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만명을 삼킨 쓰나미 ‘기억과 망각’
“그때 죽은 아이 넷의 사진을 아직도 지갑에 넣고 다닙니다. 넷 다 시신조차 못 찾았어요. 다시 돌아올지 몰라 광고도 하고, TV에도 출연하고…. 아이들이 아직도 살아 있을 것만 같아요. 제가 계속 여기서 일을 한다면 언젠가 아이들이 저를 찾아올까요?”
2004년 12월26일 오전, 검은 파도가 인도네시아 반다아체를 덮쳤다. 마르주키 압둘라(61)는 이 파도에 어린 자녀 넷을 떠나보냈다. 여행차 타 지역에 있던 그가 황급히 반다아체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네 자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집과 병원 건물은 폐허가 된 후였다. 압둘라는 “모든 것을 잃었다”며 눈물을 내비쳤다.
그날 숩나 라니사 이차(23)는 아빠와 함께 바닷가에서 놀다 큰 지진을 느꼈다. 잠시 후 검은 물이 모래 틈새로 올라왔다. 이차는 “고개를 들어보니 바닷물이 점점 뒤로 빠지고 있었다. 그러다 파도가 산처럼 커졌다”고 회고했다. 이차는 아빠와 함께 산으로 대피해 파도를 피했지만, 바닷물이 빠지지 않아 며칠 동안이나 내려오지 못했다.
이 파도로 압둘라와 이차가 사는 반다아체와 그 주변 지역에서만 12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실종자는 헤아릴 수도 없다. 검은 파도를 피해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은 곧 유가족이 됐다.
파도를 직격으로 맞은 반다아체에서 가족과 친구를 잃지 않은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태국 등에 걸쳐 23만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인도양 쓰나미는 그만큼 강력했다.
지난 5월 찾은 인도네시아 반다아체는 그 자체로 거대한 ‘쓰나미 추모 기념관’이었다. 쓰나미가 두고 간 진흙더미와 폐허는 깨끗하게 사라졌지만 14년 전 이곳에 역대 최악의 자연재해가 발생했던 사실이 곳곳에서 기억되고 있었다.
■ 쓰나미 복구 위해 내전 그친 아체…잔해 보존해 기억의 장으로
같은 참사, 다른 대응 : 쓰나미 덮친 인도네시아와 스리랑카
반다아체에서는 잘 보존된 ‘쓰나미 잔해’를 어디서든 쉽게 찾을 수 있다. 중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집 위로 올라간 배’도 그중 하나다. 2004년 쓰나미 당시 해안가에 정박돼 있던 어선이 파도를 타고 내륙으로 약 3㎞ 떠밀려와 한 주택 위에 얹혔다. 세간이 다 쓸려나간 집은 뼈대만 남아 있지만, 배를 잘 받칠 수 있도록 지지대가 설치돼 있다. 집 내부로 들어가면 쓰나미가 오기 전후로 이곳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여주는 사진이 전시돼 있다. 데크를 따라 올라가면 배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배 바로 주변에 민가가 있어 그만큼 쓰나미가 일상 깊이 들어왔었다는 점이 실감된다. 이곳에서 쓰나미 관련 서적과 사진을 파는 닐라와띠는 “하루에 200~250명 정도가 찾는다”고 설명했다.
■ “쓰나미는 아체의 역사다”
14년 전 12만여명 숨진 인도네시아
뭍으로 올라온 배·떠내려온 사원…
아체 곳곳에 남겨진 재난의 흔적들
역사의 기록이자 일상의 추모공간
‘떠내려온 사원’ 역시 마찬가지다. 쓰나미는 수십t에 달하는 모스크의 상부를 2.5㎞ 떨어진 곳으로 옮겨놓았다. 상부를 제외한 기둥 등 나머지 부분은 사라졌고, 상단만이 떠내려와 진흙에 박혔다. 주변엔 쓰나미 직후의 참사 현장을 기록해둔 사진 및 보도 자료가 전시된 공간이 있다. 근처에 사는 스리아나(35)는 “이곳은 원래 논이었는데, 바닷물이 산골짜기 사이사이로 야자수 높이만큼 높게 들어왔다. 파도의 힘이 그만큼 셌다”고 말했다.
