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보상금 수령했다고 화해로 간주한 민주화보상법 일부 위헌”
‘과거사 사건, 민법상 소멸시효 적용’도 일부 위헌…재심 청구 가능
양승태 대법원이 내린 과거사 판결 53건은 “취소할 수 없다” 결정
헌법재판관들이 30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양승태 대법원의 3대 과거사 판결에 대한 선고를 하기 위해 자리에 앉아 있다. 이석우 기자
박정희 정권 시절 긴급조치 피해자라도 민주화운동 관련 보상금을 받았다면 재판상 화해로 간주해 국가로부터 별도의 배상을 받지 못하도록 한 법 조항이 일부 위헌이라고 헌법재판소가 결정했다.
고문 수사나 간첩조작 등 과거사 사건 피해자의 국가배상 청구권에 일반적인 민법상 소멸시효를 적용하는 것도 헌법에 어긋난다고 했다.
그러나 헌재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시절 대법원의 과거사 판결을 취소할 수는 없다고 결정했다. ‘재판소원’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따라 피해자들이 재심을 청구할 길이 열리긴 했지만, 대법원이 헌재 취지를 받아들여야만 구제를 받을 수 있다.
30일 헌재는 재판관 7 대 2 의견으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민주화보상법) 제18조 2항이 헌법에 일부 위반된다고 선고했다. 이 조항은 민주화운동을 하다 긴급조치 위반 등으로 형사처벌을 받은 피해자가 보상금 지급에 동의하면 그 피해에 대해 재판상 화해가 성립된 것으로 본다. 대법원은 이 조항에 근거해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배상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아왔다. 그러나 헌재는 보상금을 받았더라도 ‘정신적 손해’에 대해서는 국가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헌재는 또 불법행위의 피해자가 ‘손해 및 가해자를 인식하게 된 때’로부터 3년 이내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도록 하면서 수십년 전 발생한 과거사 사건의 피해자들에 대한 예외를 두지 않은 민법 제166조 1항과 제766조 2항에 대해서도 재판관 6 대 3 의견으로 일부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한국전쟁 전후에 불법적으로 이뤄진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과 권위주의 정부 시절 헌정질서 파괴행위 등 공권력 행사로 인해 발생한 사망·상해·실종사건 피해자들은 즉각적으로 손해배상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에 일반적인 민법상 소멸시효를 적용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다만 헌재는 긴급조치는 위헌이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한 것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국가배상청구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 등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시절 대법원의 과거사 판결 53건은 취소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재판관 전원이 법원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은 제한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고 했지만 그중 7명은 해당 대법원 판결이 취소할 만한 것은 아니라고 봤다. 김이수·안창호 재판관 두 명만 취소해야 한다는 반대의견을 냈다.
‘김명수 대법원’이 헌재의 취지를 받아들여 선제적으로 재심 개시를 할 수도 있지만 가능성은 미지수다. 이날 헌재 결정을 대법원 권한 침해로 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헌재 결정의 취지에 맞게 정부가 피해자 배상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고문 수사 피해자들에게 배상 범위 폭넓게 인정
“정신적 손해에 대한 국가배상 청구 금지, 과도한 제한”
김이수·안창호, 결정문 17쪽 중 11쪽 걸쳐 “판결 취소”
헌법재판소는 30일 내린 결정에서 1970~1980년대 긴급조치와 고문 수사·간첩조작 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배상 청구권을 다소 폭넓게 인정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시절 대법원이 국가의 편을 들어 피해자들에게 패소 판결한 것과 대조된다. 대법원의 과거사 판결 취소에 대해서는 “취소할 수 없다”는 게 재판관 다수 의견이었지만, 김이수·안창호 재판관은 전체 결정문 17쪽 중 11쪽에 걸쳐 강하게 “취소해야 한다”는 반대의견을 냈다.
