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반성’에 시효는 없다
한때는 분단의 상징, 1989년 이후엔 통일의 상징인 독일 브란덴부르크 문은 수도 베를린을 대표하는 조형물이다. 2014년 두 번째 월드컵 우승 당시 독일 국민들은 이 문 앞 대로에 몰려나와 환호했다. 육중한 조형미를 자랑하는 독일 연방의회 건물, 그리고 황금빛 승리의 여신상으로 유명한 전승기념탑, 시민들의 드넓은 휴식처인 티어가르텐 공원, 미국과 영국을 포함한 주요국 대사관들도 근처에 몰려 있다.
그리고 도시의 중심인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엔 검은 비석들이 거대한 무덤처럼 펼쳐져 있다. 지난 6월22일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비(홀로코스트 기념비)’를 찾았다. 가로(95㎝)와 세로(2.38m)가 같고 높이가 다른 2711개의 비석들이 1만9073㎡의 부지에 늘어선 채 파도가 일렁이는 듯한 굴곡을 만들어냈다. 이 공간은 중심부를 향해 들어갈수록 바닥이 낮아지면서 비석의 높이가 높아지는 구조로 돼 있다. 가장 깊숙한 곳에서는 비석의 높이가 4m를 넘어간다. 이날 오전 베를린을 적신 가는 비를 맞으며 비석들 사이의 통로를 걸으니 크고 어두운 무덤 속을 통과하는 기분이 들었다.
축구장 두 개를 합친 것보다 넓은 추모시설이 수도 한복판에 있는 셈이다. 홀로코스트 기념비는 피해자들 입장에서는 추모의 공간이지만, 독일인들 입장에서는 과거 범죄행위에 대한 대규모 전시장이다. 일본이나 한국 우익이라면 설계단계에서부터 ‘자학사관의 산물’이라며 맹렬히 반대했을 게 분명한 시설물이다.
홀로코스트 추모비를 관리하는 학살 유대인 추모재단의 프로젝트 매니저 아담 케르펠 프로니우스는 “독일 국가 차원의 홀로코스트 추모시설을 베를린의 중심부에 둔다는 아이디어를 제안한 것은 지식인과 시민들이었다”면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추모와 반성의 중심에 독일 시민사회가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 “추모는 의무”…국가 아닌 시민의 이름으로 ‘과거 반성’
시민은 힘이 세다 : 독일 사회의 홀로코스트 추모 방식
1988년 언론인 레아 로스와 역사학자 에버하르트 예켈은 ‘퍼스펙티브 베를린’이라는 단체를 만들고 기념물 조성을 위한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퍼스펙티브 베를린은 1만명의 서명을 받았는데, 그중에는 빌리 브란트, 귄터 그라스, 크리스타 볼프 같은 명사들이 포함됐다. 이들 지식인과 시민사회의 지속적인 노력 끝에 1999년 독일 의회는 연방정부 차원에서 기념비와 이를 관리할 재단을 세운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홀로코스트 기념비’
수도 베를린 중심에 2711개 비석
‘비석들만으론 참상 전달 못한다’
정부가 원안에 없던 정보관 제안
편지·문헌 등 구체적 정보 전달
홀로코스트 기념비가 들어선 곳은 분단 시절 베를린 장벽을 사이에 두고 있던 무인지대였다. 나치 시절 히틀러의 벙커와 나치 주요 권력기관들의 본부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통독 후 이 땅은 자연스럽게 통일 독일 정부의 소유가 됐고, 국가 소유였던 덕에 부지 매입에 큰돈을 쓰지 않고 홀로코스트 기념비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럼에도 홀로코스트 추모비 건립에는 2700만유로가 투입됐다.
홀로코스트 기념비 디자인은 두 차례 공모를 거쳐 미국 건축가 피터 아이젠만의 작품이 최종적으로 선정됐다. 현재 홀로코스트 기념비의 형태는 아이젠만의 원안과 완전히 일치하진 않는다. 홀로코스트 기념비는 지상의 기념비 구역과 지하의 정보관으로 구성돼 있는데 애초 아이젠만의 원안에는 정보관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런 설명이 없는 비석들만으로는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전달할 수 없다는 정부 판단에 따라 정보관이 설치됐다. 대신 원안을 훼손하지 않도록 정보관은 기념비 부지 한쪽 귀퉁이의 지하에 자리 잡았다.
