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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와 ‘재기억’

입력 2018.08.07 20:59

수정 2018.08.07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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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년 1월의 무섭도록 추운 어느 날, 흑인 여성 노예 마거릿 가너가 4명의 아이들과 함께 켄터키 노예 농장을 도망쳐 나왔다. 당시 가너는 임신 중이었다. 노예사냥꾼과 보안관은 즉각 도주 노예들을 뒤쫓았고, 불과 하루 만에 가너와 아이들이 숨은 농가를 둘러쌌다. 가너는 가장 어리고 사랑스러운 두살배기 막내딸의 목을 직접 베었다. 노예로 돌아가게 두느니, 죽음으로 해방시키겠다는 섬찟한 의지의 발로였다. 다른 아이들도 모두 죽이고 자살하려던 가너는 추격자 그룹에 의해 제지돼 수감됐다.

[백승찬의 우회도로]참사와 ‘재기억’

이 이야기는 훗날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토니 모리슨의 대표작 <빌러비드>의 소재가 됐다. 사건 이후 십수년이 흘러, 소설 속 시이드는 딸 덴버와 함께 124번지에서 살고 있다. 124번지는 ‘원혼 깃든 집’이다. 쳐다보기만 해도 거울이 산산조각 나고, 케이크에는 누군지 모를 조그만 손자국이 찍힌다. 두 아들은 124번지를 견디다 못해 진작 도망쳤다. 시이드는 죽은 아기의 영혼이 집에 깃들었다고 믿고 묵묵히 견딘다. 동양에도 서양에도 원혼에는 저마다 이유가 있다. 시이드는 말한다. “죽었다가 살아오는 건 뭐든지 아픈 법이지.”

<빌러비드>는 복잡한 소설이다. 과거와 현재,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섞인다. 흑인 노예들의 끔찍한 역사는 여러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재구성된다. 그 기억 중 몇몇은 사실과 다르겠지만, 사실보다 과장된 기억은 피해자들의 고통을 역설적으로 증거한다. 여기서 모리슨은 ‘재기억’(rememory)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시이드는 덴버에게 재기억에 대해 설명한다.

“집이 불타서 터만 남으면, 집은 사라져버리지만, 그 장소는 -그 장소의 잔상은-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무르거든. 단순히 내 기억 속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저밖에, 세상 속에 정말로 남아 있단 말이야. (…) 내가 생각을 하지 않아도, 심지어 내가 죽어버려도 내가 한 일들, 내가 아는 일들, 내가 목격한 장면들은 여전히 저 바깥에 존재한단 말이야.”

<빌러비드> 속 ‘재기억’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 길을 가다가 환청이나 환각을 겪으면 자신의 머릿속을 의심하기보단, 다른 사람의 재기억을 우연히 만났다고 생각해야 한다. 과거지사라고 방심해서는 안된다. 누군가의 강렬한 경험이 사라지지 않은 채 머물며 공동체에 전파된다. 그것이 재기억이다.

재기억은 양가적이다. 죽은 아기의 원혼이 깃든 124번지나 임신한 시이드의 몸을 과학 실습의 대상으로 여긴 ‘학교 선생’에 대한 재기억은 파괴적이다. 재기억은 개인의 영역을 넘기에, 이런 재기억은 공동체에 외상을 남긴다. 반면 재기억은 개인과 역사의 진실을 백주에 드러내기도 한다.

4명의 경향신문 기자가 ‘참사 그후’ 시리즈에서 돌아본 세계는 재기억과의 투쟁 중이었다. 대규모 자연재해, 참사, 학살의 기억이 없는 곳은 없었으나, 대응 방식은 지역과 문화에 따라 달랐다. 2011년 7월22일, 극우 테러리스트가 정확히 겨냥한 총에 69명의 노르웨이 청소년들이 목숨을 잃었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테러리스트의 ‘신상’을 털거나, 그가 속한 정당에 책임을 묻는 대신,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아무리 민주화된 사회라도 돌출하는 문제적 개인은 있게 마련이지만, 노르웨이 사회는 “최선의 대안은 민주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합의했다.

인도네시아 반다아체에선 2004년 쓰나미로 12만명 이상이 사상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하나같이 ‘유가족’이 됐다. 하지만 반다아체에는 지붕 위로 올라간 어선, 벌판 위의 모스크같이 그날의 기억을 되살리는 끔찍한 구조물들이 그대로 남겨져 있다. “쓰나미는 아체의 역사”라는 것이 그들의 변이었다. 독재 시절을 미화하는 이들을 추적해 망신 주는 칠레의 ‘푸나’ 시위대, 40여년간 시위를 이어온 아르헨티나의 ‘5월 광장 어머니회’는 어떤가. 수도 한복판에 홀로코스트 기념비를 세운 독일도 놀랍다.

해외의 추모와 기억 움직임에서 한국사회를 반추했다. 백혈병을 앓던 23살 딸이 아버지가 모는 택시 뒷자리에서 숨진 것은 2007년이었다. 아버지 황상기씨는 딸을 비롯한 반도체 노동자들을 위해 굴지의 대기업 삼성과 싸웠고, 11년 만에 중재안을 받아들이기 직전이다. KTX 해고 승무원이 정규직으로 복직하기 위해서는 12년이 필요했다. 그 사이 여러 사람들의 가슴이 찢어졌고, 누군가는 죽었다.

아직 남은 죽음들이 많다. 또 한 명 해고 노동자의 죽음을 맞아, 염천의 덕수궁 대한문 앞에는 다시 쌍용차 분향소가 차려졌다. 4년이 지나도록 침몰 원인조차 밝히지 못한 세월호는 말할 것도 없다.

이 죽음의 물결 앞에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추모할 것인가. 한국사회는 ‘원혼 깃든 집’이 될 것인가. ‘재기억’이 우리 사회를 파괴하도록 둘 것인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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