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지엠 철수설이 나돌기 시작한 것은 2013년 말이었다. 미국 GM(제너럴모터스)은 유럽에서 쉐보레 브랜드를 철수한다고 밝혔다. 유럽 수출물량은 대부분 한국지엠에서 만들었다. 한국지엠은 일감이 30% 가까이 줄어들었다. GM은 세계 곳곳 사업장을 속속 폐쇄하고 있었다. 한국도 떠날 것처럼 보였다. 철수하냐는 질문에 그들은 줄곧 부인했다. 2018년, 철수가 코앞에 닥쳤다.
GM은 한국을 겁박하는 중이다. 실적악화와 자금난에 시달리는 한국지엠을 살리려면 조 단위 지원을 하라며 압박을 노골화한다. 이미 군산공장은 5월까지 폐쇄한다고 공언했고, 협력업체 노동자에게는 해고를 통보했다. 여의치 않으면 부평공장과 창원공장 문도 닫겠다고 한다.
한국 정부와 국회, 산업은행, 노동계를 두루 상대하는 GM은 노련한 전문가 집단이다. 유럽과 호주, 인도, 러시아 등과 철수 협상을 벌여 실전경험이 풍부하다. 최근 철수카드를 내민 것은 한국이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어 자신들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국지엠 철수설이 나온 지 수년째 한국은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 한국지엠 지분 17%를 보유한 2대주주 산업은행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지고 있다. 산은의 한 간부는 “한국지엠에 주주 감사와 회계자료 열람 등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윗선 때문에) 산은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걸 다들 알고 있지 않느냐”고 하소연했다. 책임을 회피하는 변명일 수도 있지만, 미국의 압력을 받은 정부와 정치권이 산은의 적극적인 개입을 막았다는 뜻으로 들린다.
정부가 먼 산만 보는 사이 GM은 한국지엠을 돈 빨아들이는 ‘빨대’로 활용했다. 고금리 대출은 기본이고, 해외사업장 폐쇄에 따른 비용을 전가했다는 의혹도 받는다. 2016년 한국지엠 매출액에서 연구개발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5%였다. 현대차의 2.3%보다 두 배 이상 높다. 한국지엠은 현대차보다 연구개발을 많이 했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동의할 사람은 거의 없다. 대우자동차를 인수한 2002년부터 2016년까지 한국지엠의 연구개발비는 7조원을 넘는다. 이 중 상당액이 GM 본사 등으로 빠져나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판매액 대비 제조원가 비중인 매출원가율도 의심스럽다. 현대차는 80% 초반이지만 한국지엠은 95% 안팎이다. GM 본사가 높은 가격에 원재료와 부품을 공급했거나, 낮은 가격에 완성차를 사간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사는 대목이다. 2014~2016년 한국지엠이 현대차와 같은 수준으로 원가율을 맞췄더라면 매출이익을 8조원 가까이 늘릴 수 있었다.
GM이 한국지엠 공장부지를 느닷없이 대출금 담보로 잡겠다는 것은 파산까지 염두에 둔 포석으로 보인다. 공장부지를 담보로 설정하면 한국지엠이 파산하더라도 GM은 담보 우선처분권을 갖는다. 최악 상황에서도 공장부지를 팔아 손해보지 않고 한국을 뜨겠다는 속셈이다.
넋놓고 있었던 정부와 산은은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해야 한다. 한국지엠에 대한 실사를 철저히 하는 게 중요하다. 회계처리가 적정했는지, 본사와의 거래는 공정했는지 꼼꼼히 들여다봐야 한다. 현장 사정을 잘 아는 노동조합의 도움을 받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 노조가 참여하는 공동실사는 현실적으로 어렵겠지만, 조언은 받을 수 있다.
뒤늦게 한국지엠에 대한 금융당국의 특별회계감리, 과세당국의 특별세무조사, 공정당국의 이전가격 조사 등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정부가 할 수 있었던 일을 그동안 하지 않고 있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국정조사를 해서라도 책임을 가려야 한다.
한국지엠 철수와 관련해 다양한 시나리오와 대책을 세워야 한다. 군산과 부평, 창원 공장을 모두 가동해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지 않도록 하는 게 최선이지만 플랜 B, C, D 등도 마련해야 한다. GM 생각대로 한국지엠을 흘러가게 둘 수는 없다. 경영상 배임과 같은 불법이 드러나면 강력히 대처해야 한다. 칼자루를 쥔 것이 GM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시켜줄 필요가 있다.
한국이 지난해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결정하자 중국 진출 한국기업은 심한 괴롭힘을 당했다. 중국 현지에서 한국 브랜드 자동차를 타는 것만으로도 위협을 받았다. 한국 기업이 개설한 대형마트 앞에서는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한국 기업은 “정부가 어떤 조치든 좀 해달라”고 사정했지만, 정부는 무력했다.
정부는 과거 해외 투기자본 론스타의 ‘먹튀’를 방관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한국 땅에서 벌어지는 GM의 겁박에 정부가 어떻게 대처하는지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