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운동의 역사는 일제 식민지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7년 5월 27일, 서울 종로 한복판에 위치한 기독교청년회관이 사람들로 붐볐다. 한복을 차려입은 여성들이 회관으로 하나 둘 들어갔다. 이날 참석자는 1000명이 넘는다. 조선 최초의 본격적인 여성운동 조직인 ‘근우회’가 이 자리에서 탄생했다. “조선에 있어서는 여성의 지위가 한층 저열하다. (중략) 우리의 앞길이 여하히 험악할지라도 우리는 일천만 자매의 힘으로 우리의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려 한다. 여성은 벌써 약자가 아니다. 여성은 스스로 해방하는 날 세계가 해방될 것이다. 조선 자매들아 단결하라!”(근우 선언문 중에서)
여성운동이 자리잡기 시작한 건 1980년대 초반이다. 여기에는 권위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당시 사회 분위기도 한몫 했다. 선구적인 여성운동 단체로 꼽히는 ‘한국 여성의 전화’도 이 시기(1983년)에 설립됐다. 여성의 전화는 성폭력, 가정폭력, 성매매 등 ‘반성폭력운동’을 수면 위로 끄집어 올렸다. 이는 당시 빠른 속도로 생겨나던 다른 여성단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다양한 여성단체의 등장은 1987년 ‘한국여성단체연합’(여연)으로 이어졌다. 단체들 간 의견을 조율하고 집단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전국 조직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반성폭력운동에 불이 지펴진 건 1991~1992년이다. 1991년 김부남은 9살 때 자신을 강간한 이웃집 아저씨 송백권을 살해했다. 친고죄와 공소시효 만료로 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음을 알게 된 다음이었다. 1992년에는 한 대학생이 남자친구와 함께 의붓아버지를 살해했다. 그는 13년 동안 의붓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1990년대 중후반에는 군가산점 폐지 운동이 시작됐다. 여성단체들은 군가산점제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사회 전체가 주목해야 할 평등권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후반까지의 이 같은 운동은 제도적인 성과를 이뤄냈다. 반성폭력운동의 결과로 1994년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됐고, 1998년 여성특별위원회가 설치됐다. 군가산점제는 1999년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이 내려졌다. 2000년대 초반에는 호주제 폐지 관련 성과를 이뤄냈다. 137개 여성·시민사회단체는 2000년 9월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연대’를 발족시키고 호주제 위헌소송을 준비했다. 2005년 호주제 폐지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민법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당시 여성주의 운동에 대한 비판도 있다. 여성문제에 관한 정책 집행이 양성 평등을 지향하기 시작했고 예산 편성에서도 여성을 고려하는 방향으로 발전했지만, 운동이 제도권 내로 들어가면서 여성운동이 탈급진화됐고 운동의 활력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국가 페미니즘(state feminism)’이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여성운동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초반이다. 1990년대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영페미니스트’(영페미)들이 등장한 것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인 ‘언니네트워크’, 스스로 여성임을 자각하고 여성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축제의 장을 만든 ‘월경페스티벌’, 운동권 내 성폭력 타파를 목표로 한 ‘100인 위원회’, 영상을 통한 여성 읽기를 시도한 ‘여성영상집단’ 등이 대표적이다. 영페미들의 운동은 과거 여성운동과 같은 형태를 취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기존 여성들이 이뤄냈던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과거 성과들 위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보다 폭넓고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2018년 현재, 영페미들과는 또 다른 ‘영영페미니스트’(영영페미)의 시대가 왔다. 2015년 ‘메갈리아’의 탄생으로 등장한 이들은 ‘넷페미’(온라인을 기반으로 성장한 페미니스트), ‘헬페미’(헬조선의 페미니스트)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들은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2017년 낙태죄 폐지 등의 이슈를 거치면서 온라인뿐 아니라 광장으로 나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