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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조직사회와 개인

입력 2018.02.22 20:53

수정 2018.02.23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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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다시 조직사회와 개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심 재판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재판부가 내세운 주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피고인으로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승마지원 요구를 쉽사리 거절하거나 무시하기 어려웠다고 보이고, 이러한 요구에 따라 수동적으로 이 사건 범행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말해 최고 권력자의 겁박에 못 이겨 힘없는 개인이 수동적으로 뇌물을 바쳤다는 것이다.

언뜻 이러한 판결은 법원이 권력의 부당한 압박으로부터 나약한 개인을 보호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달리 보면 권력이 겁박을 가할 때 개인은 저항하지 말고 그냥 범법을 저지르라고 부추긴 셈이다. 설사 부정행위를 저지른다 해도 집행유예 정도의 가벼운 처벌만 받을 것이다. 자율적으로 행위할 생각 말고 권력의 겁박에 수동적으로 따르라.

이 판결을 통해 법원은 조직사회의 악한 습속을 또다시 인준해 주었다. 이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법원의 ‘행위자관’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재판부는 개인 행위의 자율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권력이 개인의 행위를 찍어낸다고 본다.

이재용이 누구인가? 세계적인 기업 삼성의 실질적인 총수로서 시장에서 자신의 이해관계를 극대화하기 위해 합리적으로 행위하는 기업가다. 그를 경제적 합리성으로 중무장한 거대한 삼성 조직이 떠받치고 있다. 그런 이재용이 겁박에 못 이겨 엄청난 재산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비합리적 행위를 했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삼성을 경영할 자격이 없다. 이와 달리 그가 기업가라면, 재판부는 그의 행위가 어떤 이익과 손실을 가져왔는지 꼼꼼히 따져보아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앞으로 비슷한 상황에 처한 다른 기업가들도 이재용처럼 해도 괜찮다고 강력한 시그널을 보낸 것이다.

한국 사회는 제왕적인 우두머리를 정점으로 해서 수직적으로 위계화된 하나의 거대한 조직사회다. 우리는 지난 촛불집회를 통해 자의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쫓아냈다. 하지만 우리 사회 모든 조직에는 여전히 수많은 ‘작은 박근혜’가 전권을 잡고 권력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있다. 그 밑에서 겁박에 눌린 ‘작은 최순실’이 수동적으로(?) 범법을 저지르고 있다. 관료제적 위계를 지닌 국가기관은 그렇다 치고 기업, 정치, 사법, 언론, 예술, 교육, 종교, 병원 모조리 그렇다.

힘없는 개인에 불과한 판사 정씨도 이런 조직사회에 굴복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합리적 추론이 가능하다. “판사로서는 삼성의 집행유예 요구를 쉽사리 거절하거나 무시하기 어려웠다고 보이고, 이러한 요구에 따라 수동적으로 이 사건 판결에 이르렀다.” 삼성은 아마도 법원 조직을 통해 판사 정씨를 겁박했을 것이고, 새파랗게 겁에 질린 판사 정씨가 비합리적 판결을 했으리라 추정된다. 여기서 우리는 나약한 말단 조직인 판사 정씨의 수동적인 판결에 연민을 품게 된다.

청와대 국민청원에 20만명 이상이 판사 정씨의 파면을 촉구했다. 국민이 내는 세금을 먹고사는 공무원이라서 당장 해임하고 싶은 마음 이해는 간다. 지나치다 아니다, 법적으로 가능하다 아니다 말이 많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서 또 다른 행위자관을 본다. 국민은 판사 정씨가 행위의 자율성이 전혀 없는 말단 조직인이 아니어야 한다고 믿는다. 민주주의의 최후 보루인 법원의 판사로 보고 싶다. 마땅히 자율적인 판단과 판결을 해야 하는, 자기 고유의 이름을 가진 판사 정형식.

법은 단순히 통치의 도구가 아니다. 보다 보편적인 연대를 실현시키는 시민사회의 제도다. 판사의 한 판결이 그 사회의 연대를 해칠 수도 있고, 증진시킬 수도 있다. 민주주의는 자율적인 행위자의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통해 운영된다. 법원은 이런 민주주의 행위자관을 가지고 판결을 내려야 한다. 이재용은 단순히 조직사회의 희생자인가, 아니면 우두머리의 전횡을 능동적으로 도와가며 잔뜩 이득을 챙긴 또 다른 최순실인가? 앞으로 조직사회가 겁박할 때마다 개인이 어떻게 행위할 것인지 참조할 수 있도록 명확히 판결을 해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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