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여성 사상가 실비안 아가젠스키는 1998년에 펴낸 <성의 정치>에서 “국가가 주권자인 시민을 온전하게 대의하려면 의회나 내각 구성에서 ‘남녀동수 구성 원칙’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설픈 여성 배려나 급진적인 남녀 대결주의를 넘어 정치영역에서 남녀가 동등한 권리와 책임 의식을 갖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가젠스키가 주창한 ‘남녀동수 구성 원칙’은 프랑스 정부가 2000년 5월 모든 정당의 선거 입후보자 명단에 여성을 50% 이상 포함하도록 하는 법률을 제정하는 데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저스틴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2015년 11월 남녀동수 내각을 구성했다. 캐나다 역사상 처음있는 일이었다. 트뤼도 내각은 3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로 구성됐고, 원주민·시크교도·아프가니스탄 난민 출신 인사 등도 장관으로 기용됐다. 지난해 5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남녀 각각 11명으로 내각을 구성해 “파격적이고도 실험적인 인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마크롱 대통령은 펜싱 선수 출신 스포츠부 장관을 비롯해 국방·교육·노동부 장관에 여성을 임명했다.
지난 2일(현지시간) 취임한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가 17명의 각료 중 11명을 여성으로 기용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법무·경제·국방·교육·노동 등 주요 부처 장관에 여성을 발탁해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여성 우위 내각’을 구성한 것이다. 총리를 제외한 남성 각료는 외무·내무·문화·농수산·과학·개발장관 등 6명뿐이어서 ‘아마조네스 내각’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아마조네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여전사로만 이루어진 부족을 일컫는다.
산체스 총리는 6일 조각을 마무리지은 직후 성명을 내어 “남녀평등을 지지하고, 능력을 갖춘 인사로 내각을 구성했다”고 자평했다. 트뤼도 총리는 ‘남녀동수 내각’을 구성한 이유를 묻는 기자들에게 “지금은 2015년이기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답변했다. 산체스 총리도 “지금은 2018년이니 ‘여성 우위 내각’을 구성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긴 것은 아닐까. 20년 전 ‘남녀동수 구성 원칙’을 주창했던 아가젠스키도 놀랄 만한 일이다. 여성들의 ‘유리천장’이 느리기는 하지만 조금씩 깨져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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