정보관은 유럽에서 학살된 유대인들의 숫자, 수용소의 위치, 유대인들이 남긴 편지와 문헌 자료, 사진 등을 이용해 구체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그중 인상적인 것은 ‘이름들의 방’이라는 명칭이 붙은 공간이었다. 이 공간에 들어서면 어두운 벽면에 흰색 글자로 이름이 표시되고 해당 인물의 삶을 간략하게 요약해주는 내레이션이 흘러 나온다. 홀로코스트 희생자 가운데 절반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이름들의 방’은 희생자들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수집해 희생자들을 고유하고도 개별적인 존재로 호명하려는 시도다. 유대인 희생자는 모두 600만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름들의 방’과 같은 방식으로 600만명의 이름과 약사를 낭독하려면 6년7개월27일이 걸린다. 프로니우스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반성은 독일이 독일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라면서 “그렇기 때문에 홀로코스트에 대한 반성에는 끝이 있을 수 없다. 세대를 거듭해 지속해야 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테러의 지형학’
게슈타포·나치 친위대 본부 자리
가해자 만행 다룬 상설 전시공간
홀로코스트 추모비와 함께 베를린 최대의 과거사 관련 시설 가운데 하나인 ‘테러의 지형학’ 또한 시민사회의 제안과 노력으로 건립됐다. 홀로코스트 추모비가 희생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테러의 지형학’은 가해자에게 초점을 맞춘다.
‘테러의 지형학’은 홀로코스트 추모비에서 도보로 약 15분쯤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테러의 지형학’은 과거 게슈타포와 나치 친위대(SS) 본부가 있던 곳이다. 시민사회는 1980년대부터 이곳에 과거사 관련 시설을 건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5년 역사학자 라인하르트 뤼루프의 주도로 결성된 ‘게슈타포 구역 조사를 위한 이니셔티브’는 이 구역에 대한 조사와 발굴 작업을 거쳐 1987년 베를린 탄생 750주년을 맞아 ‘테러의 지형학’이라는 이름으로 나치의 만행을 다룬 전시회를 열었고, 그 뒤 현재와 같은 상설 전시공간으로 발전했다.
■ 과거사 반성의 동력은 시민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빌레펠트는 베를린에서 고속열차로 약 3시간 거리에 있는 인구 30여만명의 도시다. 이곳 기차역 앞에도 유대인 추모비가 있다. 1998년 8월16일에 건립된 이 추모비는 두 개의 금속 조형물이 나란히 서 있는 형태다. 추모비에는 빌레펠트역에서 출발하는 기차에 강제로 실려 추방된 이 지역 유대인 1840명의 이름과 함께 ‘모든 학살된 사람에게는 이름이 있다(Jeder Ermordete hat einen Namen)’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성경> 시편 78장 6절의 구절도 히브리어와 독일어로 함께 새겨져 있다. “뒤이어 태어날 후손에게도 대대로 알리라고 명령하셨다.”
지난 6월23일 오후 빌레펠트 기차역 앞에서 만난 라파엘라 쿨라(54)는 “이 추모비는 독일 정부나 빌레펠트 시청이 아니라 빌레펠트 시민들의 손에 의해 건립됐다”고 말했다. 그는 파트너인 프리츠 본마이어(56)와 함께 정기적으로 이 추모비 앞에서 나치에 의해 추방된 유대인들의 이름을 낭독하는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쿨라와 본마이어는 과거사 추모 및 반성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빌레펠트 시민들이다. 10대 시절 아우슈비츠의 존재를 알고 충격을 받았다는 두 사람은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위한 추모와 생존자 지원 활동을 하고 있다.
