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아르헨티나는 한국과 지구 반대편에 위치해 있지만, 역사의 궤적은 한국과 무척 닮았다. 칠레, 아르헨티나는 모두 쿠데타와 군부독재를 겪었다. 두 나라의 독재자들은 모두 수십년 전 추방됐지만, 독재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칠레는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선거로 집권한 사회주의자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를 끌어내린 후 17년 동안 철권통치를 휘둘렀다. 아르헨티나는 1976~1983년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를 비롯한 군인들이 번갈아 집권하며 공포정치를 했다.
이들은 ‘좌파 척결’을 명분으로 반정부 인사들을 납치해 고문하고 죽였다. ‘테러 분자’를 소탕한다고 했지만 피해자 중 상당수는 학생, 교사, 지식인, 성직자, 언론인 등 평범한 시민이었다. 칠레에선 공식 확인된 것만 3200명 이상이 살해당했다. ‘추악한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아르헨티나에서는 3만명 이상이 처형되거나 실종됐다. 고문 피해자는 두 나라 모두 수만명이고 해외로 추방되거나 망명한 사람도 수십만명에 이른다.
민주화 이후 칠레는 ‘진실과 화해 국가위원회’를, 아르헨티나는 ‘실종자 진상규명 국가위원회’를 만들어 군부가 저지른 각종 범죄를 조사했다. 그 결과 참혹한 인권유린의 실태가 상당 부분 드러났다. 하지만 진상규명은 여전히 미완이다. 군부에 가담한 가해자 처벌도 일부에 그쳤다. 두 나라의 희생자 가족들과 인권·시민단체들은 지금도 당시 죽어간 이들을 추모하고 책임자들의 죗값을 묻는 활동에 매달리고 있다. 과거를 기억하고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싸움은 철저히 현재진행형이었다.
■ 그림 같은 대저택의 비밀
지난 5월 칠레 산티아고의 국립경기장(Estadio Nacional)을 찾았다. 공교롭게도 아침부터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렸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그건 1973년 9월11일 행동을 개시한 쿠데타군의 암호이기도 했다. 그날 맑은 하늘에선 비 대신 대통령궁 위로 폭탄이 쏟아져내렸다.
국립경기장은 쿠데타 당일부터 두 달 남짓한 기간 동안 2만여명이 끌려와 고문당한 수용소였다. 감옥으로 사용됐던 경기장 안 통로와 선수 라커룸은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돼 ‘기억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벽에는 빗금을 그어 날짜를 센 흔적이 지금도 뚜렷이 남아 있었다. 유리창을 관통한 총알 자국도 그대로였다.
이곳에서 시설 유지보수 일을 하는 마누엘 멘데스(70)는 당시 수감자였다. 25살의 공장노동자였던 그는 “추위와 공포 속에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만이 지상 과제였다”고 회상했다. 날마다 이유 없이 두들겨맞고, 누군가 반항하다 끌려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이 반복됐다.
끔찍한 기억이 있는 곳에서 굳이 일하는 이유를 묻자 차분한 답이 돌아왔다. “이곳의 차가운 벽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살아남은 우리들은 여기서 벌어진 일을 세상에 전해야 될 의무가 있습니다.”
경기장 한쪽엔 죽은 이들의 빈자리를 상징하는 ‘존엄의 관람석’이 마련돼 있었다. 지금도 국립경기장에선 축구경기를 비롯해 크고 작은 행사가 열리지만 이곳만은 울타리를 쳐놓고 항상 비워둔다고 했다. 관람석 상단엔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산티아고 외곽에 위치한 비야 그리말디(Villa Grimaldi)는 이탈리아 출신 부자가 아름답게 꾸민 여름별장이었다. 쿠데타 후 피노체트의 비밀경찰 조직 국가정보국(DINA)은 이곳을 빼앗아 가장 악랄한 구금·고문시설로 사용했다. 주로 좌파 정당 지도자와 활동가들이 잡혀왔다. 4500여명이 이곳을 거쳐갔고 확인된 사망·실종자만 241명이다.
