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의 코카서스 3국 <하>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머릿속에 그려본 세계지도에서는 위치조차 가늠되지 않았다. 쉽게 와닿지 않는 그곳. 기록적인 폭염에 한국이 녹아내릴 듯하던 무렵, 캅카스(코카서스)의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를 다녀왔다. 신화와 종교가 뿌리내린 성스러운 땅이자, 그에 어울리는 문화의 흔적이 남은 곳이다.

조로아스터교의 3대 성지인 아제르바이잔의 아테시카 사원. 불이 꺼지지 않는 이 사원에서는 불을 숭배하는 신자들의 순례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성스러운 불의 나라, 아제르바이잔
아제르바이잔은 이란, 러시아 등과 접한 카스피해 연안의 유럽국이다. 경제의 상당 부분을 석유와 천연가스가 지탱하고 있어 ‘불의 나라’라 불린다.
불의 나라답게 ‘불의 사원’이 이방인을 맞았다. 이슬람 국가인 아제르바이잔의 ‘아테시카 사원’은 전 세계 3곳인 조로아스터교의 성지 중 하나다. 기원전 6세기경 페르시아의 예언자 자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가 창시한 이 종교는 불을 숭배해 ‘배화교’라고도 한다. 사원 중앙에서는 꺼지지 않는 불이 타오르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기원은 수도 바쿠에서 60여㎞ 떨어진 고부스탄 암각화 유적지에서 만날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은 이곳을 인류 문명의 발상지로 여긴다. 드넓은 반사막지대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바위산에 4만년 전부터 기록된 6000여점의 암각화가 고대인들의 생활상과 문화를 보여준다. 소·낙타 등 각종 동물과 자연현상, 사냥을 하거나 축제를 여는 사람들 등이 바위마다 빼곡히 그려져 있다.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그림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암각화 지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이슬람 순례자들의 기도처인 ‘디리바바’ 영묘가 있다. 이슬람 수피파 성자인 그는 여러 기적을 행해 ‘살아있는(디리) 할아버지(바바)’라 불린다고 한다. 그런데 수피파? 흔히 듣던 시아파나 수니파가 아니다. 수피파는 교리나 율법보다 개인의 신앙과 각성을 중시하는 신비주의적 분파다. 흰옷을 입고 한 방향으로 계속 돌며 신과 교감하려는 의식을 하는데 이를 ‘세마’라고 한다. 잠시 시청한 세마 의식 영상에서, 쉼 없이 도는 수도자들은 그야말로 몰아(沒我), 자신을 잊은 채 황홀경에 빠진 경지였다.
아제르바이잔은 실크로드가 지나는 나라였다. 그중 요충지였던 셰키에는 실크로드 대상(카라반)이 쉬어가던 ‘카라반사라이’가 있다. 카라반사라이는 정보와 물물 교환의 장이자 지역경제를 지탱하는 곳이었다. 아담한 정원을 둘러싸고 지어진 쉼터는 지금도 여행객들을 맞는다. 카라반사라이 주변엔 셰키 왕국의 여름궁전이었던 칸 사라이 궁전이 있다. 겉모습은 특별할 것 없어 보이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진면목을 알 수 있다. 창문마다 장식된 화려하고 섬세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우선 눈길을 끈다. 2층짜리 목조건물은 못 등을 쓰지 않고 모든 재료를 하나하나 짜 맞춘 것이라고 한다. 건물 보존을 위해 내부 촬영은 엄격히 금지돼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중심으로 들어갔다. 수도 바쿠의 구시가지 가장 높은 언덕에는 시르반샤 궁전이 자리하고 있다. 15세기 바쿠로 수도를 옮기면서 건축된 궁전은 위층은 왕족, 아래층은 하인의 생활공간으로 나뉘어 있고 목욕탕, 모스크 등을 갖췄다. 콧수염 형태를 잡는 틀, 목욕탕용 신발 등 깨알같이 세세하고 화려한 왕족의 생활용품을 볼 수 있다.
시르반샤를 나와 구불구불 골목길을 걷다보면 메이든타워에 다다른다. 8층쯤 되는 타워 꼭대기에선 구시가지를 내려다볼 수 있다. 경제발전상을 보여주듯 역사유적지와 함께 최첨단 건축물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해질 무렵 핫플레이스라는 불바르공원을 찾았다. 카스피해를 따라 이어진 이곳에선 바다 특유의 짭조름한 냄새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카스피해는 바다가 아닌 짠 ‘호수’니까. 아무것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노을 지는 수평선을 바라봤다. 낭만이란 이런 거구나, 이 시간만큼은 이방인이란 감각이 사라졌다.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아르메니아 아자트 계곡의 주상절리. 다각형의 돌기둥이 계곡길을 따라 장대하게 펼쳐지며 장관을 이룬다.
◆빼곡히 들어찬 돌기둥…작은 계곡이 품은 ‘세계 최대 주상절리’
■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 아르메니아
아르메니아 국경검문소에 도착하자 낯선 문자가 눈에 들어왔다. 뜻은 고사하고 읽기조차 불가능한. 또 다른 낯선 나라에 발을 디뎠다.
