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독가스 34년, 마르지 않은 ‘보팔의 눈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이었지만 죽음은 분명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가스는 소리 없이 퍼졌다. 운 좋게 잠에서 깨어난 이들은 필사적으로 뛰었다. 잠에서 깨지 못한 이들은 다시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가스는 발이 없어서 사람의 발을 앞질러 갔다.
1984년 12월2일 밤 인도 중부 마디아프라데시주의 주도 보팔에 있는 다국적 화학기업 ‘유니언카바이드’ 공장에서 아이소사이안화메틸 가스가 대량 누출됐다. 이 가스는 인체가 잠시만 노출돼도 중상을 입는 맹독이다. 하필 사고가 한밤중에 일어나 속수무책으로 목숨을 잃은 피해자가 많았다. 생존자 단체 모임 ‘보팔의 정의를 위한 국제운동(ICJB)’은 참사 당시에만 3700여명이 사망했고 이후 후유증으로 숨진 이들까지 더하면 1만6000여명이 세상을 떴다고 전했다. 이 사고 피해자는 최소 55만8000여명으로 추산된다. 이 사고로 유니언카바이드의 신뢰는 추락했고, 결국 2001년 다른 화학기업 ‘다우케미컬’에 인수됐다.
보팔의 라자 보지 공항에 내려 시내로 들어서면 ‘보팔, 호수의 도시’라는 환영 간판이 보인다. 아시아 최대의 인공호수 ‘바다 탈랍’과 인도 최대의 이슬람 사원 ‘타지울 마시지드’ 등 근사한 볼거리가 있는 곳이지만 정작 보팔을 세계에 널리 알린 것은 ‘20세기 최악의 산업재해’로 기록된 보팔 가스참사였다. 34년이 지났지만 보팔에서 참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 ‘20세기 최악 산재’에 최소의 보상…후손들 고통 대물림
정부가 못하면 민간이 : 인도 보팔 참사 당사자들의 투쟁
미국계 기업 ‘유니언카바이드’
맹독가스 유출 1만6000여명 사망
7월 초 찾은 보팔의 구시가지는 계속 무언가를 부수고 세우는 개발도상국의 활기로 들썩였다. 유니언카바이드 공장에서 약 2.5㎞ 떨어진 주택가 한복판에 있는 보팔 추모 박물관(Remember Bhopal Museum)을 3일 오전 찾았다. 분홍색, 보라색, 녹색으로 칠해진 집들 사이에 영어로 쓴 검은색 간판이 걸려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벽부터 천장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는 ‘어둠의 방’이 관람객을 맞는다. 참사가 일어난 밤의 경험을 재현한 방이다. 당시를 기록한 사진 10여점과 수화기 20여대가 벽면을 둘러싸고 걸려 있었다. 벽에 걸린 수화기를 집어들자 참사가 일어난 밤의 상황을 증언하는 생존자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민간이 만든 추모 박물관
“그날 자정쯤 집주인이 ‘가스가 퍼지고 있다’며 저를 깨웠어요. 문을 열자 사람들이 다 도망가라고, 도망가라고 외치고 있었어요. 눈이 아프게 시려와 구토를 하면서 도망갔어요. 다음날 거리마다 시신 더미가 보였어요. 사람들이 집 안에서 죽어 집집마다 일고여덟명씩 시신이 나왔어요.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군지 모르니까 시신을 마구 섞어서 쌓아놓았어요.”
생존자의 구술 기록은 1명당 2개의 수화기가 있어 힌디어, 영어 통역 녹음도 들을 수 있었다. 보팔 추모 박물관은 1층 2개, 2층 2개 등 모두 4개의 방으로 구성돼 있고 각방에 피해자의 유품들을 전시했다. 보팔 추모 박물관은 참사 당일의 상황을 설명하는 ‘어둠의 방’, 참사 이후 환경오염 등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아이들의 방’, 유니언카바이드와 인도 정부의 무책임을 고발하는 ‘배상의 방’, 인도 정부의 책임과 지원을 촉구하며 만모한 싱 총리를 만나러 보팔부터 델리까지 약 900㎞ 거리를 도보 행진한 2006년 3월의 기록이 담긴 ‘운동의 방’으로 이뤄졌다.