반다아체를 찾는 사람이면 꼭 가는 명소가 된 PLTD Apung1 발전선도 빼놓을 수 없다. 길이 63m, 무게 2600t짜리 이 발전선 역시 2~3㎞ 떨어진 해안가에서 현재의 자리로 떠내려왔다. 지난 5월 찾은 발전선은 무리 지어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주차장에도 큰 관광버스가 여러 대 있었다. 현재 선체 내부는 쓰나미 관련 영상 및 사진 자료 등을 보여주는 전시관으로 사용된다. 외부 손잡이 등에는 녹슨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갑판까지 올라갈 수도 있다. 원래 이 자리에 있던 집 등 건물의 일부 벽면도 주변에 남아 있다. 선체 주변에 데크를 설치해 한 발 떨어져 배를 둘러볼 수 있도록 조성돼 있다.
집 위로 올라간 배, 떠내려온 사원, 발전선은 전부 주변 풍경과 동떨어진 ‘폐허’를 만든다. 이 폐허까지 가는 길은 지극히 평범하다. 개·소가 차와 함께 걷는 도로를 따라 세간살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민가를 지나면 문득 쓰나미의 흔적이 모습을 드러낸다.
봉분도 없이 집단 매장한 공동묘지, 뼈대만 남은 폐병원을 둘러싼 담벼락 너머로는 동네 남자아이들이 공을 차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반다아체에서 폐허는 으스스하고 흉물스럽기보다는 일상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쓰나미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사람들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아체에서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트리샤니에(41)는 “이들은 이곳에서 쓰나미로 굉장히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를 알릴 수 있도록 계속해서 놔둬야 한다”고 말했다. 교사로 일하는 리디야니 역시 “쓰나미는 아체의 역사가 됐다. 유지하는 비용이 얼마가 들어도, 쓰나미가 그 위치까지 갔다는 걸 증명해주기 때문에 절대 옮겨서도, 없애서도 안된다”고 했다.
■ 슬픔을 극복하려는 ‘교육’과 ‘변화’
당시엔 ‘쓰나미’ 단어 자체를 몰라
지진 후 15분간 대피할 시간 놓쳐
참사 후 ‘대피빌딩’ 짓고 수시 연습
2004년 12월26일 이전까지 ‘쓰나미’란 말은 아체 사람들에게 낯설었다. ‘큰 파도’가 와서 사람들이 죽었다는 오래된 이야기가 내려오기도 하지만, 이 파도가 쓰나미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주민 압둘라 한나피아(43)는 “그 전까진 ‘쓰나미’라는 단어 자체를 몰랐다”고 했다. 운시아 대학 자니알 무리신 해양생물학과 교수(46)는 “2004년 쓰나미 당시 첫 큰 지진이 온 이후 약 15분간 대피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면서 “그러나 주민 대부분이 쓰나미 개념을 몰라 통상의 지진으로 생각했다”며 쓰나미 피해가 컸던 이유를 설명했다.
그날 이후 모두가 쓰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됐다. 특히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쓰나미 대피 요령과 대피 장소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지난 5월 방문한 SDN24 초등학교에는 쓰나미가 일어날 경우 옥상으로 대피할 수 있도록 계단이 설치돼 있었다. 학교에서 만난 누르힉마 교감은 “쓰나미가 나면 학교 위로 올라가도록 가르치고 훈련한다. 집에 있을 때 쓰나미가 오면 어떤 것도 챙기지 말고 높은 곳으로 이동하라고 세뇌하다시피 교육한다”고 말했다. 쓰나미뿐만 아니라 지진이 날 경우 책가방을 머리 위로 들고 책상 밑으로 들어가는 시뮬레이션도 한다.
