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 남포시 용강군에 있는 고구려 벽화고분인 ‘옥도리 벽화무덤’에서는 처음으로 ‘王’(왕)자와‘大’(대) 자가 함께 확인되고, 갖가지 생활상과 말을 탄 무사들의 사냥장면, 춤추고 노래하는 남녀들을 그린 벽화도 발견됐다. 사진 속 두 인물 사이에 ‘왕’자가 먹으로 쓰여 있다. 정경일 옌벤대 교수·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고구려 고분벽화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한국사를 넘어 인류사적으로 그 가치와 의미를 인정받는 문화재다. 고구려는 물론 삼국시대의 역사와 생활문화상을 생생하게 담고 있는 ‘삼국시대의 타임캡슐’로 불릴 만하다.
하지만 북한, 중국에만 있다보니 한국 학계는 안타깝게도 발굴조사나 최신 연구성과의 공유, 접근성에서마저 제한을 받는다.
그런 점에서 지난 6일 국립문화재연구소·한성백제박물관이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연 ‘고구려 고분벽화, 남북의 소중한 세계문화유산’이란 주제의 국제학술심포지엄은 주목을 끌었다.
이날 학술대회에선 국내외 7명의 전문가가 최근 북한과 중국에서 진행된 고분벽화 발굴조사와 그 내용, 벽화의 보존문제, 벽화 모사도의 중요성과 갖가지 활용방안 등의 주제를 발표했다.
특히 북한에서는 기존에 확인되지 않은 명문이나 문양, 유물 등 새로운 연구자료들이 고구려 벽화고분에서 발굴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일부 고분벽화는 보존을 위해 설치한 유리막에 습기가 차는 등 보존문제가 여전히 심각한 것도 확인됐다. 이에 따라 남북 공동 발굴조사나 연구, 보존 활동 등 남북한의 더 적극적이고 활발한 교류 필요성이 강조됐다.