“수십년 절규 눈감고…자격 없다”
생존자들, 정부 제안 거부하고 민간 모금
30주기에 보팔 추모 박물관 개관
보팔 추모 박물관은 생존자 단체 모임 ‘보팔 추모위원회(Remember Bhopal Trust)’가 주도해 참사 30주년인 2014년 12월2일 개관했다. 2004년 참사 생존자들이 안경, 옷, 라이터 등 희생자들의 소지품을 모은 행사 ‘야드 이 하사(참사의 기억)’로 시작해 생존자가 직접 추모공간까지 만들었다.
이 공간은 정부 지원이 전혀 없이, 민간 기부와 모금만으로 만들어졌다. 마디아프라데시주 정부는 2009년 공장 현장에 광장, 박물관, 기록보관소, 연구시설 등을 포함한 추모공원을 조성하는 계획을 제안했지만 정작 생존자 단체들이 거부했다.
보팔 추모위원회 선임이사인 수레슈 멜레투코키 관장(56)은 “정부가 만드는 추모공원에는 생존자의 이야기가 담겨 있지 않다”며 “정부는 지난 30여년 동안 피해자의 편에 서지 않았다. 정부는 보팔 참사를 추모할 도덕적 권리가 없다”고 했다.
멜레투코키는 보팔 참사 당시 마디아프라데시주 동부에 있는 자발푸르에서 공부하던 대학생이었다. 참사 수습을 돕기 위해 자원봉사를 왔던 그는 결국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보팔에서 직장까지 얻었다. “좋지 않은 기억은 자꾸 잊으려 하는 것이 인간 본성입니다. 그렇게 기억은 사라지니까 잊지 않으려면 박물관이 필요했어요. 또 다른 보팔이 생기지 않게 하려고 이 박물관을 만들었습니다. 기억을 지킬 수 있는 최고의 적임자는 생존자들입니다. 인도 정부나 미국 정부가 아닙니다.”
이 박물관의 큐레이터 샤프린 칸(26)은 생존자 단체 ‘정보와 행동을 위한 보팔 모임’의 활동가로 10대 시절부터 보팔 참사 피해자들을 위해 싸워왔다. 칸은 “정부가 만든다는 추모공원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이냐”며 “공원을 만든다고 해도 이익이 피해자에게 돌아가지 않고 정부 자신의 배만 불린다. 정부가 추모공원을 통해 자신의 거짓말을 공식적인 정보로 알릴 수도 있다”고 했다.
참사 생존자들은 정부의 책임을 묻기 위해 1989년, 2006년, 2008년 3차례 보팔에서 델리까지 걸어가는 도보 행진 시위를 했다. 당시 16세이던 칸은 2008년 5월 시위에 참여했다. 9세 남동생 아르와즈, 7세 여동생 야스민도 그와 함께 걸었다. 보팔을 출발해 델리에 도착하는 데 37일이 걸렸지만 싱 총리는 이들을 만나주지 않았다. 칸은 동생들과 함께 총리 공관 앞에서 몸에 쇠사슬을 묶는 시위를 했다. 그는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우리가 정부의 포로가 된 기분이었다”고 했다.
■ 참사의 흔적을 갖고 태어나는 아이들
유니언카바이드 공장에서 3㎞ 정도 떨어진 샤히드 나가르 콜로니에 사는 제라 자베드(12)는 뇌성마비를 가진 몸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누스라드 자하(38)에게 ‘친가리 재활센터’는 간절한 희망이다. 처음엔 혼자 일어서지도 못했던 자베드가 3세 때부터 9년 동안 친가리 재활센터에 다닌 끝에 혼자 복도를 걸을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자하는 “친가리가 없었으면 우리 아이가 어떻게 좋아질 수 있었겠냐”며 “정부는 아이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고 했다.
보팔 초윽시 나가르의 대로변에 있는 친가리 재활센터는 보팔 참사가 남긴 환경오염으로 몸이 망가진 아이들을 위한 치료시설이자 교육시설이다. 이곳에 등록된 900여명은 물리치료, 언어치료, 특수교육을 무료로 받는다. 유치원(3~6세), 초등교육(7~10세), 중등교육(11~14세)으로 반이 나뉘어 있고 나이와 상관없이 심한 장애를 지닌 아이들을 위한 ‘돌봄반’을 따로 운영한다. 치료에 약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신체운동을 통한 재활교육을 한다.
