝았기에 나는 그 해에 대법원의 끔찍한 판결문이 나왔다는 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투쟁을 안 했다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겠어요? 악덕 사장 만난 덕에 이 나이에 밴드도 하고 연극도 해보고….” 정말 그런 것 같았다. 그렇게 즐겁게 투쟁한다면 힘든 싸움이지만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그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지난주 콜트콜텍의 농성이 4000일이 되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4000일이라는 긴 시간은 날을 늘리지 않기 위해 이들이 필사적으로 몸부림쳐온 시간이기 때문이다. 노래하는 가수, 연극하는 배우, 고추장 만드는 농사꾼, 책 쓰는 저자가 되었던 것은 이들이 노동자로 남기 위해 뭐라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5년 전쯤 내가 가수가 되고 배우가 된 노동자들에게 감탄하던 때, 이들은 그전 5년을 본사를 점거하고 철탑에 올라가고 분신을 하고 목까지 맸던 사람들이다. 악기박람회, 록페스티벌을 찾아다니며 해외 원정 투쟁도 벌였다. 그 후 다시 5년, 이들은 더 이상 잘 할 수도 없고 더 이상 잘 할 필요도 없는 묵묵한 해탈의 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무슨 복잡한 사정이 이들을 여기까지 오게 한 걸까. 큰 억울함은 복잡한 것에서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아주 단순하고 명백한 것에서 온다. 너무나 뻔한 불의를 인정하지 않고 더 나아가 그것을 정의로 포장할 때 우리의 밑바닥 정의감이 뒤집어지는 것이다.

콜트콜텍의 사정도 단순했다. 2006년 4월 콜텍에 노동조합이 설립되었다. “자꾸 창문을 쳐다보면 생산성이 떨어진다”며 창문 하나 만들지 않은 공장. 이런 공장이 어떻게 운영되었을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각종 유기용제와 분진이 가득한 작업장, 강제된 잔업, 성차별과 추행. 거기에 대규모 구조조정까지 시작되었다. 이때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수단이었다.

그런데 노동조합 설립 1년 후 노사협의회가 예정된 날 사장은 공장의 모든 출입문을 폐쇄하고 폐업절차에 들어갔다. 그리고 모회사인 콜트에서도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했다. 더 이상 주문량이 없다는 이유였다. 그것은 당연했다. 물량을 중국이나 인도네시아 공장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매년 순이익을 60억원 이상씩 내고 폐업 직전에도 주문량이 늘었다며 임금인상에 합의한 회사가 물량이 없다며 폐업신고를 한 것이다. 지방노동위와 중앙노동위는 콜텍의 직장폐쇄와 콜트의 정리해고가 부당하다는 판정을 내렸다.

법정싸움이 이어졌다. 당연한 것이 뒤집힐 수는 없었다. 그런데 2012년 대법원은 고등법원 판결을 교묘하게 비틀었다. 사실상 한 회사인 콜트와 콜텍을 분리하고, 콜트악기에 대해서는 부당해고를 인정했지만, 콜텍에 대해서는 “장래의 위기에 미리 대처하기 위한 인원감축도 정당”하다며 하급심 판결을 뒤집었다. 고등법원에서는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가 없다며 부당해고라고 했던 것을 대법원은 ‘긴박함’을 ‘장래에 있을 수도 있는 위기’로까지 확대했다.

모두가 ‘긴박함’이라는 말뜻에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사장은 콜트악기 공장까지 매각해서 그나마 대법원이 부당해고를 인정한 노동자들의 복귀도 막아버렸다.

이것을 인정할 것인가. 이 단순한 질문이 지난 4000일간 농성노동자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미래의 점을 치듯 서초동 대법관이 내린 판결에 내 양심의 법관이 펄쩍 뛰는데 달리 어쩌겠는가. 그래서 이들은 내일로 못 간 채 오늘을 붙들고 수천 일을 보내고 있다. “아이들에게 오늘을 물려줄 수는 없어요.” 너무나 뻔한 부당해고와 위장폐업, 너무나 어이없는 판결문을 쥐고 오늘 아플지언정 내일로 넘겨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2012년 이들은 <햄릿>을 무대에 올린 바 있다. 햄릿은 그의 사명이 ‘이음매가 어긋난 시간’을 바로잡는 데 있다고 했다. 시간이 어긋나니 과거는 어제가 아닌 오늘을 살고 미래는 내일이 없는 오늘에 붙는다. 이 불의의 시절이 4001, 4002로 숫자를 이어간다면, 그래서 우리가 오늘을 늘려 내일로 삼는다면, ‘내일’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지금, 시간을 바로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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