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년 가까이 타오르던 광화문의 촛불도 꺼지고 찬바람만 몰아치던 2009년 1월20일의 일이었다. 2007년부터 재개발 문제로 철거민들이 투쟁을 벌이고 있던 용산4구역. 남일당이라고 불리던 폐허 같은 건물 옥상에 철거민들이 임시로 지어놓은 위태로운 망루 하나가 있었다. 새벽부터 그 망루를 무너뜨리기 위해 물대포와 병력을 실은 컨테이너가 맹렬하게 공격을 퍼붓기를 한창, 갑자기 불길이 치솟았다.
여섯 명이 죽고,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구속되고,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갔다.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는, 새로운 다큐 <공동정범>을 통해 그날 그 망루 안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다.
영화는 망루의 생존자이자 공동정범으로서 중형을 선고받고 복역 후 출소한 다섯 명에게 남겨진 상흔을 드러내면서 시작한다. 이들은 지옥 같은 망루에서 살아남는 과정에서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를 추스를 새도 없이 구속되고 재판을 받았으며, 감옥을 나온 뒤에는 고립되었다. 그리고 영화는 이들의 현재에 동정을 보이는 대신 그날의 기억을 증언하라고 요청한다. 기억은 혼란스럽고, 과정은 고통스럽다. 피해자들 간에는 냉랭함과 갈등이 맴돈다. 영화는 봉합하는 대신에 모든 것을 드러내기로 했다. 용산을 ‘안다’고 생각했던 모든 이들에게, 그래서 너무 쉽게 고개를 돌렸던 이들에게 다시 그 참상의 의미를 묻는다. 당신은 용산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리고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가?
이들 모두는 각자의 깊고 날카로운 억울함을 지니고 있다. 인심의 가장 확실한 근원이 곳간이듯, 박탈된 자들의 세계는 더 비정한 법이다. 3~5년간 감옥생활을 했던 5명 중 ‘용산사람’은 한 명이었다. 나머지 네 명은 다른 곳에서 철거반대투쟁을 하다가 부랴부랴 연대를 하러 온 이들이다. 그런데 사법부는 모든 참상을 그날 그 시간 그 망루 4층에 고립되어 있다가 목숨을 걸고 탈출했던 다섯 명의 책임으로 돌렸다. 갈등의 사회적 원인도, 진압과정의 무리함도,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화재의 원인도 모두 고려되지 않았다. 잘잘못과 진실을 가리는 대신 손쉬운 통제를 위해 모두에게 벌을 주곤 하는 ‘연대책임’의 논리가 신성한 법의 이름으로 반복되며 다섯 명의 시민을 중죄인으로 만든 것이다. 이들은 다른 사회 불만세력에게 보여주기 위한 모종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리고 억울함은 타인에게, 또 자신에게 겨누는 칼이 되었다.
하지만 진정으로 이들을 짓누르는 것은 억울함보다도 더 거대한 죄책감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내가 인화성 물질을 뿌리지 않았다면, 먼저 대피하지 않았다면, 혹시라도 그 모두가 살 수 있지는 않았을까. 이들은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을 그러안고 “나 때문에 모두가 죽었을까?”라는 질문 앞에 선다. 그들이 저 질문의 무게에 휘청거리는 동안, 한국사회는 또 다른 참사와 또 다른 억울함과 또 다른 죄책감들을 질리지도 않고 만들어왔다.
용산참사는 그 이전에 존재해왔던 여타의 철거민투쟁과는 달랐다. 용산에서 싸웠던 이들의 상당수는 빈민이 아니라 그럭저럭 먹고살 만했던, 도시중산층 자영업자들이었다. 국가와 자본은 이제는 낡고 보기 싫어진 것들을 걷어내고, 매끈하고 번쩍거리는 것으로 바꾸겠다고 통보했다. 일전에 나는 “용산은 우리가 수십 년간 에둘러서 중산층이라고 부르며 동일시해왔던 무언가가 찢어지고 있음을 알리는 거대한 파열음”이라고 썼다. 용산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침묵과 외면이 혹시 무관심이 아니라 공포는 아닐까라고 물었다.
나의 의문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오늘도 침탈당하고 있는 수많은 삶의 터전과 그보다도 더 무수히 소리 없이 질식하고 있는 삶들이 있다. 그리고 한국사회는 여전히 이들의 고통을 개인의 몫으로 돌린다. 이제는 사람들도 익숙해졌다. 타인의 몰락을 보면 동정이나 연민을 갖기보단 앞장서서 조롱한다. 나는 이 악다구니에서 어떤 처절한 기도가 느껴진다. 제발 나만은 저렇게 되지 않게 해달라는. 그러나 느껴진다. 사라지지 않는 불안의 떨림과 무력감이.
‘우리 모두가 범인’이라는 식의 식상한 문장으로 이 글을 끝내고 싶지 않다. 다만 부디 이 철저하고 사려 깊은 기록을 더 많은 사람이 목격하길 바란다.
<최태섭 문화비평가 <잉여사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