2015년에는 폴란드 동부 지역의 작은 마을로 유대인 학살 수용소가 있었던 소비보르에서 ‘작전명 라인하르트’라는 이름의 추모 전시회를 열었다. ‘라인하르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최종 해결책’이라는 이름으로 유럽 유대인들을 체계적으로 학살했던 작전이다. 소비보르를 포함해 폴란드 내 3개 수용소에서 약 200만명이 가스실에서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윗세대가 안 했다면 우리라도”
지역마다 시민이 주도하는 ‘반성’
강제노동 피해자 발굴·지원하고
추방된 유대인이 살던 집 방문해
낭독회 여는 등 매년 추모 행사
본마이어는 “추모는 의무”라고 말했다. “우리의 조부모와 부모가 하지 않았다면 우리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는 나치 시절에 살았던 사람도 아니고 직접적인 가해자도 아니지만 독일에 의해서 이름도, 무덤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을 추모하는 것은 독일인의 의무입니다.” 쿨라는 “우리는 본업 이외에 각자 시간을 내서 이 일을 하고 있다”며 “인간이 다른 인간과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는 데서 의미를 찾는다”고 말했다.
같은 날 쿨라와 본마이어의 집에서 만난 볼프강 헤어초그(73)는 강제노동 피해자 발굴과 지원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엔지니어로 일하다 은퇴한 후 이 지역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나치 정권의 판사였고, 어머니는 나치 당원이었으며, 누나는 히틀러 유겐트(청소년단) 멤버였다. 그는 1960년대 학생운동을 하면서 과거사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됐다.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던 해 태어난 헤어초그는 “빌레펠트는 강제노동 피해자 추모를 가장 먼저 시작한 도시들 중 하나”라면서 “강제노동 피해자 추모는 홀로코스트 피해자 추모보다 훨씬 늦게 시작됐다”고 말했다. 빌레펠트의 경우 1939~1945년에 동유럽,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등에서 끌려온 1만4700여명의 강제노동자가 존재했다.
독일 사회가 강제노동자 피해에 주목하게 된 것은 1990년대 이후다. 강제노동 피해자의 대다수가 동유럽 출신이어서 소련 붕괴 이전에는 피해자들을 접촉하는 게 쉽지 않았던 데다 홀로코스트에 비해 강제노동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허약했기 때문이다. 헤어초그는 “강제노동은 훨씬 더 일상적이었다. 끌려온 노동자가 농가에도, 빵집에도, 정육점에도 있었다. 종전에 임박했을 즈음에는 빌레펠트 노동자의 4분의 1이 강제노동자였다”고 말했다. 쿨라는 “어릴 때 어른들이 강제노동자들에 대해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어른들은 ‘우리는 잘 대해줬다’고 했지만 그들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독일에서는 지역마다 시민들이 자발적인 추모 행사를 기획하고 운영한다. 최근 베를린에서는 ‘현장의 기념비’라는 프로젝트가 주목받고 있다. ‘현장의 기념비’는 아마추어 사진작가이자 역사 해설사로 일하는 마리 롤쇼벤(46)이 2년 전 화가이자 역사가인 어머니 야니 피치와 함께 시작한 프로젝트다. 두 사람은 베를린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살던 집을 주말 이틀 동안 일반인에게 개방해 낭독회, 강연, 사진 또는 문헌 자료 전시, 공연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추모 행사를 벌였다. 자신의 집에 살다 추방된 사람들이 있는지, 그들이 그후 어떻게 됐는지 궁금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2018년에는 30명이 참가했고 누적인원 1000명이 방문했다. 추모 행사는 해마다 5월 초에 주말 이틀 동안 열린다.