민주화 이후 평화공원으로 변한 비야 그리말디의 겉모습은 아름다웠다. 정원은 잘 가꿔져 있었고 높다란 나무 위에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노랗고 빨간 낙엽이 쌓인 땅 위로 기분 좋은 흙냄새가 올라왔다. 끔찍했던 과거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고문 흔적을 그대로 재현한 시설들을 보기 전까진 그랬다.
옷장 크기의 나무감옥은 한눈에도 좁고 답답해 보였다. 그 안에 보통 5명을 가뒀고, 수감자들은 그 안에서 선 채로 서로의 오물냄새를 맡으며 밖에서 들려오는 고문소리에 벌벌 떨었다고 했다.
과거 물탱크로 쓰던 탑 건물은 최종 단계의 고문이 이뤄지는 ‘절멸의 장소’였다. 탑에서 고문당한 이들은 대개 숨졌고, 군인들은 시신을 헬기에 싣고 바다로 나가 태평양에 던져버렸다. 한쪽 전시실에는 시신이 떠오르지 못하게 몸에 매달았던 기차 선로와 바닷속에서 찾아낸 희생자들의 상의 단추 등이 전시돼 있었다.
시설을 안내한 루이스 아레야노(62)는 희생자 241명의 이름이 적힌 기념비를 가장 중요한 기념물로 소개했다. 타원형으로 푸르게 칠해진 기념비는 그들을 품은 바다를 상징한다고 했다. 설명을 듣고 보니 조개와 바다 화석 모양 장식이 눈에 띄었다.
사소한 부분까지 의미를 부여하고 희생자 모두를 극진히 여기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역사교사 출신인 아레야노는 “비야 그리말디를 지금 같은 평화공원으로 만든 건 국가가 아니라 과거의 일을 잊지 않으려는 지역 주민들과 인권단체 등의 노력이었다”고 설명했다.
■ 강 위에 떠 있는 소년의 정체
아르헨티나에도 군부독재 시절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는 장소가 여럿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시 북쪽 라플라타 강변에 자리 잡은 기억공원(Parque de la Memoria)이 대표적이다. 인권단체들이 주도해 1998년부터 조성된 공원의 핵심은 희생된 이들의 명단이 연도와 알파벳순으로 나열된 거대한 벽이다.
4개의 벽에 사용된 돌은 3만개로 전체 희생자 숫자를 뜻한다. 적혀 있는 이름은 지금까지 신원이 확인된 9000여명이다. 국가폭력에 희생된 이들의 이름은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눈높이에 손으로 만지면 촉감이 느껴지도록 양각돼 있었다.
천천히 걸으며 확인한 명단 중엔 10대 중반의 학생들도 300여명이나 됐다. 그들도 군부가 지목한 ‘빨갱이’ ‘내부의 적’에 포함됐다. 공원의 홍보 담당자 토마스 테세로(32)는 “빈민촌 문맹 퇴치 활동을 하던 대학생이나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던 노동자들도 불순분자로 몰려 처형됐다”며 “하루 8시간 근무처럼 지금 우리가 당연히 누리는 혜택들은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벽의 끝에는 “국가테러에 희생당한 실종자와 죽은 자들, 정의와 평등의 원칙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서 희생된 이들을 기리는 기념물”이라고 적혀 있었다. 실종자 가족들에겐 2007년 이 벽이 완공되기 전까지 가족을 추모할 만한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38살에 죽은 미겔 앙헬의 이름표 옆에 아들 마르틴이 남긴 편지가 붙어 있었다. “사랑합니다. 저는 잊지 않을 겁니다. 용서하지도 않을 겁니다. 너무 그립습니다. 보고 싶어요.”
공원 끝자락 강가에 다다르자 강물 위에 떠 있는 소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1977년 엄마와 함께 실종된 14살 파블로 미게스를 형상화한 작품이었다. 소년은 악행이 벌어졌던 시내를 등지고 강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물살에 따라 소년의 어깨가 들썩이며 움직였다.
소년상을 포함해 공원에는 과거의 인권유린 범죄를 상징하는 8개의 조형물이 들어서 있다. 매달 1만여명의 시민들이 공원을 찾아 시설물을 둘러보고 피크닉도 즐긴다고 했다.