5일 오후 찾은 특수교육 교실에서는 오후반 수업이 한창이었다. 원 모양의 책상은 아이들이 앉은 자리마다 빨강, 파랑, 초록 등으로 색깔이 구분돼 칠해져 있었다. 아이마다 다른 장애에 맞춤형 교육을 하기 위한 것이다. 공장 근처에 사는 수라즈 말람 싱(18)도 뇌성마비를 갖고 태어났다. 머리를 가누지 못한 채 환하게 웃는 그는 10대 후반의 나이지만 10대 초반의 어린이처럼 보였다. 특수교육 교사 수랴브라카슈 싱(31)은 공책에 알파벳 ‘U’를 점선으로 수십개 그려 수라즈 말람에게 줬다. 수라즈 말람은 바닥에 앉아 굽은 손가락에 연필을 끼우고 점선을 따라 알파벳을 그렸다. 수랴브라카슈 교사는 “아이들이 어서 완치돼 센터를 나가게 하는 것이 꿈”이라며 “센터가 좁기 때문에 이들이 나가야 다른 아이들도 치료받을 수 있다”고 했다.
물리치료실에서는 수와디 코디(9)가 바닥에 누워 다리를 기구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코디는 태어나면서부터 다리가 휘어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코디가 사용하는 기구에는 1~3㎏ 무게의 추가 달려 있어 도르래 원리로 무릎 아래를 들어올려 다리를 곧게 펴준다. 언어치료실에서는 언어치료사 아마르 지트 싱(24)이 다운증후군 환아 이프라 칸(4)의 입 주변을 문지르면서 “비! 비! 비!”라고 토해내듯 발음을 유도하고 있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턱, 혀, 입술을 움직이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아마르 지트는 하루에 1명당 15~20분씩 20여명의 아이들을 돌보고 부모가 집에서도 할 수 있도록 언어치료술을 알려준다. 그는 “일반 병원에서 언어치료를 받으려면 한 달에 최소 7000루피(약 11만5000원)를 내야 하는데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벅찬 돈”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보팔 참사의 영향으로 3세대까지 장애아가 태어나고 있다”며 “정부가 제대로 배상금을 지급했다면 이곳에 아이들이 900명이나 등록돼 있을 이유가 없다”고 했다.
오염 물질 그대로 땅에 묻혔는데
상수도 보급 늦어져 지하수 마셔
공장 주변서 3대째 장애아 태어나
보팔 주민들은 장애아들이 계속 태어나는 이유로 공장 주변 물을 지목한다. 유니언카바이드가 가스에 오염된 물질을 땅에 파묻어 공장 주변 지하수가 오염됐다는 것이다. 가난한 주민들은 가장 월세가 싼 공장 주변에서 살아가며 지하수를 썼다. 주민의 거듭된 요구에도 마디아프라데시주 정부는 2010년까지 상수도관을 보급하지 않았다. 지하수에서 이상한 맛과 냄새가 났지만, 주민들은 상수도관 보급이 끝난 2012년까지 지하수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생존자 단체, 무료 재활센터 운영
가난한 아이들 치료하고 가르쳐
친가리 재활센터는 생존자 단체 ‘보팔 참사로 희생된 문구류 여공 조합’ 대표인 라시다 비(60)와 참파 데비 슈크라(66)가 2004년 미국에서 ‘골드만 환경상’을 수상하고 받은 상금 12만5000달러로 2006년 건립했다.
슈크라는 참사 당일을 똑똑히 기억한다. 탈것이 없던 그의 가족은 필사적으로 달렸지만 멀리 도망치지 못했다. 남편이 가스를 마시고 가장 먼저 쓰러졌다. 슈크라는 정신을 잃을 때까지 아이들의 얼굴을 물로 닦아줬다. 날이 밝아올 때 의사가 슈크라의 가족을 트럭에 싣고 병원으로 데려갔다. 슈크라는 “눈동자에 주사를 놓는 것처럼 시렸고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온몸이 불에 타는 것처럼 아팠다”고 했다.
그날 밤 넘어지면서 배를 다친 남편의 몸에서는 소변이 24시간 계속 나왔다. 소변주머니를 달고 살던 남편은 1990년 방광암으로 숨졌다. 큰아들은 폐가 손상돼 피를 토하며 살다 1992년 농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둘째 아들은 온몸에 수포가 생겨 1996년 숨졌다. 뇌손상을 입은 셋째 아들도 2013년에 끝내 잃었다. 두 딸이 살아남았지만 둘째 딸(40)은 몸이 마비돼 지금도 걷지 못한다.