교육국 관료 마롼 픽리(45)는 “주정부와 지역주민이 협력해 자연재해에 대해 토의하고 지식도 공유한다”며 “실제 상황이라 가정하고, 사이렌이 울릴 경우 학교에서부터 대피빌딩(escape building)으로 대피하는 시뮬레이션을 한다”고 설명했다. 쓰나미 잔해를 보존해야 하는 이유도 결국 ‘교육’과 연관됐다. 운시아 대학 부설 쓰나미재해관리연구센터의 엘라 메일리안다 연구원(43)은 “쓰나미 잔해는 배울 점이 있는 장소”라며 “아이들에게 충분히 좋은 교육 자료가 될 것이기 때문에 절대 없어지면 안된다”고 말했다.
아체에서는 대피빌딩을 여러 군데 발견할 수 있었다. 주로 흰색에 여러 층으로 이뤄진 높은 건물이다. 바닷물이나 바람이 잘 빠져나가 건물이 충격에도 견딜 수 있게 층에는 기둥만 있고 벽이 없다. 지역 명문 운시아 대학 부설 쓰나미재해관리연구센터 건물 역시 대피빌딩을 겸한다. 맨 위층에 오르니 인근에 있는 또 다른 대피빌딩이 눈에 들어왔다.
학교와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한 교육 덕에 반다아체에서 쓰나미에 대한 이해도는 14년 전보다 확연히 높아졌다. 간호사로 일하는 사라 아이눈(39)은 “아체 지역에서 시뮬레이션을 많이 하다 보니 주민들이 이미 어디로 대피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실제 지진이 난 적이 있는데, 사이렌이 나오면 그때부터 내가 연습했던 대로 대피하면 된다”고 말했다.
■ 지역사회 중심, 쓰나미 뮤지엄
반다아체로 진입하면 납작한 원통 모양의 건물이 자동적으로 눈에 들어온다. 아체 쓰나미 뮤지엄이다. 쓰나미를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2009년 인도네시아 건축가 리드완 카밀이 설계했다.
쓰나미 뮤지엄에 입장해 첫 전시관으로 진입하는 통로는 온통 검다. 검고 축축한 바닥을 따라 걸어 내려가면 ‘우우우’ 하는 큰 소리가 천장에서부터 울리고, 양옆 높은 벽에서는 실제 쏟아지는 물이 벽과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 파도가 찰싹대는 소리가 들린다. 어두워서 앞이 잘 보이지 않고 옷과 신발에는 물이 튄다. 쓰나미가 덮쳤을 당시의 순간을 재현해 쓰나미 공포를 느낄 수 있도록 연출한 공간이다.
이 통로를 지나 도착한 시청각 자료실 역시 어둡고 엄숙한 분위기다. 쓰나미 참사 현장 사진을 보여주는 모니터 여러 대가 설치된 회색빛 전시관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더 짙은 회색의 둥근 공간이 나온다. ‘기도의 방’이다. 기도의 방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벽면 바닥에서 천장까지 빼곡히 적혀 있다. 이곳까지 지나야 햇빛이 드는 복도로 나올 수 있다.
쓰나미 뮤지엄은 전시뿐 아니라 기억과 보존, 교육의 기능을 통합한 반다아체의 가장 상징적인 공간이다. 관장 합니 데(42)는 “2004년 당시의 기분을 재현하기 위해 무섭고, 어둡고 물이 떨어지도록 했다. 겁을 준다기보다는 자연재해는 그만큼 무섭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교육 목적으로 그렇게 연출했다”고 설명했다. 단체 견학을 오는 초·중·고 학생 및 일반 방문객을 모두 합쳐 하루에 약 2000~5000명이 쓰나미 뮤지엄을 찾는다. 쓰나미가 발생한 12월에 방문객이 가장 많고, 휴일에는 1만9000명까지 오기도 한다. 입장료는 받지 않는다. 데는 “특별교육기관으로서 근처 주민이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고, 재난에 대한 대비를 가르쳐주는 공공장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쓰나미 뮤지엄 역시 대피빌딩으로 활용된다. 대피용 내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옥상에 닿는다. 데는 “층층이 올라갈 수 있도록 구조가 돼 있다. 장애인이나 노인 등 거동이 불편한 사람을 위해 엘리베이터도 설치돼 있다”고 설명했다.