기억공원에서 멀지 않은 해군기술학교(ESMA)는 아르헨티나 군부가 쿠데타 후 사용한 750여곳의 불법 구금·고문시설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상징적인 장소다. 5000여명이 이곳에 끌려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았다. 군정이 종식된 다음해인 1984년 쿠데타 날짜인 3월24일에 맞춰 인권유린 범죄자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됐을 정도다. 민간 주도의 운동에 힘입어 시 정부는 2004년부터 이곳을 기억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일부 공간은 희생자 단체와 인권단체 등에 제공됐다.
고문이 이뤄졌던 핵심 건물은 2015년부터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 정면을 둘러싼 유리 외벽은 실종자들 얼굴로 장식돼 있었다. 고문 장소인 지하실로 내려가자 커다랗게 트인 공간이 나왔다. 과거엔 양쪽으로 칸막이가 쳐진 방이 있었고, 그 안에서 다른 조직원의 이름을 실토할 때까지 가혹한 고문이 이뤄졌다.
고문의 끝은 죽음이었다. 마취주사를 맞은 수감자가 비틀거리며 마지막 걸음을 뗀 복도를 고문자들은 ‘행복의 길’이라고 불렀다. 조롱의 의미였다. 인사불성이 된 수감자들은 근처 비행장에서 비행기에 태워져 산 채로 라플라타강에 유기됐다. 이런 ‘죽음의 비행’은 수십차례 계속됐고, 이 작전에 가담한 군인들의 재판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같은 건물 3층에는 임산부를 수용하는 방이 따로 있었다. 30여명이 그 방에 머물렀고 일부는 출산도 했다. 태어난 아기는 군인 집안 등으로 강제 입양됐다. 독재 시기 그렇게 운명이 뒤바뀐 이들은 500여명으로 추산된다. 지금까지 진짜 가족을 되찾은 사람은 127명이 전부다. 여전히 300명이 넘는 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가짜 인생’을 살고 있는 셈이다.
기념관은 천인공노할 군부의 만행을 담담히 그러나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일부 건물은 여전히 재판 증거로 활용 중이어서 설치물이 모두 이동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잡지 기자 출신으로 기념관의 교육 업무를 담당하는 마누엘 바리엔토스(41)는 “학교에 방문 교육을 나가기도 하는데 최대한 요즘 세대에 친숙한 방식으로 역사를 전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
1분이 채 안되는 짧은 동영상이나 교육용 이미지 파일을 주로 제작하고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적극 활용하는 방식이다. 국가테러와 인권유린 범죄가 무엇인지 어린 학생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하되 너무 가볍지 않게 만드는 데 중점을 둔다고 했다.
■역사 부정·현실 왜곡과 맞서는 이들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서 과거사 기억과 희생자에 대한 추모가 비교적 잘 이뤄지는 것은 수십년 동안 계속된 당사자들의 피나는 노력 덕분이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5월광장 어머니회’의 투쟁을 빼놓고 과거사 청산 역사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다.
지난달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어머니회 사무실을 방문했다. 아르헨티나 출신 혁명가 체 게바라의 큼지막한 얼굴 위로 ‘기억과 사랑, 그리고 저항의 중심’이라고 쓴 간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에베 데 보나피니 회장(90)은 구순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했다. 그는 “천식과 당뇨 때문에 건강을 무척 신경 쓴다”며 “가공식품을 일절 먹지 않고 모든 끼니를 직접 만들어 먹는다”고 했다. 사무실 한쪽에서 수프냄새가 났다. 그는 매일 오전 9시에 출근해 저녁 늦게까지 사무실을 지키며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는다.
보나피니 회장의 두 아들과 큰며느리는 군부독재 첫 2년 동안 모두 실종됐다. 자식 잃은 다른 어머니들과 함께 비델라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고 면담을 요청하자고 모인 게 어머니회의 시작이었다. 여남은명이 1977년 4월30일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카사 로사다’ 앞의 5월광장에 모여 첫 시위를 했다. “내 자식을 찾아내라” “진실을 밝혀라”. 어머니들의 작은 외침은 점점 더 큰 파문을 만들어냈다.
