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의 코카서스 3국 <상> 조지아
러시아 표기 ‘그루지야’가 더 친숙
와인 발상지이자 세계적 생산지
크고 화려한 정교회 성당에 감탄
‘노아의 방주’가 지나간 흔적 간직
만년설 덮인 산·드넓은 평야 공존
몽환적 분위기서 ‘무공해 힐링’

시그나기는 절벽 위에 자리 잡은 아담한 마을이다. 붉은 지붕의 고풍스러운 건물이 늘어선 골목을 지나 성벽길에 오르면 드넓은 평야와 캅카스산맥이 바라다보인다.
조지아는 주변국인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와 함께 ‘캅카스(코카서스) 3국’으로 불린다. 조금 덜 알려진 나라지만, 와인의 발상지이자 세계적인 생산지로 유명하다. 1990년대 구소련 해체와 함께 독립했고, 한국인에겐 러시아어식 표기인 ‘그루지야’로 좀 더 친숙하다. 기후 조건이 좋은 데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해 최근 여행객이 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과의 국경인 라고데키에서 조지아 여정을 시작했다. ‘백만송이 장미’의 원곡을 들으며 이 노래의 모델인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의 고향 ‘시그나기’로 향하는 길. 포도가 주렁주렁 익어가고 작은 와인가게들이 눈에 띈다. 일반 가정집에서도 독자적인 와이너리를 꾸린다는 와인의 나라다운 풍경이다.

800m 절벽 위 요새로 만들어진 시그나기는 멀리서도 한눈에 ‘저기구나!’ 딱 감이 왔다. 붉은 지붕이 모여 있는 게 요새라기보다는 ‘사랑의 마을’처럼 예쁘다. 어귀에 들어서자 고풍스러운 거리가 이어졌다. 양털로 짠 소품들을 파는 노점, 작은 레스토랑들이 있는 골목은 동화 속 풍경처럼 평온하고 낭만적이다. 시청사를 지나면 글자가 빼곡한 벽이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군에 강제징집돼 죽은 이들의 이름을 새겨놓은 ‘전사자의 벽’이다. 전쟁의 비극을 기억하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공간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성벽길에 올랐다. 눈앞에 펼쳐지는 탁 트인 평야 너머 저 멀리 캅카스산맥이 보였다.
■ 조지아 역사와 함께한 성당들
조지아는 정교회 국가다. 기독교의 역사만큼 유서 깊은 교회가 많다. 조지아의 수많은 성당들은 역사의 흔적을 층층이 안고 있다. 시그나기에서 2㎞가량 떨어진 ‘보드베 교회’는 4세기 조지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 니노가 잠들어 있는 성지다. 캅카스산맥을 배경 삼아 자연에 폭 안긴 듯한 이곳은 작은 시골 교회처럼 소박했다. 하지만 긴 시간을 보내온 만큼 부침의 흔적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있는 조지아는 교통·교역의 중심지였다. 이런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외부세력의 공격이 끊이지 않았고, 그 상흔은 문화유산 곳곳에 그대로 남아 있다.
수도 트빌리시 인근 므츠헤타시에 있는 ‘즈바리 수도원’ 역시 성 니노의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니노가 조지아 왕을 개종시킨 후 바위산 꼭대기에 나무십자가를 세웠고 이곳에 수도원이 들어섰다. 즈바리 수도원은 십자가 수도원이란 뜻이다. 안에 들어서면 나무로 만든 십자가가 중앙에 있다. 꾸밈이 거의 없이 투박한 내부는 그래서 더 신성하다.
즈바리 수도원에서 내려다보이는 므츠헤타에는 조지아에서 두 번째로 큰 ‘스베티츠호벨리 성당’이 있다. 이곳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당시 입은 옷(로브)이 보관돼 있다고 한다. 예수가 숨진 후 한 조지아인이 그 옷을 가져왔다고 전해진다. 그의 누이가 옷을 끌어안으며 큰 슬픔에 빠져 죽었는데, 옷을 품 안에서 빼낼 수 없어 함께 묻었다. 그녀가 묻힌 자리에서 자란 나무로 성 니노가 7개의 기둥을 만들어 세웠고, 특히 하늘로 솟구쳐 올랐던 7번째 기둥에서는 모든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액체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그렇게 지어진 조지아 최초의 성당이 스베티츠호벨리 성당이다. 이름은 ‘둥근 기둥’을 뜻하는 ‘스베티’와 ‘생명을 준다’ ‘사람을 살린다’는 뜻의 ‘츠호벨리’에서 유래됐다.