‘현장의 기념비’ 프로젝트는 애초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유대인 집 개방’ 프로젝트를 가져와 베를린에 적용한 것이다. 지난 6월25일 만난 롤쇼벤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건물에서 추방된 유대인이 있는지 찾아보니 모두 9명이었다”면서 “나치 시절 작성된 베를린 주민 인명록과 유대인 등록부 등 각종 아카이브 자료를 활용해 그들의 행적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올해는 열 살 때 가족과 함께 아르헨티나로 추방됐던 92세 할아버지가 어릴 때 살던 베를린의 아파트를 방문한 게 인상적이었어요. 무척 기뻐했죠. 추방됐던 사람의 가족이나 후손들에게는 그 자체로 기쁜 일이고 자기 집을 개방한 사람들에게는 ‘나라면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했을까’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 집 앞에, 일터 옆에…박물관 아닌 일상 속에서 기억하다
■ 누구도 학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종전 뒤 정부는 나치 사면법 통과
과거사 청산보다 망각으로 기울어
독일이 처음부터 과거사 추모와 반성에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한국인들의 뇌리에는 빌리 브란트 당시 서독 총리가 1970년 폴란드 유대인 학살 추모비에 헌화한 후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사진의 이미지가 강하게 박혀 있지만, 과거사 청산과 관련해 독일 사회가 이견 없는 국가적 합의에 도달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독일 정부는 1949년 나치 부역자들에 대한 사면법을 통과시켜 나치 부역자들의 공직 복귀를 허용하는 등 과거 ‘청산’보다는 과거 ‘망각’에 기우는 모습을 보였다.
이 같은 움직임에 제동을 거는 힘은 시민사회에서 나왔다.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 시절 판사 생활을 했던 로타르 크레시그는 독일 복음주의 교단의 지원을 받아 1958년 ‘평화를 위한 화해 서비스 행동(Action Reconciliation Service for Peace·ARSP)’이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ARSP는 독일이 전쟁범죄에 대해 죄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6월25일 포츠담에서 만난 우타 게를란트 린덴슈트라세 추모관 관장은 “ARSP는 해마다 청소년 자원봉사자들을 독일이 점령했던 지역에 보내 봉사하게 했다”며 “여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나중에 독일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에 오르면서 과거사 추모와 반성에 유리한 조건이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전후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68혁명 세대도 기성세대의 가치관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나치 시절 독일의 전쟁범죄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1970년 빌리 브란트의 사죄 이후 나온 여론조사 결과에선 응답자의 48%가 브란트의 행동이 ‘지나쳤다’고 봤다.
1980년대에는 보수성향 역사학자 에른스트 놀테가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을 소련의 위협에 대한 정당방위로 해석한 글을 발표하고 뒤이어 위르겐 하버마스가 반론을 제기하면서 격렬한 역사 논쟁이 벌어졌다.
시민은 나치와 독일군 나눠 인식
나치 친위대에만 학살 책임 묻다
1995년 ‘독일군 전시회’로 각성
독일군의 기획·집행 증거 나와
지식인들의 역사 논쟁에서는 독일의 책임을 강조한 자유주의-좌파 진영이 승리했지만 독일인들은 여전히 나치와 나머지 독일 전체를 분리해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러한 인식이 뒤집히게 된 것은 ‘독일군 전시회’ 이후다.
‘독일군 전시회’는 ‘절멸 전쟁: 1941년부터 1944년까지의 독일군 범죄’라는 주제로 함부르크 사회조사연구소가 1995년 3월 함부르크와 2001년 11월 베를린에서 개최한 두 번의 전시회를 가리킨다. 독일 주요 도시에서 열린 이 전시회를 다녀간 관람객이 도합 120만명에 이른다.