그해 말엔 시위 참여 어머니가 200여명까지 늘었다. 신문 광고로 탄원서와 함께 실종자 명단을 게시했다. 그 무렵 세 명의 어머니가 납치·살해당했다. 모일 때마다 경찰의 탄압을 받았다. 어머니들은 ‘절대로 혼자 잡히게 놔두지 말자’고 서로 다짐했고 악착같이 싸웠다. 보나피니 회장은 “그때 ‘미친 여자’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했다.
어머니들의 적극적인 투쟁은 점차 해외 언론을 통해 세계에 알려졌다. 이들은 교황을 알현하는 등 국제적 연대를 얻기 시작했다. 집회 때 서로를 잘 알아보기 위해 쓰기 시작한 하얀 두건은 아르헨티나 반독재 투쟁의 상징이 됐다.
그렇게 41년 동안 매주 목요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5월광장을 지켰다. 2000명까지 있었던 회원 수는 늙고 병들어 세상을 등진 어머니들이 늘면서 이제 80여명으로 줄었다. 5월광장에 매주 얼굴을 비치는 이는 10~15명 정도다. 멘도사, 투쿠만, 마르 델 플라타 등 다른 지역에서도 같은 날 어머니들의 시위가 열린다.
어머니회는 신문과 라디오 방송 등 홍보 매체를 직접 운영하고 서민주택 건설사업 등 다양한 사회운동도 벌이고 있다. “우리 애들이 혁명가였잖아. 그 애들의 죽음으로 우리가 다시 태어난 셈이지. 자식들이 꿈꿨던 세상을 우리가 대신 만든다는 각오로 활동하는 거야. 우리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만두지 않을 거야.” 보나피니 회장의 표정은 단호했고 말투에선 결기가 느껴졌다.
칠레에선 ‘정치적 처형자 가족모임’(AFEP)과 ‘체포·실종자 가족모임’(AFDD) 등 희생자 단체들이 1976년부터 진상규명과 군부 책임자 처벌을 위한 활동을 꾸준히 벌여왔다. AFEP는 1100명이 넘는 희생자들의 명단을 직접 취합해 조사와 처벌을 요구한 최초의 단체다. 정부를 압박해 ‘정치범 추모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만들었고 2010년부터 매년 10월30일 문화행사를 열고 있다. 회원들은 칠레 현대사를 담은 연극과 뮤지컬 공연에도 참가한다. 알리시아 리라 AFEP 대표(69)는 이를 “기억과 문화를 섞으려는 시도”라고 설명했다.
250여명의 회원이 소속된 AFDD는 군인과 경찰 외에도 독재에 협력한 민간 부역자를 처벌하기 위해 고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군부 가해자들이 수감된 ‘특별 감옥’의 폐쇄를 위한 여론전도 이들의 주된 활동이다. 칠레의 군부 인사 중 재판에서 형이 확정된 사람은 120여명에 불과한데 이 중 대부분은 ‘푼타 페우코’라는 전용 감옥에 따로 수감돼 있다. 마르타 베가 AFDD 사무총장(60)은 “반인륜 범죄자들을 따로 모아 테니스장에 TV를 비롯한 온갖 전자제품이 갖춰진 5성급 호텔에 머물도록 하고 있다”며 “기업인 출신에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 아래 있는 우파 대통령 피녜라가 이들을 노골적으로 비호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칠레에선 과거사를 부정하고 군부의 책임을 희석하는 ‘역사 되돌리기’ 움직임이 최근 여러 차례 포착됐다. 국립역사박물관에선 지난 5월 피노체트를 ‘자유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라는 전시에 슬쩍 끼워넣었다가 논란이 일며 관장이 해임되는 사건이 있었다. 군부의 민간인 학살을 부정하는 극우파 정치인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가 지난 대선에 출마해 8%를 득표한 것도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아르헨티나 역시 우파인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독재 시절 희생자 3만명이라는 숫자는 과장된 것”이라고 발언해 논란을 일으켰다. 마크리 대통령은 최근 ‘국방개혁’의 일환으로 국내 치안에 군을 투입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민주화 이후 엄격히 제한돼온 군의 역할을 다시 확대하며 ‘민간인 학살’이라는 국민적 트라우마를 건드린 것이다.
