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날을 잊기 위해 노력했다 #서지현 검사 폭로글 #Metoo
‘드르르륵..’
전화기가 울린다.
벌써 5시다.
화들짝 놀라 읽던 책을 덮었다.
<82년생 김지영>
‘<72년생 박지현>이란 책이라도 써야 하나’
불현듯 아이를 낳았을 때 치솟던 분노가 스친다
‘왜 아무도 이런 끔찍한 고통을 알려주지 않은 것일까’
‘그래도 딸을 낳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야...
세상은 이렇게나 그대론걸’
머리가 아파온다.
그제서야 ‘방금 퇴원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처음 병가를 냈다.
‘개X끼...이게 다 그 새끼 때문이야’
욕이라곤 몰랐지만, 욕 없인 참아낼 수 없었다.
최근 그놈의 얼굴이 뉴스를 도배됐다.
다시 하얗게 밤을 지새웠다.
‘이게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것이구나’
어렵게 생긴 아이마저 유산됐다.
이렇게 가슴을 쥐어뜯다간
마지막 선택을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날’을 잊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만이 살아낼 수 있는 길이었다.
‘그날’, 장례식장에 가지 않았다면 달라졌을까?
남편과 콘서트에 가려 했다.
하지만 미혼인 여동기의 부친상이 못내 신경 쓰였다.
그렇게 장례식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조문만 하고 나오려는데
장관이 수행검사와 장례식장에 들어섰다.
“네가 장관님 옆에 앉아.”
쭈뼛거리며 둘러보니 나만 빼고 모두 남자다.
떠미는 대로 앉았다.
취한 ‘그놈’은 자꾸 여자 쪽으로 몸을 기댔다.
‘설마 장관이 옆에 있는데...’
무릎담요를 사이에 끼워봤지만 손길은 대담해졌다.
엉덩이를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그 스멀거림이 실제인지 환상인지 알 수 없었다.
환상이 아니었다.
‘얼른 집에 가야 아이를 보지..’
정신을 차리고 화장실에서 나왔더니
‘그놈’의 그림자가 앞을 막아섰다.
‘거봐, 모든 것은 현실이었다구...’
남편이 공감하며 화내주었다면 달라졌을까?
모든 것을 털어놓았을 때,
남편은 ‘감당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머리를 떨궜다.
수군거림의 대상이 되는건 언제나 여자다.
엄마, 아빠가 있었다면?
이 모든 건 아빠 때문이다.
이 땅에서 살아남으려면 ‘착하고 예쁜 딸’로 키워선 안됐다.
아니, 엄마 때문이다.
이 땅에서 살아남으려면 참고 또 참는 모습만 보여선 안됐다.
그 어떤 불합리도 참아내지 말라고,
여자라고 업신여기는 건 참아내선 안된다고,
욕하고 소리 지르고 네멋대로 살아도 된다고 가르쳤어야 했다고.
부질없이 탓해보지만, 결국
‘다 내 잘못이다’
누군가 ‘네 탓이 아니야’라고 알려주었다면
좀 더 쉽게 버텨낼 수 있었을까.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모두 네탓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검사 임관 초기를 떠올린다.
부장검사는 만난지 2시간도 안 돼 말했다.
“술 안 먹는 검사는 검사도 아니다. 이대생은 싫다. 여검사도 싫다.”
도대체 나는 뭘 그리도 잘못한 것일까.
그 만이 아니었다.
“여검사가 백명이 넘는다는데, 앞날이 큰일이다”
“여자는 남자의 50프로다. 인정받으려면 두배로 열심히 해”
“여자가 발목이 굵어서 어떡하냐”
“요즘 자꾸 네가 이뻐 보여 큰일이다”
“오늘은 집에 들어가기 싫다”
“그래도 그때그때 부당함을 넘기지 않고
또박또박 얘기해온 여성들이 있었다”
책에서 보았던 글귀가 문득 머리를 스친다.
‘딸을 낳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야...’
언제나처럼 아랫입술을 꾹 깨무는 그녀의 뱃속에선 또 다시 정체모를 검은 덩어리가 꿀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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