지금의 국가적 합의 이끌어낸 건
지식인들의 논쟁보다 시민의 힘
그 이전까지 독일인들은 유대인 학살의 기획과 집행 책임의 절대치가 나치 친위대에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 전시는 독일 정규군이 유대인, 전쟁포로, 민간인을 상대로 한 절멸 전쟁을 기획하고 집행했다는 증거를 제시해 독일 사회에 커다란 충격파를 던졌다. 게를란트 관장은 “독일인들은 독일 정규군은 깨끗하다고 생각했지만 전시회를 통해 그렇지 않다는 증거들이 나왔다”며 “독일군은 누군가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였기 때문에 그 어떤 독일인도 학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 추모의 장소는 박물관이 아니라 일상
거리 바닥에 희생자 ‘걸림돌’ 박고
가로등 표지판에 반성의 그림 새겨
유대인에만 초점 머물렀던 추모
동성애자 등 소수자 포함하며 확장
1992년 예술가 귄터 뎀니히가 시작한 ‘걸림돌 프로젝트’는 동판에 가로·세로 10㎝ 크기의 돌을 붙인 ‘걸림돌’을 나치 시절 학살된 사람들(유대인, 집시, 동성애자, 반사회적이라고 낙인찍힌 종교인, 장애인 등)이 살았던 집 앞 보도에 심는 작업이다. 동판에는 학살된 사람의 이름, 출생 연도, 사망장소 등의 정보가 표시돼 있다. 베를린에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추모의 공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대형 추모시설과 박물관이 많지만 뎀니히는 진정한 추모는 일상 속에 있다고 믿는다. 그는 ‘걸림돌 프로젝트’ 20주년이었던 2012년 한 언론 인터뷰에서 “베를린의 대형 홀로코스트 추모시설은 추상적이다. 그런 곳을 방문하려면 작심을 해야 한다”면서 “ ‘걸림돌’은 다르다. 그것들은 당신의 문 앞에, 당신의 발 앞에, 당신 바로 앞에 존재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지난 6월26일 오전 베르노이어가 지하철역을 나가 브뤼넨가 쪽으로 접어들자 바닥에 구릿빛 걸림돌 두 개가 나란히 박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엘제 루프트 여기 살다”라고 적힌 걸림돌에는 그가 1861년에 태어나 1942년 8월17일 체코의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로 추방돼 28일 사망했다고 기록돼 있었다. “에르나 헤어만 여기서 살고 일하다”라고 적힌 걸림돌에는 그가 1898년에 태어나 1943년 5월18일 체코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로 추방돼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다고 기록돼 있었다. 베를린에는 이 같은 걸림돌 7618개가 나치 폭력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걸림돌은 독일은 물론 유럽 전역으로 확산됐다. 2016년 기준으로 독일과 유럽에는 6만여개의 걸림돌이 있다.
특정 지구 전체를 추모와 반성의 장소로 만들어놓은 기획도 있다. 베를린에서는 시민들의 일상생활 공간 곳곳에 추모와 반성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지난 6월25일 오후 베를린 템펠호프 쇠네베르크 구청(통독 전 서베를린 시청) 앞 거리를 걷다보니 특이한 그림이 그려진 표지판이 가로등 곳곳에 걸려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로 50㎝, 세로 70㎝ 크기의 이 표지판에는 서류철, 망치, 흑판, 담뱃갑, 시계, 소시지 등 다양한 모양의 그림이 강렬한 원색으로 그려져 있다. 베를린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예술가 레나타 슈티트와 프리더 쉬녹이 1993년에 만든 이 공공조형물의 그림들은 각기 이 지역에 살던 유대인들이 나치 정권에 의해 박탈당한 권리를 뜻한다.
예를 들어 서류철은 “반유대주의 활동을 다루는 모든 문서는 파기해야 한다”는 규제를 가리킨다. 망치는 “유대인은 독립적인 장인으로 활동할 수 없다”는 규제를, 담뱃갑은 “유대인에게는 담배를 팔지 않는다”는 규제를 의미한다. 시계는 “유대인은 오후 8시 이후에는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규제를 뜻한다. 표지판의 수는 모두 80개다. 나치는 유대인들을 추방하기에 앞서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많이 살았던 이 지역에 유대인들을 강제 수용하고 가장 기본적인 시민권조차 제한했다.
■ 소수자를 향해 확장하는 추모와 반성
나치 폭력에 희생된 이들은 유대인만이 아니다. 집시, 동성애자, 정신질환자 등 사회적 소수자들도 추방과 학살을 경험했다. 주로 유대인에 초점을 맞췄던 독일 사회의 추모와 반성도 이들 소수자를 포함하는 방향으로 꾸준히 확장됐다. 대표적인 것이 홀로코스트 추모비와 인접한 티어가르텐에 자리 잡은 동성애자 추모비(2008년 건립)와 집시 추모비(2012년 건립), 포츠담 광장 인근의 안락사 프로그램 희생자 추모비(2013년 건립)다.
