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양승태 전 대법원장 컴퓨터가 ‘디가우징(물리적으로 파괴하는 방식)’된 경위에 대해 법원 내부에서도 의혹이 확산되고 있다. 대법원은 규정에 따른 조치였을 뿐이라고 해명하지만, 디가우징 경위가 명확치 않은 것은 물론이고 진상규명을 위해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컴퓨터를 보전 조치하라고 전국 법원의 판사들이 요구하고 있던 상황에서 컴퓨터를 없앤 게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5일 법조계에 따르면, 수도권의 한 지방법원에 근무하는 ㄱ판사는 최근 법원 내부통신망 코트넷에 ‘디가우징 관련 차장님의 안내말씀에 대해 의문이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ㄱ판사는 이 글에서 과연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의 컴퓨터 디가우징이 절차대로 이뤄진 것인지, 절차에 맞게 진행됐다고 하더라도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불거지는 상황에서 디가우징한 것은 정당했는지에 관해 문제제기를 했다.
양 전 대법원장과 박 전 처장 컴퓨터 디가우징이 논란이 되자 대법원은 지난 3일 대법관 컴퓨터에는 재판 합의내용 등 민감한 정보가 포함돼있어 퇴임할 때 필수적으로 컴퓨터를 폐기해야 한다고 해명했지만, ㄱ판사는 정면으로 반박했다. ㄱ판사는 “(대법원 논리대로라면) 판사가 사용하는 모든 개인용 컴퓨터도 마찬가지 아니냐”며 “하급심도 합의내용 등이 공개되면 안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지 않느냐”고 했다. ㄱ판사는 이어 “그럼 이제부터 판사들은 자기가 사용하던 컴퓨터를 가지고 인사이동을 하고 퇴직시에는 무조건 필수적으로 디가우징을 해야 하는 것이냐”고 덧붙였다.
양 전 대법원장과 박 전 처장 컴퓨터가 디가우징된 시점이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대한 추가조사 요구가 빗발치던 시기였다는 점에서도 의문이 나온다. ㄱ판사는 “의혹이 불거진 시기에 지침상 필수적인 절차인지 분명하지 않은 규정을 들어 두 대의 컴퓨터를 디가우징했다니 그 목적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ㄱ판사는 “의혹을 받고 있는 사람이 사용하던 증거물인데 절차에 따라 모두 폐기해달라고 하면, 그 절차에 따라 증거물로 의심되는 저장장치를 폐기해야 하느냐”며 “관련 절차와 규정을 따랐다고 하는 공지만으로는 의혹이 해소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의문의 목소리는 ㄱ판사 뿐만이 아니다. 오는 23일 열리는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도 이에 대해 논의할 가능성이 있다.
대법원 해명에 따르면, 양 전 대법원장 컴퓨터가 디가우징된 것은 양 전 대법원장이 퇴임한 지 한달 이상 흐른 뒤인 지난해 10월31일이다. 당초 지난해 9월22일 퇴임식 당일 전산직원들이 대법원장실로부터 디가우징 지시를 받았지만 전산직원들은 이날 디가우징을 하지 않았고, 10월31일에서야 다시 대법원장실 지시를 받은 뒤 폐기에 착수했다. 그러나 대법원장실의 누가 이같은 디가우징 지시를 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6월1일 경기도 성남시 자택 인근의 놀이터에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준헌 기자
양 전 대법원장 컴퓨터 내용물이 백업돼있는지 여부도 명확치 않다. 지난 3일 “데이터의 백업이 완료됐다는 통지를 대법원장실로부터 받았다”고 했던 대법원은 다음날인 4일에는 “실제로 백업을 했는지를 확인한 바는 없다”고 밝혔다. 한 법원 관계자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대한 대법원 자체 조사 대상에 양 전 대법원장 컴퓨터가 포함돼있지는 않았지만 핵심 인물인 임종헌 전 차장의 윗선인데 컴퓨터 내용물이 백업돼있는지 아닌지도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이 안 된다”고 말했다.
이레이징(기존 데이터 위에 다른 데이터를 덮어씌우는 방식)이었던 컴퓨터 폐기 방식은 2012년 9월 이후 디가우징으로 바뀌었다. 공교롭게도 디가우징 방식의 첫 적용대상은 양 전 대법원장이 취임 후 첫 법원행정처장으로 임명했던 차한성 전 대법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