굳이 쓰나미 전시를 보려는 목적이 아니더라도 아체 사람들은 쓰나미 뮤지엄을 찾는다. 사진 전시나 소규모 문화 행사를 여는 문화 공간도 겸하기 때문이다. 쓰나미 뮤지엄과 그 주변은 반다아체 사람들의 약속 장소, 축제 장소로도 쓰인다. 지난 5월에도 아체 전통문화 행사가 이 근처에서 열렸다. 아체 전통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의 공연, 전통음식 나누기 등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홍보대사 일을 하는 알미라 역시 이 행사에 왔다. 그는 “(이런 행사를 하면) 아체를 찾은 사람들이 아체에서 쓰나미 외에 다른 문화적인 특징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쓰나미 뮤지엄의 보존과 재현은 때로 생존자들의 트라우마를 자극하기도 한다. 마르주키 압둘라의 부인 아스마 술라이만(56)은 “내 기억 속에 이미 깊은 상처가 있는데, 다시 그 상처가 되새김질될까 무서워서 뮤지엄에 가지 않는다”면서도 “아체가 쓰나미를 기억하기 위해 이를 당연히 남겨둬야 한다”고 말했다. 압둘라 한나피아 역시 아직까지도 쓰나미 뮤지엄 주변은 방문하기 힘들어한다. 참사 당시 친구와 가족의 시신이 이 부근에 많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도 “쓰나미가 크게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굉장히 슬프고 어두운 일이어도 하나의 역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아체반군과 중앙정부의 30년 내전
참사 이틀 만에 휴전 선언 후 협정
가슴속 슬픔 여전…치유는 진행 중
무리신 교수는 “아이를 쓰나미 뮤지엄에 데려다주더라도, 나는 입구까지만 가고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참사 당시 그는 바닷물이 밀려들어오는 것을 보고 차를 돌려 대피했던 기억이 있다. 그는 아내, 아이 둘, 장인·장모, 사촌, 동생을 잃었다.
그는 “교수인 나조차도 2004년 당시 쓰나미에 대해 잘 몰랐다. 아이들에게 쓰나미에 대해 가르친다는 점에서 박물관은 굉장히 중요하며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 참사가 불러온 평화와 과제
아체가 쓰나미를 딛고 일어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하나의 역설이 있다. 강력했던 쓰나미는 뜻밖에도 ‘평화’를 가져왔다. 아체주의 자원과 독립 문제를 두고 30여년간 내전 중이었던 아체해방운동(GAM)과 인도네시아 정부는 참사 후 분쟁을 멈췄다. 참사 발생 이틀 후인 2004년 12월28일 GAM 측은 휴전을 선언했다. 외부로부터 구호물품과 복구 지원을 원활히 받기 위한 선택이었다. 사후 복구가 무엇보다 시급했고, 반군의 병력과 군사시설이 쓰나미로 많은 손실을 입었던 점이 이유로 꼽힌다. 이듬해인 2005년 7월 양측은 핀란드 헬싱키에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쓰나미 전부터 양측 간에 논의가 진행됐지만, 12만명이 숨진 참사가 협정을 앞당기는 결정적 요인이 됐다.
