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기억하고 무엇을 배울 것인가 : 취재기자들이 본 세계와 한국
■ 수도 한복판에 자리한 과거사 반성 시설…‘책임 회피·유족 폄훼…’ 한국 부끄러워
독일·노르웨이
2010년 ‘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라는 제목의 기획을 진행한 적이 있다. 사회학자와 역사학자가 현대사의 주요 사건이 벌어진 현장을 답사한 후 그 사건의 현재적 의미를 짚은 글을 보내오면, 취재기자들이 르포 형식의 관련 기사를 덧붙이는 방식이었다.
기획 초반에 ‘날림’ 공사가 초래한 몇몇 대형 참사들의 흔적을 짚어볼 일이 있었다.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참사,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가 대표적이다.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 생존자를 인터뷰하고 삼풍백화점 희생자 위령비를 답사하는 것까지는 순조로웠다. 문제는 성수대교 붕괴 참사 희생자 위령비였다. 성수대교 참사 희생자 위령비는 접근은커녕 위치조차 불분명했다. 지도를 내장한 스마트폰이 상용화되기 이전 성수대교 북단에 있다는 정보만으로 위령비를 찾기는 힘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2005년 성수대교 북단과 강변북로를 잇는 도로가 개통되면서 위령비는 섬처럼 갇혀 버렸고, 걸어서 위령비로 가는 길은 끊긴 상태였다. 잘 보이지도 않고 찾아가기도 힘든 위령비로 누구를 기리고 어떤 교훈을 얻는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베를린은 달랐다. 독일의 전쟁범죄를 반성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시설이 접근성 좋은 도심에 있었다.
예컨대 홀로코스트 기념비는 베를린의 심장부인 브란덴부르크 문과 독일 시민들의 휴식처인 티어가르텐 공원 바로 옆에 있다.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다. 나치 박해를 받은 동성애자와 집시를 추모하는 기념비도 티어가르텐 안에 있다. 나치 안락사 프로그램에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는 기념비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장 바로 뒤에 있다.
2011년 극우 테러리스트의 테러로 77명이 숨진 노르웨이는 베를린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놀라웠다. 노르웨이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복이 아니라) 더 많은 민주주의와 관용’이라는 자세를 취해 당시 전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 사실 당시 노르웨이 정부의 대응에는 아쉬운 점이 많았다.
대부분 10대였던 69명이 총격으로 사망한 우퇴위아섬은 오슬로에서 불과 30㎞ 떨어져 있다. 그러나 노르웨이 경찰 진압부대는 섬에 들어가는 데 1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 1시간 동안 테러리스트는 비무장 청소년들을 상대로 유유히 ‘인간 사냥’을 벌였다. 그럼에도 지난 6월 오슬로에서 만난 노르웨이 사람들 중 당시 정부를 비난하는 이들은 없었다. 당시 10대였던 딸을 잃은 어머니조차도 그랬다.
왜 그랬을까. 답은 복잡하지 않다. 노르웨이 총리실은 ‘청와대는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책임 회피를 시도하지 않았다. 당연히 보고 시간을 조작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극우 세력이 유족들을 벌레에 비유하는 파렴치한 일도 없었다. 한국 사회는 생각할수록 부끄럽다.
■ 일상 곳곳 쓰나미 기억하기 위한 흔적들…우리 사회는 어떤 ‘추모 공간’ 갖고 있나
인도네시아·스리랑카
“진정한 추모란 무엇일까요?” 지난 5월 인도네시아 반다아체에서 만난 이들에게 물었다. 2004년 이 지역을 덮친 인도양 쓰나미로 가족과 이웃, 친구를 잃은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은 질문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국어 ‘추모’와 딱 맞아떨어지는 인도네시아어를 찾기 힘들다고 했다.