나치 독일에서 동성 간 키스는 형법 175조에 따라 기소와 수감 대상이었다. 수천명의 동성애자들이 집단수용소로 추방됐고 배고픔과 학대, 질병 등으로 사망했다. 동성애자 피해자들은 오랫동안 국가의 추모 대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동성애를 금지하는 형법 175조가 1969년까지 존속했기 때문이다.
동성애자 추모비는 맞은편에 있는 홀로코스트 추모비의 비석 하나를 떼놓은 듯한 모양이다. 추모비의 한쪽 측면에는 작은 유리창이 달려 있다. 유리창을 통해 나치의 동성애자 박해와 학살을 주제로 한 예술가들의 시각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집시 추모비는 연방의회 건물 맞은편에 있는 티어가르텐에 있다. 부지는 원형으로 조성돼 있으며 도심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즈넉한 분위기가 감도는 게 특징이다. 원형 조형물 안에 물이 채워져 있다. 나치는 집시를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절멸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고 1938년 이후 이들을 집단수용소로 보냈다. 1945년 전쟁이 끝날 즈음까지 희생된 집시들의 숫자는 50만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락사 프로그램 희생자 추모비는 티어가르텐 남쪽에 있다. 본부 건물의 주소(티어가르텐가 4)를 따 ‘작전명 T4’라는 명칭이 붙은 안락사 프로그램은 정신적·육체적 장애를 안고 있는 환자와 사회적 또는 인종적으로 부적합하다고 판단된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대량 학살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나치 의사들은 1941년까지 7만명을 학살했다. 1945년에는 굶주림과 약물 과다복용으로 9만명이 더 희생됐다. 안락사 프로그램에 의한 희생자는 도합 30만명으로 추정된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전용 공연장 부지 일부는 과거 T4 본부가 있던 곳이다.
독일은 인종주의에 기반한 극우적 정치관이 대중과 영합했을 때 얼마나 큰 재난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세계 어느 나라보다 절실하게 경험한 나라다. 그 반성이 오늘날 가해자로서의 역사를 기억하고 끊임없이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독일의 정체성을 만들었다. 그러나 나치를 직접 겪은 이들이 점차 사라지는 한편 이민자들에 대한 불만과 불안이 자라나고 있다는 것은 불안 요소다. 지난해 1월 극우성향 포퓰리스트 정당인 독일을위한대안(AfD) 소속 정치인 비외른 회케는 베를린 홀로코스트 추모비를 두고 “독일인은 수치의 기념비를 수도 한복판에 놔두는 유일한 국민”이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AfD는 그해 9월 총선에서 12.6%를 득표해 창당 4년 만에 연방의회 제3당으로 약진했다. 베를린의 반유대주의연구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반유대주의 사건이 한 해 전에 비해 61% 증가했다.
독일의 추모와 반성은 분명 ‘선택적’이다. 베를린 슈톨퍼슈타인(걸림돌) 사무국에서 일하는 죄렌 슈나이더는 “과거사 반성에서 독일을 칭송하는 이들이 많지만 독일은 20세기 초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대량 학살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으며 당연히 피해자를 추모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독일이 전쟁 중 독일군 위안부 피해를 조사하고 반성하는 데 소극적이라고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피해자 추모관을 도쿄 신주쿠 한복판에 두는 일본을, 베트남 민간인 학살 기념관을 서울에 두는 한국을 상상할 수 있을까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독일은 과거사 반성의 모범이라고 부르는 데 아무런 부족함도 없어 보였다.
① 더 많은 민주주의 : 브레이비크 테러 이후 노르웨이
② 같은 참사, 다른 대응 : 쓰나미 덮친 인도네시아와 스리랑카
③ 기억하고 싸운다 :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독재 역사 청산
④ 정부가 못하면 민간이 : 인도 보팔 참사 당사자들의 생존투쟁
⑤ 시민은 힘이 세다 : 독일 사회의 홀로코스트 추모 방식
⑥ 어떻게 기억하고 무엇을 배울 것인가 : 취재기자들이 본 세계와 한국
정원식·김서영(모바일팀), 김형규(토요판팀), 허진무(사회부) 기자
■ 취재 지원
한국언론진흥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