평화협정 이후 삼엄했던 분위기는 한층 풀어졌고 치안도 나아졌다. 아이눈은 “쓰나미 이전엔 마을에서도 탱크 소리가 많이 들렸고 저녁만 되면 총소리가 났다. 시신을 보는 것이 일상이었다. 머리가 없는 시신을 본 적도 있다. 쓰나미가 아니었더라면 평화가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스룰은 “당시 아체 사람들이 아체 외 지역으로 나가는 것도 힘들었고, 외국인들이 아체에 들어오는 것도 힘들었다. 죽거나 행방불명된 사람도 많았다. 저녁엔 대부분 집 안에서 떨고 있었고 밤이 되면 절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했다. 압둘라 한나피아 역시 “쓰나미 이후 변화 중 가장 좋은 것은 평화가 왔다는 점”이라며 “다시는 2004년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아체의 변화와 평화는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쓰나미 이후 아체에는 적십자, 월드비전, 유니세프 등 수많은 국제기구, 민간단체가 들어와 구호활동을 펼쳤다. 공항이나 호텔도 그 당시 밀려들어오는 외국인들을 위해 지어졌다. 그러나 최근 시리아 등 타 분쟁지역으로 구호단체가 빠져나가는 추세다. 재난 발생 후 14년이 지난 아체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교육, 보건 등 분야에서 빠져나간 국제단체의 빈자리는 아체 사람들이 메워야 한다.
트리샤니에는 쓰나미 이후 환경 계열 비정부기구(NGO)에서 자재를 나르며 일을 도왔다. 그러다 NGO 사업이 끝나며 그의 직업도 변해야 했다. 그는 “2004년 직후에 비하면 국제단체는 거의 다 나간 상황”이라며 “인도네시아 정부나 아체 주정부가 스스로 일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지고 나서는 대부분 철수했다”고 말했다. 트리샤니에는 아체 지역 사진가협회에 소속돼 정글 등 자연과 환경을 주제로 사진을 찍어 외신에 보내는 일을 하고 있다.
마르주키 압둘라는 본래 의사였으나 현재는 호텔을 운영하며 한국건강관리협회·코이카와의 초등학교 보건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기생충 검사, 소변 검사, 헤모글로빈 수치 검사 같은 기초적이면서 필수적인 건강 관리를 하는 사업이다. 그는 “초기에는 쓰나미 피해를 입은 학교를 대상으로 선정했지만 현재는 쓰나미 피해가 없었던 학교까지도 사업이 확대됐다”고 말했다.
쓰나미 이후 재건 사업, 도로 공사 등 수요 때문에 증가했던 일자리도 다시 줄었다. 압둘라 한나피아 “그 당시 건설, 판매 쪽에서 굉장히 많은 일자리가 생겼지만 지금은 다시 줄었다. 일할 거리가 없고 일자리를 찾기 힘든 상황”이라고 했다.
■ 가슴에 남은 검은 그림자
“쓰나미 직후에는 굉장히 큰 트라우마 때문에 바다를 보지도 못했습니다. 지금 트라우마는 많이 극복했지만 여전히 슬픕니다. 가급적 쓰나미 뮤지엄을 찾는 사람들에게 내 경험을 이야기해주려 하지만, 평소에는 그때의 기억을 잘 떠올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반다아체의 외관은 14년 전 충격을 어느 정도 딛고 일어선 모습이지만, 아체 사람들의 ‘마음속 극복’은 현재 진행형이다. 특히 바다에 대한 원망과 공포는 가시지 않았다. 쓰나미 뮤지엄에서 일하는 이차는 아빠와 함께 산으로 대피하던 상황을 이야기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앞으로 바닷물에 들어가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에를리나 역시 쓰나미가 덮친 순간을 ‘검은색’으로 기억했다. 당시를 묘사하며 그의 목소리와 동작이 커졌다. 그는 “물이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그냥 홍수려니 생각했다. 그러다 나중에 비행기가 지나가는 소리같이 엄청 큰 소리가 났고 굉장히 어두워졌다. 물을 피해 도망가다 물에 잠겼다”고 말했다. 그는 “그때 검은 파도를 봤던 기억 때문에 지진이 조금만 나도 크게 두렵다. 물을 많이 삼켜 병원에 갔는데 코에서 검정 모래가 많이 나왔다”며 눈물을 닦았다.
