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나폴리에 있는 국립고고학박물관에는 ‘비밀의 방’으로 불리는 전시공간이 있다. 관람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1821년 만들어진 비밀의 방에는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매몰됐던 도시에서 발굴된 벽화와 조각, 그림 등이 소장돼 있다. 일반인에게는 오랜 기간 동안 비밀의 방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1960년대 말 일시적으로 개방했다가 2000년까지 폐쇄했다. 고대 로마인의 성(性) 문화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유물들이 대부분이어서 일반인에게 공개해서는 안된다는 여론에 따른 것이다. 그러다 2005년부터 완전 개방해 관람객들의 출입을 허용했다. 이른바 ‘19금(禁) 잠금해제’를 한 것이다.
하지만 한국 기업인들이 만든 비밀의 방은 철저하게 숨겨져 있다. 2015년 방산비리 혐의로 사정당국의 수사를 받던 이규태 일광공영 회장은 자신이 장로로 있던 교회 안에 ‘비밀의 방’을 만들었다. 5층짜리 교회 안에 마치 영화에나 나올 법한 밀실을 꾸며 놨던 것이다. 일반 신도들은 전혀 몰랐던 비밀의 방 안쪽은 책장으로 가로막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버튼을 누르면 책장이 회전하면서 또 다른 비밀의 방이 나타나는 구조였다. 비밀의 방에는 침대와 샤워실은 물론 교회 안팎 상황을 지켜볼 수 있는 폐쇄회로(CC)TV까지 설치돼 있었다. 이 회장이 교회 안에 별도의 공간을 만들었던 것은 감춰야 할 비밀이 많았기 때문이다.
관세청이 지난 2일 명품 밀반입 의혹을 받고 있는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의 서울 평창동 자택을 압수수색한 뒤 “외부인이 쉽게 발견할 수 없는 비밀공간 3곳을 찾았다”고 밝혔다. 비밀공간은 지하 1층의 창고와 지상 2층 드레스룸 안쪽 등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관세청은 “비밀공간 3곳 중 2곳은 책꽂이와 옷가지로 은폐돼 있었다”고 했다. 대한항공 측은 “평소 쓰지 않던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였다”고 해명했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관세청이 비밀공간으로 지목한 곳에선 조 회장 일가의 밀수·탈세 혐의와 관련된 물품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조 회장 일가가 비밀의 방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숨긴 정황이 드러나면서 세관당국의 수사에 탄력이 붙을 것으로 전망된다. 조 회장 일가의 비밀도 결국 ‘잠금해제’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