■탐정이 된 남자들, 춤꾼이 된 여자들
그러나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지는 역사 왜곡 시도가 주류는 아니다. 사실을 부정하고 정의 실현을 가로막는 시도보다는 시민사회의 ‘역사 바로 세우기’ 목소리가 아직은 힘이 세다. 양국에선 저마다의 사회상을 반영한 독특한 투쟁의 문화가 끊임없이 진화해왔다.
칠레의 ‘푸나’(FUNA) 시위는 처벌받지 않는 가해자들에게 시민이 직접 내리는 ‘사회적 형벌’이다. “정의가 없으면 푸나가 있다”는 구호가 이 시위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푸나는 원주민 부족인 마푸체 언어에서 비롯한 말이다. ‘썩었다’는 뜻의 동사 혹은 명사로 쓰인다. 가해자들이 썩도록 해주겠다, 썩어문드러질 때까지 괴롭히겠다 정도의 뜻으로 통용된다.
보통은 처벌받지 않고 멀쩡히 사는 가해자들의 집과 직장에 찾아가 떠들썩한 시위를 벌이며 그의 죄상을 이웃과 동료들에게 폭로하는 형식을 취한다. 1999년 푸나 모임을 처음 만든 훌리오 올리바(52)는 “범죄자가 감옥에 가지 않는다면, 그가 사는 환경 자체가 감옥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푸나를 당한 이들은 혼비백산 도망치거나 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명을 쓰는 등 과거를 지우고 숨어지내는 범죄자들을 찾아내는 일은 쉽지 않다. 올리바와 함께 푸나 대상을 선정하고 뒷조사를 진행하는 후안 사라비아(44)는 “범죄자들을 쫓는 동안 탐정이 다 됐다. 어떨 땐 경찰들이 와서 우리한테 정보를 묻기도 한다”며 웃었다.
이들은 법원 기록과 생존자 수기, 각종 보고서 등을 섭렵하고 필요에 따라 잠입취재나 잠복근무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푸나 세례를 받은 이가 그동안 줄잡아 200명에 이른다. 이들의 리스트에는 여전히 처벌받지 않은 독재 부역자 명단이 7000여명이나 남아 있다.
푸나는 시위 대상에 물리적 폭력을 가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킨다. 철저히 평화적 시위를 표방한다. 준비물은 플래카드와 피켓, 가해자의 죄상이 적힌 폭로 전단이 전부다. 구호도 외치지만 ‘올레올레~’로 시작하는 축구장 응원가를 개사한 노래를 더 많이 부른다. 이미 끔찍한 일을 수없이 당했는데 시위를 할 때만이라도 즐겁게 축제 같은 분위기로 하고 싶다는 것이다. 물론 노래 가사는 나긋나긋하지 않다. “나치가 당한 것처럼 너희가 가는 곳마다 우리가 따라갈 것이다” “칠레 사람들아 조심해라 지금 살인범을 놓아주고 있다”.
사라비아는 “푸나의 궁극적 목표는 우리 스스로 해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범죄자를 처벌하지 않는 현행법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나선 것일 뿐 법과 정의가 잘 작동하면 시민이 직접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푸나는 지연된 정의를 회복하기 위한 민중의 도구”라고 강조했다.
‘쿠에카 솔라’(Cueca Sola)는 수탉이 암탉을 유혹하는 모양을 본뜬 칠레의 전통춤 ‘쿠에카’를 비틀어 만든 춤이다. 남녀가 어우러지는 경쾌한 민속춤을 여자 혼자 구슬프게 추면서 아버지·남편 등 독재 시절 사라진 가족의 빈자리를 보여주는 무언의 항의로 바꿔낸 것이다.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밀레나 가야르도(31)는 쿠에카 솔라의 현대적 재해석을 추구하는 젊은 세대다. 그가 주축이 돼 2016년 결성된 쿠에카 솔라 모임은 춤의 형태와 복장, 노래 가사 등을 변주하는 다양한 실험을 시도한다. 악기를 동원하고 즉석에서 관객 참여도 이끌어낸다. 모두 메시지 전달 도구로서 춤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들이다.