보팔 가스참사는 가스 없이 슈크라의 가족을 천천히 질식시켰다. 슈크라는 친가리 재활센터에 오는 아이들에게서 새 인생을 찾고 있다.
비는 말했다. “고통받는 가족을 보면서 아이들을 치료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어요. 많은 아이들이 가난 때문에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습니다. 저의 몸은 죽어도 영혼은 살아 있습니다. 걷지 못하던 아이가 일어서는 모습에서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는 것을 봐요. 아이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다면 저는 기쁩니다.”
■ 정부는 눈감고 법은 면죄부…“우린 아무도 믿지 않는다”
친가리 재활센터에서 600m 정도 떨어진 JP나가르 주택가 한복판에는 ‘삼바브나 트러스트 클리닉’이 있다. 1996년 9월 만들어진 이곳은 보팔 참사로 병을 앓는 환자들에게 무료 의료를 제공한다. 환자 3만4000여명이 등록돼 있다. 8000㎡ 규모에 40개의 진료실을 갖췄고 정원에서는 100여종의 약초를 재배하고 있다. 치료 방법은 서양 의학과 인도 전통 의학을 병행한다.
이날은 하늘에서 종일 장대비가 쏟아졌다. 이른 오전이었는데도 병원 로비에서 주민들이 진료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팔이 10개 달린 악마 인형 옆에서 주민들이 담소를 나눴다. 벽면에는 ‘허락 없이 진료실에 들어가지 마세요’ ‘불편한 점이 있으면 행정실에 말씀하세요’ ‘빤(씹는 담배)을 하지 마세요’ 등 주의사항이 적혀 있었다.
삼바브나 트러스트 클리닉을 운영하는 사티나스 사랑기 원장(64)은 참사 이전에는 보팔과 아무런 인연이 없었다. 참사 당시 사랑기는 우타르프라데시주에 있는 바라나시 힌두대학에서 금속공학 박사과정 중이었다. 우연히 보팔 참사를 라디오 방송에서 듣고 자원봉사를 하러 온 인연이 그를 보팔에 붙잡아두었다. 사랑기는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수천명의 사람들이 길거리에 널려 있는 것을 봤다. 물을 마셔도 되는지, 공기를 마셔도 되는지, 치료는 어디서 받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보팔에 머무는 일주일이 보름이 되고, 보름이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일 년이 됐다”고 말했다.
‘삼바브나 트러스트 클리닉’ 원장
“정부 돈으로 운영하고 싶지 않아”
만성 재정 적자에도 지원 안 받아
이 병원의 모든 치료 역시 무료다. 다른 생존자 단체들처럼 삼바브나 트러스트 클리닉도 만성적인 재정 적자에 시달리고 있지만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는다. 사랑기는 “유니언카바이드는 범죄집단이고 정부는 그 범죄집단을 돕는 집단”이라며 “그들의 돈으로 클리닉을 운영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삼바브나 트러스트 클리닉이 만들어진 후 20여년 동안 통원한 압둘 칼람(60)의 집은 유니언카바이드 공장 지대 인근 나와브 콜로니에 있었다. 보팔에서 월세가 가장 싼 그의 집은 2평이 되지 않았고 문이 없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칼람이 이불 위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평생 동안 빤을 씹어 치아가 붉게 변색돼 있었다.
칼람은 보팔 참사 당시 들이마신 가스 때문에 폐가 손상돼 평생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됐다. 대화 도중 용변을 보고 돌아온 칼람은 막 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숨을 헐떡거렸다. 그는 보팔 참사로 아버지를 잃었다. 그의 아버지는 가스를 마신 뒤 눈이 멀었고 한 달 만에 숨졌다. 칼람은 원래 인도 정부가 참사 지원 병원으로 지정한 자와할랄 네루 병원에 다녔지만 병세가 호전되지 않아 삼바브나 트러스트 클리닉을 택했다. 그는 “건강 때문에 일도 하지 못하고 목숨만 부지하고 있다. 만약 삼바브나가 끝나면 내 삶도 끝난다. 신이 알아서 하실 것”이라고 했다. ‘삼바브나’는 힌디어로 ‘가능성’이라는 뜻이다.