북한의 고구려 벽화고분인 ‘옥도리 벽화무덤’에 인물 행렬도 등이 그려져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가 지닌 귀중한 가치와 의미를 제대로 연구하고 그 성과를 축적하기 위해서는 역사학·고고학·미술사·종교학 등 각 분야 연구자들의 융합적·종합적·입체적인 연구가 절실하다는 주장도 거듭 나왔다.
북한 내 고분벽화 발굴조사에 여러 차례 참여하고 있는 중국의 정경일 교수(옌벤대)는 ‘북한소재 고구려 고분벽화 최신 발굴성과 및 관리 현황’이란 주제의 발표를 통해 “북한에서는 지난 해 평양시 보성리·장수원동 벽화무덤을 발굴조사하는 등 2000년들어 지금까지만 총 13기의 고구려 벽화무덤이 발굴돼 새로운 자료들이 많이 나왔다”고 밝혔다.
정 교수는 “벽화 내용이나 무덤 구조, 유물 등의 새로운 자료들은 고구려 벽화무덤을 둘러싼 기존의 학술적 문제들을 재검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 내 고구려 고분벽화 발굴조사에는 중국 옌벤대 등은 물론 일본의 학자들도 참여한 것으로 확인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와 한성백제박물관이 공동기획한 ‘고구려 고분벽화, 남북의 소중한 세계문화유산’이란 주제의 국제학술심포지엄에서 북한 내 고구려 고분벽화 발굴조사에 참여해온 정경일 중국 옌벤대 교수가 북한 내 고구려 고분벽화 조사성과 등을 발표하고 있다.
정 교수는 특히 2010년 발굴된 남포시 용강군의 ‘옥도리 벽화무덤’, 2015~16년 북한 사회과학원고고학연구소가 발굴한 황해북도 봉산군의 ‘천덕리 벽화무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옥도리 벽화무덤에서는 물결무늬 사이에 먹으로 쓴 ‘王’(왕)자와 ‘大’(대) 자가 처음으로 함께 확인됐고, 무덤 주인공의 갖가지 생활상, 사신도로 추정되는 동물그림, 말을 탄 무사들의 사냥장면, 춤추고 노래하는 남녀들을 그린 벽화도 나타났다. 정 교수는 “특히 ‘대’‘왕’자가 동반으로 나타나고, 4명의 남녀 주인공이 한 좌상에 함께 그려진 모습의 벽화 등은 벽화무덤 중 최초로 확인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밝혔다.
‘천덕리 벽화무덤’에서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독특한 새로운 기법의 장식무늬가 발견되고, 못 머리에 은판을 씌운 관못 등의 유물도 출토됐다. 정 교수는 “새로운 장식무늬가 무슨 무늬인지 확인할 수 없어 아직 발굴보고서가 작성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에서 발굴된 고구려 벽화고분 ‘호남리 18호 무덤’에 그려진 벽화의 일부.
지난 해 평양 중심부인 낙랑구역에서는 ‘보성리 벽화무덤’이 확인돼 조사 결과, 갑옷과 투구를 쓰고 긴 창을 든 무사들, 무덤 주인공의 수레 등이 그려진 여러 벽화와 더불어 금제 방울·은제 못 등 금은 장식품도 출토됐다. 인근의 ‘장수원동 벽화무덤’에서도 사신도 등이 확인됐다.
정 교수는 이밖에 관대 위에서 말 뼈만이 나와 말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신대동 8호 무덤), 벽화와 함께 3개체의 인골이 나와 3인 합장무덤으로 보이는 ‘동산동 벽화무덤’, 안악3호분처럼 무덤구조가 복잡한 것으로 드러난 ‘태성리 3호무덤’, 고리자루 칼이 희귀하게 나온 ‘대성동 34호 무덤’, 컴퍼스같은 기구를 이용해 원을 그린 흔적과 별자리 그림이 확인된 ‘호남리 18호 무덤’, ‘송죽리 벽화무덤’ 등을 소개했다.
정 교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4년 교시에서 민족문화유산과 관련해 남북간 학술교류를 포함한 대외협력을 강조했다”며 “앞으로 북한내 고구려 벽화무덤의 공동 발굴조사나 보존·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날 학술대회에서 고구려 고분벽화 권위자로 손꼽히는 전호태 울산대 교수는 ‘세계문화유산 고구려 고분벽화의 가치와 의미’라는 기조발표를 통해 “고분벽화는 문화사·예술사·종교사상사·사회사적으로 풍부한 가치와 의미를 모두 지닌 ‘역사기록’의 큰 덩어리”라며 “하지만 연구자의 부족 등 연구성과의 축적은 제한적”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전 교수는 “고구려 고분벽화는 지금까지 130여기 발견됐지만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라며 “다양한 분야 연구자들이 팀을 이룬 학제적·융합적 연구가 실현되고, 관련 정보의 데이터베이스센터 설립, 연구자 네트워크 결성 등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박아림 숙명여대 교수는 ‘고구려 고분벽화 모사도 가치의 재조명’을 통해, 박윤희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사는 ‘북한 고구려 고분벽화 모사도의 제작과 활용’이란 주제발표를 통해 고분벽화의 특성상 보존을 위한 모사도의 중요성, 나아가 다양한 활용방안을 제시해 주목받았다.
이와 관련, 일본 도쿄예술대 미야사코 마사아키 명예교수는 문화재 복제기술 특허까지 얻은 이른바 ‘클론 문화재’의 뛰어난 활용성을 소개했다. ‘클론 문화재’는 첨단 과학기술을 적용해 기존 복제품보다 업그레이드된 복제품으로, 원본 문화재와 소재·질감 등까지도 동일하다.

전호태 울산대 교수는 ‘세계문화유산 고구려 고분벽화의 가치와 의미’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다양한 분야 연구자들의 융합적이고 종합적인 연구의 필요성 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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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 이탈리아 보존전문가로 북한내 벽화고분 보존활동에 참여해온 로돌포 루잔 린스포드 유네스코 자문위원이 ‘북한 수산리 고분벽화 보존 지원과 성과’를 통해 북한 벽화고분의 보존을 위한 지원의 중요성, 보존 상황 등을 소개했다.
중국내 고구려 벽화고분 전문가인 왕즈강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부소장은 ‘중국 소재 고구려 고분벽화 발굴 현황과 연구 성과’란 주제의 발표를 통해 중국의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상황 등을 소개했다. 학술대회장에서 만난 문화재청 이경훈 정책국장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가치와 의미를 다시한번 되새기고, 모사도 활용 등 향후 문화재 보존과 관련한 다양한 정책의 모색이 이뤄진 귀중한 학술대회였다”고 밝혔다.

한성백제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북한의 고구려 벽화고분 ‘강서대묘’의 ‘백호’ 모사도. 강서대묘는 사신도로 유명한 고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