자녀 넷을 잃은 술라이만은 ‘바다’란 이야기가 나오자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녀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부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숨진 아이들 이야기를 할 때면 술라이만이 매번 눈물을 보이기 때문에 주변에선 쓰나미 관련 이야기를 삼간다. 술라이만은 “바다를 보면 항상 슬퍼진다. 2004년 이후 개인적으로 바다를 보러 간 일이 없다. 바다는 절대 볼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자녀들의 시신조차 거두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차마 걸지 못했던 가족사진을 3년 전에야 집에 걸 수 있었다.
그의 남편 마르주키 압둘라는 “이슬람 문화에서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오래 품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본다. 아이 넷이 죽었어도 그나마 막내아들과 아내는 살아남지 않았는가.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제일 힘이 됐던 원동력은, ‘신께 감사하다’는 말이었다”고 했다.
쓰나미라는 미증유의 재난 앞에 인간들은 무력했다. 대재난은 역설적으로 평화를 가져왔지만, 십수만명의 가족과 이웃이 한꺼번에 죽은 고통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았다. 반다아체 사람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아주 조금씩 스스로를 치유하고 있었다.
■ 쓰나미로 정세 악화·부패…추모도 평화도 못 살린 스리랑카
다른 길 걸은 스리랑카
지난 5월 찾은 스리랑카 텔와타 지역쓰나미조기경보센터(CTEC)는 작고 한산했다. 몇 걸음이면 둘러볼 수 있는 방 네 칸이 전시 공간의 전부였다.
신발을 벗고 주택을 개조한 단층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전시 공간이 꾸려져 있었다. 벽에는 쓰나미에 대한 기초적 이미지 자료와 사진이 붙어 있다. 사진은 액자에 보관되어 있지 않고 코팅만 돼 있다. 몇몇 사진은 누렇게 색이 바랬다. 왕복 2차선 도로를 건너면 곧바로 파도치는 바다가 있다. 바다까지의 거리는 20m 남짓이었다.
■ 뮤지엄 아닌 뮤지엄
“센터가 세워진 이 자리에 쓰나미가 왔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제대로 대피하지 못해 피해가 컸기 때문에, 쓰나미를 알리고 대피 교육을 하기 위해 센터가 만들어졌습니다.” 2009년 이후 이곳에서 일한 프리얀티(45)는 지금 센터장이다. 전시관 한쪽에는 아이가 그린 마을의 대피 지도가 걸려 있었다. 학생들이 쓰나미 당시의 파도나 우는 사람을 묘사한 그림도 있다. 프리얀티는 “근처에 사는 아이들이 종종 센터에 와 재난 대비 교육을 받고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며 “센터는 사이렌과 대피 경로를 설치하고, 주민들에게 쓰나미에 대해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프리얀티 역시 쓰나미로 자녀와 친척을 잃은 유가족이며 쓰나미 생존자다.
센터의 교육·홍보 활동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센터에서 일하는 로샨 와둔탄트리(48)는 “2016년 3월에 지진이 왔을 때 이 근처에 사이렌이 울렸고 사람들이 무사히 대피할 수 있었다”며 “특히 학생들이 부모를 데리고 대피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 센터가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재정적 어려움 때문이다. 프리얀티는 “방문객들에게 뭔가를 팔거나 기부금을 받아 운영 기금을 마련해야 하지만 현재로선 기부금만으로 유지하기에 충분치 않은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방문 당시엔 서양인 관광객 네댓명이 센터를 둘러봤다. 풀타임으로 일하는 직원은 프리얀티와 와둔탄트리 둘이다.
■ 재난에도 우선순위가 있을까
스리랑카는 2004년 인도양 쓰나미 당시 인도네시아에 이어 두번째로 큰 피해를 입었다. 섬나라인 스리랑카 해안 70%가 쓰나미 영향을 받았고, 3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국가적 위기로 불릴 정도로 심각한 재난이었지만 스리랑카의 쓰나미 보존과 추모 환경은 인도네시아 반다아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처진다. 해안가에 추모비나 불상이 놓인 것이 사실상 전부다.