대신 그들은 “아체에 쓰나미가 왔던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알려야 한다”고 답했다. 반다아체 곳곳에 있는 쓰나미 잔해와 그곳을 찾아와 둘러보는 사람들을 보니, 떠올리기만 해도 곧장 눈물이 흐르는 비극의 흔적을 일상에서 빈번히 마주하며 기억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들이 전해준 말속에서 ‘기억하다’는 곧 ‘잊지 않다’와 같았다. 떠난 이들에게 있어 ‘잊혀지지 않았다’는 내가 한때 당신들과 이 땅을 밟았다는 위안의 끈일 테고, 남겨진 자들에게 ‘잊지 않겠다’는 당신들의 죽음을 무위로 돌리지 않겠다는 약속과 다짐이었다. 반다아체에서 만난 이들에게 ‘기억’은 단지 과거를 정리해 기록하고 나누는 데에 그치지 않고 남겨진 미래를 대하는 자세에 가까웠다. 죽은 이의 원혼 달래기가 아닌 남겨진 나를 회복하고 우리의 앞날을 정립하는 일을 뜻했다. 즉 기억이 곧 추모였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을 위한 기념관·박물관·추모비·공원은 한 사회가 특정한 참사를 대하는 수준과 태도를 보여주는 표상이다. 자연재해로 인한 죽음조차 정치적 갈등의 여파를 피해갈 수 없는 현실에서, ‘추모 공간’이 세워졌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회에서 참사에 대한 공감이나 합의가 이뤄졌다는 의미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쓰나미 뮤지엄을 비롯해 아르헨티나 국립기억자료보관소·기억공원, 칠레의 기억과인권박물관, 독일의 ‘걸림돌 프로젝트’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에서 벌어진 참사엔 과연 어떠한 ‘추모 공간’이 만들어졌는지, 있다면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되돌아본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굵직한 사건들이 있지만 이에 대응하는 공간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죽음 뒤에 으레 따르는 편가르기와 소모적인 정치 싸움이 벌어지는 사이, 회복은 멀어지고 무수히 상처받았던 경험이 먼저 떠오른다. 피로감은 덤이다. 매번 ‘다시는 이 같은 일이 되풀이돼서는 안된다’고는 하지만, 몇 개월, 몇 년이 지나면 또다시 반복되곤 하는 참사가 부지기수다. 일찌감치 기억했다면,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널리 알렸더라면 애꿎은 희생이 줄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자꾸 남는다.
“쓰나미는 아체의 역사” “이곳에 쓰나미가 왔던 사실을 기억하고 알려야 한다”는 말에는 아체를 복구하고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는 희망과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를 보며 ‘기억하는 이들은 힘이 세다’는 확신을 받았다. 한데 모인 기억의 힘을 믿는 한, 또 다른 참사가 왔을 때 더 강하게 대응하고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 희생자 수천명 이름 한 명 한 명 모두 기록…법망 피한 독재 범죄자들…전두환 떠올려
아르헨티나·칠레
“살아온 내용 자체가 아니라 기억하고 말한 것만이 우리의 인생이 된다.”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지성이자 노벨상 수상 작가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자서전에 쓴 말이다. 한 사람의 인생뿐 아니라 국가의 역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떤 과거를 기억하고 강조하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미래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군부독재 시절 벌어진 국가폭력의 역사를 기억하려는 칠레와 아르헨티나 사회의 노력은 그런 점에서 배울 점이 많았다. 희생자를 추모하는 방식부터 달랐다. 죽거나 실종된 수천명의 이름을 모두 확인할 수 있는 기념비가 여러 곳에 있었다. 커다란 숫자 안에 뭉뚱그리지 않고 한 명 한 명을 존중하는 느낌이 들었다. 국가가 ‘인간 이하’로 취급하고 물건처럼 없애려 했던 이들의 정체성과 인격이 잘 드러나도록 추모시설과 기념물들은 정교하고 세심하게 디자인돼 있었다.
납치·고문·살인이 벌어지던 장소들은 그대로 보존돼 ‘기억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인상적인 것은 그곳에서 벌어진 끔찍한 일을 낱낱이 기록하면서도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지향하는 태도였다. 칠레 ‘기억과 인권 박물관’의 프란시스코 에스테베즈 관장은 “군부에 살해당한 이들에겐 이 사회를 평등하게 만들려는 꿈과 이상이 있었다. 그들의 용감하고 이타적인 삶을 기억하는 게 그들의 비참한 죽음을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말했다. 희생자의 남은 가족들 역시 혈육이 못다 한 꿈을 이루기 위해 각종 사회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기억 공간은 국가가 아니라 지역주민과 생존자 단체 등 시민사회의 주도로 설립·유지되고 있었다. 인터뷰한 이들은 모두 군사독재 대신 ‘군사·민간독재’라는 말을 썼다. 군부에 가담한 관료·지식인·전문가 집단은 물론 소극적으로 동조한 이들까지도 철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는 취지에서다. 30만부 넘게 팔려 아르헨티나에서 손꼽히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실종자 진상규명 국가위원회’의 조사보고서 <눈까 마스>(‘더 이상은 안돼!’라는 뜻)는 지금도 시내 서점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다.