■ 면책된 기업
4일 오전 삼바브나 트러스트 클리닉에서 만난 라츠나 딩그라(40)는 생존자 단체 ‘정보와 행동을 위한 보팔 모임’을 만든 상임활동가다. 델리에 살던 그는 1990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 미시간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그가 2000년 9월 경영대를 졸업하고 한 경영 컨설팅 회사에 취업해 만난 첫 고객이 바로 ‘다우케미컬’이었다. 딩그라는 “다우케미컬과 사회적 책임에 대해 대화했지만 그들이 사람의 마음에는 관심이 없고 이익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그는 2002년 12월 회사를 그만두고 보팔에 와 보팔 참사 피해자를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업체 측, 정부에 배상금 지불 땐
모든 민형사상 책임 안 묻기로”
인도 대법원, 1989년 협상 승인
피해자들 합의 파기 요구도 기각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딩그라는 생존자 단체 모임 ICJB에서 국제 협력과 법적 조치를 담당하고 있다. ICJB에는 세계적인 환경단체 ‘그린피스’를 포함해 78개 단체가 가입돼 있다. 생존자들은 참사 직후 단체를 조직하고 유니언카바이드와 인도 정부에 피해 보상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지만 인도 대법원은 생존자들의 눈물을 저버렸다. 인도 대법원은 1989년 2월 유니언카바이드가 인도 정부에 4억7000만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하면 모든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협상을 승인했다. ICJB는 피해자들과 함께 1989년 합의를 파기해달라고 1991년과 2006년 2차례 인도 대법원에 요구했지만 기각당했다. 다만 1991년 판결에서 참사 책임자에 대한 형사재판을 할 수 있다는 대법원 결정을 끌어냈다. 2010년 9월 보팔 지방법원은 워런 앤더슨 유니언카바이드 회장과 인도 현지법인 경영진에게 ‘과실치사’를 인정해 징역 2년을 선고했다. 미국에 있던 앤더슨 회장은 인도 법원의 출석 요구에 불응하다 2014년 미국 플로리다 해변의 요양원에서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피해자들은 멈추지 않았다. 2001년 다우케미컬이 유니언카바이드를 인수하자 ICJB가 인도 내무부를 통해 다우케미컬을 2014년부터 2016년까지 5차례 형사고발해 소송이 진행 중이다. 다우케미컬은 이미 1989년 합의로 배상이 끝났고, 유니언카바이드와는 다른 기업이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는 입장이다.
딩그라는 “다우케미컬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홍보하면서 그들의 환경 범죄를 감췄다”고 했다. “다우케미컬은 자신이 유니언카바이드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유니언카바이드가 미국 텍사스에서 일으킨 석면 피해에 대해서는 보상했습니다. 보팔에 대해서만 책임지지 않는 것은 ‘환경 인종주의’라 할 수 있어요. 정부도 피해자의 절반 정도는 낮은 카스트의 천민들이고 이슬람교도들이기 때문에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보팔 가스참사를 추모하는 최초의 기념비 ‘모자상’은 1985년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조각가 루스 워터맨이 유니언카바이드 공장 외곽에 세운 것이다. 이 모자상은 어머니가 자식을 끌어안고 있는 모습의 석상으로 하단에는 보팔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기원하는 내용이 힌디어와 영어로 쓰였다. 모자상 근처에서 ‘보팔 참사 남녀 희생자 연합회’의 대표 나와브 칸(71)과 나스란(35)을 만났다. 이들은 보팔 참사를 알리는 영상을 제작해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매년 12월3일에는 보팔 참사를 잊지 않도록 추모집회를 연다. 칸은 “보팔에서 일어난 일이 어디라도 또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기억해야 한다”며 “참사의 영향이 아이들에게 계속 나타나기 때문에 잊어버릴 수도 없다”고 말했다.
■ 도망치는 정부
유니언카바이드 공장 지대에 들어가려면 마디아프라데시주 정부의 허락이 필요했다. 1시간의 제한이 있는 출입허가서 1장을 받는 데 3일이 걸렸다. 담당 공무원은 자신의 서명이 있는 허가서를 내주며 ‘촬영 절대 금지’를 당부했다.
7일 오전 찾아간 유니언카바이드 공장 지대는 34년이 지난 후에도 참사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다우케미컬은 보팔에서 맹독 테러를 그만둬야 한다’ ‘유니언카바이드는 숨지 못한다. 우리가 끝까지 책임을 물을 것이다’ 등 담장에 적혀 있는 영어와 힌디어 낙서가 보팔 주민의 분노를 보여줬다. 담장 안쪽 오솔길을 따라 50m 정도 들어가자 검문소에 소총을 든 군인이 서 있었다.