헌재는 피해자들이 민주화운동 관련 보상금을 받았다면 재판상 ‘화해’로 간주해 국가로부터 별도의 배상을 받지 못하도록 한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민주화보상법) 제18조 2항이 피해자들의 국가배상 청구권을 침해한다고 봤다. 헌법 제29조 1항은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손해를 받은 경우 국민이 국가에 대한 적극적·소극적(재산적)·정신적 손해에 대한 정당한 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헌재는 1999년 민주화보상법이 제정될 때의 취지에 주목했다. 자신의 생명·신체에 대한 위험을 감수하고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함으로써 민주헌정질서 확립에 기여한 사람과 유족에 대해 국가가 보상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 속에서 민주화보상법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헌재는 “민주화보상법 시행령의 보상금 산정기준을 보면 보상금은 적극적·소극적 손해만을 의미한다”며 “적극적·소극적 손해에 대한 보상금 지급에 동의했다고 정신적 손해에 대한 국가배상 청구마저 금지하는 것은 과도한 제한일 뿐만 아니라 민주화보상법의 입법목적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했다.
국가배상 청구권의 소멸시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민법 제166조 1항과 제766조 2항, 국가재정법 제96조 2항 등에 따르면 불법행위가 있던 날부터 5년,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간 행사하지 않으면 국가배상 청구권은 시효 소멸한다. 헌재는 공권력 피해자들과 일반적인 경우를 동일선상에 놓아서는 안된다고 했다. “국가가 조직적 관여를 통해 불법적으로 민간인을 집단 희생시키거나 장기간의 불법구금·고문 등에 의한 허위자백으로 유죄판결을 하고 사후에도 조작·은폐를 통해 진상규명을 저해했음에도 불구하고 불법행위 시점을 소멸시효의 기산점으로 삼는 것은 피해자와 가해자 보호의 균형을 도모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헌재는 형사보상금 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 안에 손해배상 청구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기존 대법원 입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헌재는 “한국전쟁 전후 이뤄진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을 안 날로부터 3년,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과 조작의혹사건은 재심판결 확정을 안 날로부터 3년으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다만 이 같은 법 조항을 근거로 한 대법원의 과거사 판결 53건은 취소할 수 없다고 했다. 헌재가 위헌으로 결정한 법을 적용한 법원 판결에 한해서는 헌법소원을 제기할 수 있다면서도 과거사 판결은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53건 중에는 2015년 긴급조치 피해자들의 국가배상 청구소송에서 대법원이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라며 피해자들을 패소시킨 판결도 포함돼 있다.
다수인 7명의 재판관은 이 대법원 판결들을 취소할 필요성 자체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대법원 판결들이 헌재의 위헌결정에 반해 합헌임을 전제로 긴급조치를 적용한 바가 없다”며 “대법원 판결들에서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되지 않은 것은 긴급조치가 합헌이기 때문이 아니라 위헌임에도 국가배상책임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대법원의 해석론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반면 김이수·안창호 재판관은 재판소원 금지의 예외로 보고 취소해야 한다는 반대의견을 제시했다. 이 판결들이 대법원의 기존 입장과 모순되며, 긴급조치 1·9호가 위헌이라는 2013년 3월 헌재 결정과도 배치된다는 이유였다.
두 재판관은 “대법원은 종래 입법행위라 하더라도 ‘그 내용이 헌법의 문언에 명백히 위배됨에도 불구하고 굳이 당해 입법을 한 것과 같은 특수한 경우’에는 국가배상책임이 성립한다고 했으나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로서 국민 전체에 대하여 정치적 책임을 질 뿐이라고 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이어 “만약 (대법원 판결이) 긴급조치가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여서 국가배상책임의 성립 여부에 관한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라면 이는 국민의 기본권 침해와 관련된 국가작용은 사법적 심사에서 면제될 수 없다는 헌재 결정의 기속력에 위배된다”고 했다.
대법원의 최종판결을 헌법재판소의 위헌심사 대상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대법원은 이를 인정할 경우 헌재가 대법원의 상위 기관이 돼 사실상 4심제가 된다며 반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