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버닝>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창동의 두 전작은 모호하고 풍성했다. <밀양>(2007)에는 유괴살해 사건으로 아이를 잃은 어머니가 등장한다. 어머니는 용기를 내 감옥에 갇힌 가해자를 찾아가지만, 가해자는 담담한 표정으로 “이미 하나님에게 용서받았다”고 말한다. ‘용서의 주체는 신인가 인간인가’라는 질문이 전도연, 송강호라는 걸출한 배우들에 의해 정교하게 제시됐다. <시>(2010)는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는 할머니가 주인공이다. 할머니의 외손자는 같은 중학교에 다니는 여학생 성폭행 사건에 연루됐고, 피해 학생은 자살했다. 할머니는 외손자가 자신의 행동이 불러온 비극을 외면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죄인이 죄를 뉘우치지 않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탐구됐다.
지난주 끝난 제71회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해 찬사받은 이창동 감독의 여섯 번째 장편 <버닝>은 다르다. 앞선 작품들보다 감정적으로 격렬하고, 주제가 가시적이다. <밀양>과 <시>가 신학의 영역을 넘봤다면, <버닝>은 유물론의 영토를 거닌다.
애초 <버닝> 제작사는 여주인공 오디션을 진행하며 “한 여성을 사이에 둔 재벌 남성과 택배 기사의 엇갈린 삶을 그린 작품”이라고 영화를 소개했다. 이는 <버닝>을 가장 단순하게 요약한 문장이 될 것이다. 종수(유아인)는 배달을 갔다가 고향 파주의 이웃에 살던 해미(전종서)를 만난다. 해미는 종수에게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오는 동안 고양이를 돌봐달라고 부탁한다. 종수는 여행을 다녀온 해미를 공항에 마중 나가는데, 해미는 여행지에서 만난 벤(스티븐 연)과 함께 나타난다. 종수, 해미, 벤 사이엔 묘한 기류가 흐른다.
벤은 포르쉐를 타고, 서래마을의 커다란 빌라에 홀로 산다. 종수는 그런 벤을 ‘개츠비’ 같다고 생각한다. 개츠비란 ‘젊고 부유한데 무얼 하는지는 알 수 없는 사람’을 뜻한다. 종수는 “한국엔 개츠비가 너무 많다”고 말한다. 반면 종수는 가난하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 집을 나갔고, 아버지는 공무원을 폭행해 수감된 상태다. 종수에겐 아버지가 남긴 파주의 지저분한 집, 작은 암송아지, 낡은 트럭밖에 없다.

‘버닝’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종수의 파주 고향집 장면. 종수, 해미, 벤은 대마초를 나눠 핀다. 이후 벤은 종수에게 자신의 은밀한 취미를 고백한다.

영화 ‘버닝’의 한 장면. 종수(유아인, 왼쪽)는 가난한 택배 아르바이트생이다. 부유한 벤(스티븐 연)은 그를 향해 언제나 친절한 미소를 짓는다.
종수와 벤 사이엔 건널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계급의 강이 흐른다. 하지만 종수는 벤에게 적의를 드러내거나, 불평등한 사회에 분노하지 않는다. 벤은 친절하고 매너 있다. 항상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처음 만난 종수에게도 격의 없이 대한다. 심지어 자신의 은밀한 취미를 털어놓기도 한다. 벤의 부유한 친구들 역시 종수와 해미를 스스럼없이 대하지만, 그들의 태도 이면엔 무언가 기분 나쁜 요소가 있다. 그들의 미소는 사람이 아니라, 귀여운 반려견의 재롱을 향한 것 같다. 종수는 담담하게 혹은 무기력하게 벤의 친절을 받아들인다. 해미가 종수가 아니라 벤을 택할 때도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수긍한다. 종수는 “저에겐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요”라고 말한다. 이 수수께끼는 너무나 까다롭고 거대하고 오래된 듯해서 종수는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벤의 정체, 해미의 진실을 두고 종수는 혼란에 빠진다. 문예창작과를 나와 소설가를 꿈꾸는 종수가 무엇을 쓰고 싶은지조차 알지 못해 글을 쓰지 못하는 것도 이 혼란에 관계있는 듯 보인다. 세상이 던진 수수께끼를 나름대로 해석한 종수는 그제서야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글을 넘어선 파국적 행동에 나선다.
오멸 감독은 지난달 개봉한 영화 <눈꺼풀>에 세월호를 직접 언급하는 단서들을 몇 군데 넣었다. ‘세월호’란 단어가 없었으면 영화는 특정 사건에 대한 구속에서 풀려나, 조금 더 ‘예술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멸은 “목적이 정확하지 않은 예술은 허영”이라고 말했다. 이창동 역시 <버닝>에 종수와 벤의 계급 차이를 드러내는 장치들을 여럿 넣었다. 포르쉐와 트럭이 나란히 달리고, 고층 빌딩 헬스클럽에서 운동하던 벤의 시선과 버스 정류장에서 빵으로 허기를 달래던 종수의 시선이 교차한다. 벤을 추적하던 종수는 미술관에서 용산 참사를 연상케 하는 작품을 바라본다. 라디오에선 청년실업 문제를 알리는 소식이 전해진다.
영화 속의 세상이 수수께끼라도, 그것을 풀어내는 창작자의 태도는 명쾌하고 단호하다. 이창동은 모호한 세상을 해석하는 데 주저하거나 얼버무리는 대신, 끈질기게 원인을 탐구하고 결과를 예견한다. 전작 <시>가 2010년에 나왔으니, 그 끈질긴 작업에는 8년이 걸린 셈이다.
이창동이 청년을 본격적으로 등장시킨 것은 <버닝>이 처음이다. 이창동이 8년에 걸쳐 탐구한 청년 세대의 감정은 결국 분노와 좌절이었다. 종수는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아버지를 비난하지만, 결국 그 자신도 분노에 휩쓸린다. 그 강렬한 감정이 <버닝>을 뜨거운 영화로 만들었다. 지금 청년 세대는 천상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탐구하기보단, 지상에서 분노를 불태울 수밖에 없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