공장 건물은 참사 당시 모습 그대로 남겨져 숲으로 변해 있었다. 앙상한 속을 드러낸 공장은 벌겋게 녹이 슬어 마치 거대한 괴물의 뼈처럼 보였다. 가스가 누출됐다는 탱크의 굴뚝도 덩굴이 덮었다. 정부가 한 것은 지하에 묻혀 있던 가스 탱크 3대를 폐기해 지상으로 꺼내놓은 것이 전부였다. 공장 주변 31만1608㎡의 땅이 오염 지역으로 알려졌다.
마디아프라데시주 정부는 보팔 참사를 수습하기 위해 1985년 8월 보팔 가스참사 재활국(Bhopal Gas Tragedy Relief and Rehabilitation)을 창설했다. 이들은 1995년부터 1999년까지 배상금 신청자 102만9519명 중 피해를 인정받은 57만4391명에게 총 3억664만루피(약 50억5000만원)를 1차 지급했다고 발표했다. 또 2013년부터 지금까지 피해 인정 6만3824명 중 사망 100만루피(약 1600만원), 영구장애 50만루피(약 800만원), 일시장애 10만루피(약 160만원), 암 환자 2만루피(약 30만원)씩 2차 지급했다는 것이 인도 정부의 주장이다.
정부 ‘두 차례 배상금 지급’ 발표
희생자들 “인원 제대로 파악 안 해”
“수천명 죽었는데 1인당 약 40만원”
형사고발 등 피해자들 투쟁은 계속
피해자들의 말은 다르다. 보팔 참사 남녀 희생자 연합회의 활동가 셰자디 비(63)는 1989년 배상금 합의에 대해 “정부는 피해자 수가 얼마나 되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합의했다”며 “외국에서는 일하다 손가락이 잘려도 수억루피를 준다는데 유니언카바이드는 수천명을 죽이고도 대부분 1인당 2만5000루피(약 40만원)밖에 주지 않았다. 인도 정부는 인도인을 위한 것이고 보팔 정부는 보팔인을 위한 것인데 외국 회사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한국인도 정부를 믿지 말아라. 절대 정부를 믿으면 안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경향신문은 한국 외교부를 통해 마디아프라데시주 정부 당국에 미리 협조를 약속받은 뒤 보팔 가스참사 재활국을 방문했지만 취재일정 나흘 내내 국장을 만날 수 없었다. 다른 직원들은 협조 공문을 받기는 했지만 답변할 권한이 없다며 자리를 피했다. 보팔 가스참사 재활국 부국장은 ‘오프 더 레코드’를 수차례 강조한 뒤 “정부 지침에 따라 4만t의 오염토를 공장 지하에 매립했다”며 “오염 지역 정화에 대해서는 대법원이 결정하는 대로 정부가 움직일 것”이라고 했다.
이날 오후 6시쯤 보팔 가스참사 재활국의 업무시간이 끝나고서야 차량을 타고 나타난 국장은 취재기자를 발견하자 즉시 다시 차량에 올라타 떠나버렸다. 뒤이어 나타난 직원이 “국장이 아주 바쁘다”고 변명했다. 불이 꺼지는 건물을 떠나면서 보팔 참사 피해자들이 마디아프라데시주 총리를 만나기 위해 2011년 12월 기찻길을 12시간 동안 막는 시위를 벌여야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딩그라는 말했다. “정부는 기업이 인도에 투자하길 원했기 때문에 피해자의 목소리를 무시했습니다. 공무원들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돕지 않고 자신의 뒷주머니만 챙겼고요. 보팔 참사는 34년 전에 발생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살아남은 이들이 스스로 나서서 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보팔을 떠나던 7일 오전 유니언카바이드 공장 앞 2차선 도로 건너편에 서로 다닥다닥 붙여 지은 수십채의 판잣집이 보였다. 중년 여성들과 아이들이 수도관에서 나오는 물을 플라스틱 페인트 통에 담고 있었다. 아이들은 옷감을 가득 담은 대야에 들어가 첨벙첨벙 물장구를 치고 빨래를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물을 눈으로 봐서는 안전한지 확인할 수 없었다. 길가에서 놀던 아이가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물을 마셨다.
정원식·김서영(모바일팀), 김형규(토요판팀), 허진무(사회부) 기자
■ 취재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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