춤의 주제도 다양해졌다. 과거사를 고발할 뿐 아니라 현재 벌어지는 인권유린에도 관심을 환기한다. 결국 군사독재가 지금의 신자유주의 체제를 강화시켰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국적 기업의 토지 수용에 반발하는 시위에 나섰다 실종된 원주민 청년을 추모하는 춤을 추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페미사이드(여성 살해) 피해자를 추모하는 춤도 단골 레퍼토리다. 희생자의 사진을 몸에 붙인 채 그들의 사연을 절절히 전한다. 가야르도는 “죽은 사람뿐 아니라 살아 있는, 지금 고통받는 사람을 위해서도 언제든 춤을 출 수 있다”며 “쿠에카 솔라는 항의와 기억의 도구이면서 우리가 가진 가장 강력한 저항의 방식”이라고 말했다.
■기록 없이 정의도 역사도 없다
아르헨티나는 기록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노력으로 과거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근거를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다. ESMA 부지에 자리 잡은 국립기억자료보관소(ANM)는 그런 노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소다.
2003년 설립된 ANM엔 군부 가해자를 심판한 모든 재판의 영상 기록 등 독재 시절 인권유린과 관련해 정부가 수집한 모든 자료가 영구 보관돼 있다. 모든 자료는 독자 개발한 검색 프로그램을 통해 누구에게나 공개된다. 파트리시아 쿨손 기록물관리국장(55)은 “군에서 승진 대상자 명단을 보내오면 과거 인권유린에 연루된 부분이 없는지 검토해 보고서를 보내는 것도 우리 업무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별도의 건물에 마련된 ANM의 문서고에 들어서니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종이와 사진을 최상의 상태로 보존하기 위해 온도는 18~20도, 습도는 50%를 항상 유지한다고 했다. 서류를 담는 상자는 종이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접착제 등 화학성분을 사용하지 않고 모서리를 실로 꿰맨 것이었다. 소화시설 역시 불이 나도 문서에 피해를 입히지 않는 특수가스가 나오도록 설계됐다.
문서 보존작업실에서는 한 연구원이 책상에 놓인 오래된 책자를 장갑을 낀 채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한 장씩 들춰보고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약 200㎞ 떨어진 한 공동묘지의 1970년대 무명묘 사용일지였다. 실종자 집단매장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최근 복원된 40년 전 자료를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연구원은 “누군가에겐 낡은 폐지에 불과해 보이겠지만, 희생자의 가족을 찾을 수 있다는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있다는 걸 생각하면 우리한텐 금보다 귀한 물건”이라고 말했다.
ESMA 부지에는 시민단체 연합 ‘열린 기억’(Memoria Abierta)의 아카이브도 자리 잡고 있다. 과거사 관련 8개 단체가 모인 이 조직은 각자 모은 독재 관련 기록물을 통합해 관리하는 한편 국가가 외면한 생존자들의 기억을 스스로 보존하기 위해 다양한 희생자 인터뷰를 직접 진행해 영상 기록물을 보관하고 있다. 평균 2시간 분량의 인터뷰는 1000개에 이르고 사진 기록물도 2만점에 달한다. 열린 기억의 자료들 역시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법률사회연구소(CELS)는 에밀리오 미뇨네 등 군부에 자녀가 납치된 변호사 5명이 법률 대응을 하기 위해 1979년 설립한 단체다. 자녀들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 시작된 모임이었지만 점차 군부 피해자 모두를 위한 법률 상담 조직으로 발전했고 지금은 1900여명의 피해자를 대리해 법정에서 진실을 밝히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 CELS 역시 방대한 규모의 자체 아카이브를 보유하고 있다.
CELS는 군부 시절 여성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자행된 광범위한 성고문 실태를 밝혀내는 등 여성 인권 침해에 맞선 싸움에서도 성과를 올렸다. 가스통 칠리에르 CELS 대표(48)는 “지금도 국가테러를 부정하고 게릴라를 퇴치하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과거를 왜곡하는 발언들이 종종 나오지만, 이를 간단히 반박할 수 있는 광범위한 자료들을 시민사회가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과거사 문제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의 미소마저 빼앗아가진 못했다”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서 군부독재의 유산은 여전히 사회적 갈등을 불러일으키며 숙제로 남아 있다. 처벌받지 않은 범죄자는 여전히 많고 많은 희생자들은 유골조차 찾지 못한 상태다.