동병상련이랄까, 공분을 느끼는 지점도 있었다. 광주 시민을 학살한 ‘내란 수괴’ 전두환이 정치적 사면으로 사실상 아무 처벌 없이 잘 살고 있는 것처럼,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범죄자들도 법망을 피해가고 있었다. ‘자꾸 과거를 보지 말고 미래로 나가자’는 정치권과 보수언론의 여론 ‘물타기’도 비슷했다. 그럼에도 희생자 가족들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없이 이 나라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화해와 용서보다 진실과 정의가 우선”이라는 입장이 확고했다. 그들에게서 세월호 유족들이 겹쳐 보였다. 참사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침몰 원인조차 정확히 규명되지 않은 세월호의 진실을 향해 남은 엄마·아빠들은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다.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세계적으로 과거사 청산이 잘된 사례로 꼽힌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에도 두 나라에서 군경에 의한 민간인 의문사가 꾸준히 발생했다는 사실은 비교적 덜 알려졌다. 살해당한 이들은 대부분 마푸체 등 원주민이었다. 같은 국가폭력도 피해자의 피부색과 인종에 따라 사회적 반응이 다르게 나타나는, ‘차별과 소외’의 현장에 대해선 또 다른 움직임이 나타날 것이다.
■ 가족 잃고도 정부에 외면받는 소외된 이들…‘반복되는 산업재해’ 우리는 끊을 수 있을까
인도
‘보팔 참사’ 생존자들을 취재하면서 당황할 때가 많았다. 1984년 12월2일 유니언카바이드 공장의 가스 누출 사고로 수십만명이 죽거나 다쳤는데, 적잖은 생존자가 정부나 기업의 책임에 대한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들에게 ‘인권’이란 낯선 개념이었다. 참사란 자연의 법칙처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가족을 잃고도 대부분 2만5000루피(약 40만원) 정도밖에 받지 못했다.
삶이 그런 것처럼 죽음도 평등하지 않았다. 보팔 참사 희생자 대부분이 낮은 카스트거나 이슬람 신자였다. 카스트 차별이 남아 있고 힌두교가 대부분인 인도 사회는 이들의 죽음을 무시했다. 보팔 참사 문제가 불거지면 외국 기업이 인도에 투자를 꺼릴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을 것이다. 참사 이후 34년이 지났지만 생존자들은 가족을 앗아간 유니언카바이드 공장 주변을 떠나지 못했다. 공장 주변이 보팔에서 가장 월세가 싼 곳이기 때문이다. 인도 정부가 묻어버린 오염토 4만t 위에서 지하수를 마시고 산 생존자의 아이들은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보팔에서 참사는 진행 중이었다.
산업재해는 개발도상국만의 일이 아니다. 인권의 의미를 조금은 더 알고 있는 21세기 한국에도 여전히 일터에서 이름 없이 죽어가는 노동자들이 있다. 기억을 멀리 되돌아볼 필요도 없다. 지난해 5월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는 32t급 타워크레인이 노동자 휴게실을 덮치면서 6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을 입었다. 지난해 8월 STX조선해양 진해조선소에서는 선박 탱크가 폭발해 4명이 숨졌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가.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결국 한국 사회가 노동자의 죽음을 일상적 풍경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산 사람을 위해서라도 이들의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사회 구조가 낳은 억울한 죽음은 정의에 대한 구성원의 믿음을 파괴한다. 억울한 죽음에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사회는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주지 못한다. 카스트에 눌린 사람들처럼, 삶을 그저 묵묵히 견뎌야 하는 것으로 만들고 생존 이상의 행복을 기대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런 사회는 경제적으로 번영하더라도 구성원의 마음이 황폐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벌어지는 산업재해의 원인을 철저히 분석하고, 책임자를 무겁게 처벌하고, 가족에게 신속히 배상하고, 재발 방지책을 성실하게 준비하자. 추모는 이승에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며 급성골수성 백혈병에 걸린 황유미씨는 2007년 3월6일 아버지 황상기씨가 운전하는 택시 뒷좌석에서 23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삼성전자 반도체나 LCD공장에서 일하다 직업병으로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 노동자는 118명이다. 황유미씨 죽음 이후 11년이 지난 지난달 24일 삼성전자는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가 내놓을 보상 관련 중재안을 무조건 수용한다는 중재합의서에 서명했다. 황상기씨는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며 눈물을 쏟았다. 보팔에서 만난 참사 생존자들의 입에서 수없이 나온 말이었다.
< 시리즈 끝 >
■ 취재 지원 한국언론진흥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