시그나기 마을에서는 양털로 직접 만든 다양한 공예품을 볼 수 있다.
정교회 지도자가 머무는 곳인 만큼 앞선 성당들과 달리 웅장하며, 화려한 내부엔 대형 프레스코화와 성화가 그려져 있다. 하지만 프레스코화는 상당 부분 훼손돼 있었다. 이곳 역시 페르시아, 티무르 등 외세의 침입을 비켜가지 못한 것이다.
성당 주변에선 오감이 즐겁다.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인 므츠헤타 거리를 거닐면서 형형색색의 다양한 소품을 보고 만지며, 색다른 먹거리를 맛보는 재미가 있다.
스베티츠호벨리가 조지아에서 두 번째로 큰 성당이라면 가장 큰 곳은 어딜까. 바로 트빌리시에 있는 ‘사메바(성 삼위일체) 대성당’이다. 비교적 근래에 세워진 이 성당은 황금색 돔 지붕과 황금 십자가 등 남다른 위용을 자랑한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평일 오전이었음에도 주민들은 성당을 찾았다. 함부로 접근할 수 없도록 줄이 쳐진 공간 안쪽에서 사제들이 전례 중이었고, 그 바깥에서 신자들이 엄숙하게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 사람들에게 종교생활은 일상인 듯했다.
그런 조지아인들이 일생 동안 꼭 방문한다는 영적인 성지가 있다. 그중 하나가 ‘다비드 가레자 수도원’이다. 트빌리시에서 60㎞ 정도 떨어진 거리지만 황량한 대지를 가로지르는 비포장길이기 때문에 2시간쯤 걸린다. 메마른 땅에 간혹 보이는 작은 호수는 소금호수라 생명을 키워낼 수 없다고 한다. 드넓은 초원지대의 완만한 능선을 따라가면 대지 위 우뚝한 수도원이 보인다. 이곳은 라브라 수도원 등 수도원이 19개나 있는 일종의 수도원 단지다. 시리아에서 온 수도사 13명 중 성 다비드가 이곳에 동굴을 파고 수도생활을 시작한 것이 기원으로, 그가 행한 기적에 수많은 수도사들이 찾아와 조지아의 종교·문화 중심지로까지 번성했다고 한다.
입구 쪽 라브라 수도원을 둘러봤다. 다비드가 수도하던 동굴과 예배당이 있다. 촛불을 켜놓은 예배당은 단출하지만 성스러운 기운이 감돌았다. 척박한 땅에 들어와 수도했던 성인의 신심에 경외감이 든다. 다른 종교를 믿어도, 종교를 믿지 않아도 경건한 마음으로 자신의 신앙을, 생활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수도원 주위에는 붉게 물결이 치는 듯한 대지가 있다. 가이드는 “베이컨”이라고 소개했다. 이 무슨 어울리지 않는 세속적 별칭인가 싶었지만, 노아의 방주가 지나간 흔적이란 설이 있다고 한다. ‘베이컨’ 위로 방주가 지나가는 장면이 자연스레 그려진다.

만년설이 덮인 카즈베크산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비경을 자랑한다.
■ 옛 군용도로의 절경
조금 더 깊이 조지아를 만나기 위해 나섰다. 차는 캅카스산맥을 가로지르는 길을 달렸다. 일명 ‘러시아 군용도로’라 불리는 곳이다. 실크로드 대상들의 통행로였던 이곳에 러시아는 흑해 부동항으로 진출하기 위해 1799년 200㎞가 넘는 도로를 건설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 포로들이 터널을 뚫고 도로를 정비했다고 한다. 봄에도 눈이 녹지 않는 산악지대를 관통하는 도로 위에선 감탄이 계속된다. 산에 점점이 방목 중인 양떼와 소떼, 구름이 지나가는 협곡 등 쉴 새 없이 바뀌는 차창 밖 풍경에 시선이 고정된다. 잠시 눈을 붙이거나 딴생각을 하는 순간도 아까울 만큼 절경이었다.
창밖에 넋을 뿌리며 도착한 곳은 카즈베크. 인간을 위해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가 산에 묶인 채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았다는 신화의 땅이다. 그리고 조지아인들의 정신적 고향인 ‘게르게티 삼위일체 성당’이 있는 곳이다. 해발 2000m에 위치한 성당을 향해 4륜 구동 지프차로 갈아탄 뒤 거친 흙길을 올라갔다. 만년설이 덮인 장엄한 카즈베크산을 배경으로 게르게티 성당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어떤 단어도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성당을 품고 있는 카즈베크 자체가 영적인 공간이었다. 먹구름이 주위를 뒤덮자 선명한 시야가 사라지는 대신 몽환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 발 딛고 있는 것만으로도, 신성이 깃든다. 카즈베크에 어둠이 짙게 내린 밤, 멀리 천둥·번개가 쳤다. 저기 어딘가 신화 속 이야기가 펼쳐질 것만 같았다.
조지아는 끝 모를 매력을 지닌 곳이다. “이게 다가 아니다. 아직 보여주고 싶은 데가 더 있다”고 강조한 가이드의 말처럼 과거와 현재, 시·공간의 흔적을 부지런히 좇았는데도 더 보고 싶고, 더 알고 싶고, 더 느끼고 싶어졌다. 버킷리스트에 ‘다시 조지아!’를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