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는 가족기업이 많다. 창업한 지 200년이 넘는 가족기업만도 4000여개에 달한다. 독일은 1300여개의 가족기업이 국가 경제를 떠받치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위세가 대단하다. 가족기업의 연간 매출액은 2조유로에 육박해 스웨덴과 스페인의 국내총생산(GDP)을 합친 것보다 많다. 하지만 유럽의 가족기업에서 창업자 가문이 대를 이어 최고경영자 자리를 물려받는 사례는 많지 않다. “창업자는 기업을 설립하고, 2세는 물려받고, 3세는 망하게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대부분의 가족기업 2, 3세들은 경영일선에 직접 나서지 않는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 원칙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가족기업들도 경영권 세습을 금기시하고 있다. 창업자가 은퇴하면 전문경영인에게 기업 경영을 맡기는 게 일반적이다. 미국 가족기업 중 3세 승계에 성공한 곳은 10%에 불과하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서 ‘3세의 저주’라는 말이 회자되기도 했다.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런 버핏은 “가족기업의 경영권 세습은 2020년 올림픽 선수를 2000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자녀 중에서 나이 많은 순으로 선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유럽이나 미국의 가족기업과 달리 국내 재벌 기업들은 경영권 세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국내 10대 그룹 중 절반이 창업주 2세가 총수 자리를 지키고 있다. 3, 4세가 경영일선에 나선 곳도 절반이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20일 별세하면서 구광모 LG전자 상무가 4세 경영시대를 열게 됐다.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에 이어 두번째다. LG그룹은 “창업 이래 지켜왔던 ‘장자 승계’의 전통에 따라 구 상무가 경영권을 이어받게 됐다”고 했다.
하지만 경영능력이 검증되지 않는 구 상무를 매출액 160조원대의 그룹 총수 자리에 서둘러 앉히는 것이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정도(正道) 경영’을 표방하며 국내 재벌기업 중 처음으로 지주회사 체제를 도입한 LG그룹에게조차 세습경영은 끊을 수 없는 마약과도 같은 것인가. 세습경영의 틀을 깨지 못하고 있는 국내 재벌기업들은 미국의 사상가 토머스 페인의 말을 한번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세습이란 어리석고 부적절한 자들에게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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