그러나 진실은 지금도 조금씩 전진하는 중이다. 칠레 법원에선 지난 5월 ‘죽음의 비행’에 대한 최초의 증언이 나왔다. 군인 미겔 크라스노프가 살아 있는 사람 3명을 헬기에서 밀어뜨려 죽였다는 증언이 나온 것이다. 이달 초엔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를 고문하고 살해한 퇴역 군인 8명에게 징역 15년형을 선고하는 판결도 나왔다. 무려 45년 만의 단죄였다.
지난달 1일 칠레 산티아고의 모네다궁 앞에서는 오후 1시가 되자 여느 때처럼 푼타 페우코에 반대하는 희생자 단체의 시위가 열렸다. “진실과 정의, 바로 지금!”이라고 쓴 검은색 플래카드가 펼쳐졌고 참가자들은 피켓을 든 채 구호를 외치며 관광객과 시민으로 가득한 도심 광장을 천천히 돌았다.
“이건 가족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칠레의 문제다” “인권유린 범죄자 사면하지 마라”. 행렬이 지나가는 동안 신호 대기를 위해 서 있던 차량에서 경적이 울렸다. 한 운전자가 창문 밖으로 미소와 함께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며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이날 집회에 참여한 파트리시아 이달고(47)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단지 ‘생각했다’는 죄로 죽임을 당했다”며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없이 칠레 사회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고문 생존자 베로니카 라미레스(70)는 “정의가 이렇게 늦게 도착하는 건 불처벌과 다름없다”며 “진실을 감추려는 정부가 우리를 투명인간으로 만들려 하지만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집회가 끝나고 친구들과 기념사진을 찍는 그의 표정은 더없이 환했다. 끔찍한 일을 겪은 피해자의 우울하고 불행한 이미지 같은 건 없었다. 그는 “당연하다. 그들은 우리의 인간성을 말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우리의 미소까지 죽이진 못했으니 결국 누가 이긴 걸까”라고 되물었다.
지난 7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5월광장에선 정확히 오후 3시30분이 되자마자 어머니회의 행진이 시작됐다. 기억과 진실, 그리고 정의를 요구하는 2095번째 목요시위였다. 이제는 늙어 ‘호호 할머니’가 된 어머니들이 앞장서고 뒤로는 연대하는 젊은이들과 각종 단체 회원들이 따랐다.
초겨울 오후 날씨는 쌀쌀했다. 보나피니 회장을 비롯한 9명의 어머니 회원들은 목도리와 털모자, 장갑으로 중무장한 채 준비된 의자에 앉아 집회를 이어갔다.
보나피니 회장은 최근 세네갈 이민자에게 경찰이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한 사건을 언급하며 공권력의 횡포를 비판했다. 그는 “우리 아버지들과 할아버지들이 이민 와서 세운 나라에서 이민자들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며 “다친 이민자가 치료는 받았는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정보를 공유해달라”고 참석자들에게 부탁했다.
기자의날인 이날 특별히 초대된 잡지 ‘카라스 이 카레타스’의 파블로 숀토 기자(58)는 “세상에는 가진 자를 대변하는 언론과 어머니회처럼 진실을 알리는 언론이 존재한다. 권력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할 말을 했던 어머니들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진짜 본받아야 할 기자상”이라고 발언해 박수를 받았다.
이날 광장에는 팔레스타인의 인권 상황을 고발하는 시민도 있었다. 팔레스타인 국기와 함께 현지의 인권탄압 상황을 전하는 피켓을 들고나온 실비아 플로레스(59)는 “지구 반대편의 약자들이 처한 절박한 사연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어머니들의 시위에 함께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광장은 고통받고 탄압받는 전 세계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가 되어 있었다.
정원식·김서영(모바일팀), 김형규(토요판팀), 허진무(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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