쓰나미 이후 평화 정착 여부가 스리랑카와 인도네시아의 차이를 만들었다. 스리랑카는 30여년간 내전에 시달렸다. 스리랑카 대부분이 불교·싱할라어 문화권인 것과 달리 동북부 타밀 지역은 이슬람교·타밀어 문화권이다.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는 자체적으로 무장, 통치구역을 확보하며 분리·독립을 주장해왔다.
반군 점령’ 동북부 지원 두고
“테러리스트와 협상” 반발 일어
정부 평화회담 무산…지원 배제
내전·쓰나미 난민 문제 ‘중첩’
쓰나미 이후 스리랑카에서도 LTTE와 정부 간 화해가 이뤄질 뻔했다. 재난 지원을 받기 위해 LTTE가 대화를 제안했고, 당시 찬드리카 쿠마라퉁가 정부는 이들의 요구사항을 반영해 평화회담을 진행하려 했다. 하지만 ‘테러리스트와 협상하려 한다’는 반발이 크게 일었고, 2005년 11월 LTTE와의 어떠한 협력에도 반대하는 강경파 바힌다 라자팍세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결과적으로 LTTE가 점령한 지역은 한층 더 군사화됐다. 이는 국제기구가 스리랑카로 들어가기를 꺼리는 요인이 됐다. 아체에서 쓰나미 이후 아체해방운동(GAM)이 인도네시아 정부에 아체를 맡기고 물러나 2005년 평화협정을 맺은 것과 상반된 결말이다.
지난 5월 스리랑카 콜롬보 자택에서 만난 인류학자 말라티 드 알위스(55)는 “GAM과 LTTE는 무장세력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LTTE가 훨씬 더 국가의 기능과 형태에 가까웠다”며 “쓰나미로 피해를 입은 지역에 여러 정치세력이 영향을 미치면서, 국제기구가 구호물품을 전하고 활동하는 데에 혼선이 빚어졌고 부패가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스리랑카에선 내전으로 난민이 된 사람들이 쓰나미로 또다시 모든 것을 잃었다. 이미 전쟁으로 숨진 이들을 애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쓰나미가 왔다”고 설명했다.
스리랑카 정부는 반군인 LTTE가 점령한 지역을 주요 지원 대상으로 두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전쟁 난민과 쓰나미 난민 문제가 중첩된, 정작 피해를 이중삼중으로 겪는 지역에는 주택 복구나 물품 지원이 상대적으로 덜 미치게 됐다.
‘기념센터’마저 외국인이 설립
재난 대비 교육 성과 거뒀지만
재정 지원 미미…운영 힘들어
스리랑카 내에서 그나마 상징적인 쓰나미 기념 공간으로 꼽히는 CTEC조차 외국인이 세웠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센터는 호주 출신 활동가 앨리슨 톰슨(52)이 설립했다. 쓰나미 이후 구호 활동을 하기 위해 스리랑카로 온 톰슨은 “쓰나미 직후 건물을 빌리고, 사이렌과 전선을 구입하고, 중고 컴퓨터를 마련하고, 쓰나미 대피 표지판을 직접 손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2005년 이후 톰슨은 사비를 들여 센터를 유지했다. 전기요금과 인터넷 요금을 내고, 사이렌을 보수하는 데에 연간 1만5000달러가 소요된다. 톰슨은 “센터를 연 이후 13년간 유지비를 대는 것이 내 인생 통틀어 가장 힘든 과제였다”고 말했다.
톰슨은 “몇몇 국제기구에 자금 지원을 요청해봤지만, 다들 센터의 취지에는 동의하면서도 ‘쓰나미는 이미 지나간 일’이라며 지원을 거절했다”면서 “스리랑카가 이전보다 나아지기는 했지만 앞으로 다시 쓰나미가 올 상황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정원식·김서영(모바일팀), 김형규(토요판팀), 허진무(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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