조지아와의 국경지대인 알라베르디는 공업도시다. 좁은 산길의 건너편, 큰불이라도 난 듯 연기가 자욱했다. 구리를 제련하는 공장에서 뿜어내는 것이란다. 아르메니아 정교회(사도교회)의 주요 수도원이던 하그파트·사나힌 수도원은 적막했다.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지정학적 위치로 수많은 외침을 받은 아르메니아는 특히 20세기 최초로 제노사이드를 겪은 비극이 있다. 이런 배경 때문일까. 빛바랜 벽돌의 투박한 건물은 스산한 느낌마저 줬다.
아르메니아는 기독교를 국교로 처음 공인한 나라다. 그 시작이 된 코르비랍 수도원은 터키 국경지대에 있다. 코르비랍은 ‘깊은 지하감옥’이란 뜻이다. 아르메니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 그레고리가 여기 지하감옥에 13년간 투옥됐다고 한다. 그레고리를 가둔 후 하나님의 벌로 정신병에 시달린 왕은 결국 그레고리에게 치료를 받고 치유된다. 그 후 왕은 그가 믿던 종교를 국교로 승인하고, 아르메니아는 세계 최초로 기독교 국가가 됐다.
코르비랍 언덕에 올라서면 광활한 대지 너머 아라라트산이 보인다. 만년설로 덮여 있는 이 산은 ‘노아의 방주’가 도착한 곳이라 전해진다. 국가 문장 가운데에 그려놓을 만큼 아르메니아인들이 어머니로 여기는 신성한 산이다. 원래는 아르메니아 땅이었으나 지금은 터키에 편입돼 쉽게 갈 수 없는 비운의 상징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이 성산은 구름 사이로 간간이 나타날 뿐 그 모습을 또렷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코르비랍이 아르메니아 기독교의 탄생지라면 에치미아진은 중심지다. 에치미아진은 301~303년 성 그레고리가 건립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롱기누스의 창과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 조각, 노아의 방주 파편 등 3가지 성물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치미아진은 아르메니아의 ‘바티칸’답게 웅장한 대성당과 수도원, 신학교 등 다양한 부속 공간이 있다. 대성당 안쪽에는 성물을 비롯해 성인들의 손 성해, 주교들이 의식 때 착용하는 의상, 모자, 장신구 등이 전시돼 있어 사도교회의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아자트 계곡에 위치한 게그하르트 수도원은 롱기누스의 창을 보관했던 곳이다. 바위산에 지어진 이 석굴사원에 들어서면 육중한 산세에 둘러싸인 수도원과 뒤편 산 절벽에 놓인 십자가가 보인다. 사원 내부는 채광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과 신자들이 켜둔 촛불이 밝히고 있다. 아르메니아 교회는 인공조명이 거의 없었다. 성화 외에는 색채감이 느껴지지 않아 한층 차분하고 경건해진다.
게그하르트 인근에는 태양신을 위한 신전인 가르니 사원이 있다. 아르메니아에서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우상 신전이 허물어졌는데 유일하게 남았다. 이곳에선 아르메니아 전통악기 ‘두둑’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 생소한 이름이지만 영화 <글래디에이터> 등에서 소리를 들려준, 낯설지만은 않은 악기다. 민족의 고난을 이야기하듯 두둑의 묵직한 음색에는 처연함과 비장함이 담겨 있었다.
아자트 계곡은 주상절리로도 유명하다. 굽이진 계곡길을 내려가면 세계 최대 규모의 주상절리 지대가 펼쳐진다. 눈앞에 있는 다각형 돌기둥을 따라 시선을 위로 올리자 점점 허리가 젖혀지더니 현기증이 날 듯했다. 작은 계곡에 거대한 절경을 만들어낸 자연의 경이에 감탄만 나올 뿐이다.
아르메니아에서도 ‘바다’를 봤다. 수평선이 아득하고 갈매기까지 날고 있어 그렇게 착각했다. 하지만 바다가 아니다. 해발 1900m에 펼쳐진, 캅카스 지역에서 가장 큰 담수호 ‘세반호수’다. 호숫가에는 작은 언덕이 있다. 원래 섬이었지만 스탈린 시절 각종 개발공사로 높이가 20m나 낮아져 육지와 연결됐다고 한다. 언덕 위에는 아담한 세반교회가 있다. 시원한 바람에 상쾌한 기분으로 계단을 오르자 하늘과 구름, 땅과 물, 소박한 교회까지 조화를 이루며 절경을 그리고 있었다.
수도 예레반에는 아르메니아의 과거와 현재가 함께한다. 제노사이드 추모공원은 비극적이지만 기억해야 할 대량학살의 역사를 엄숙하게 되새긴다. 한편 캐스케이드 광장은 다양한 설치작품과 꽃, 분수대로 화사하다. 인파로 붐비는 광장은 마치 회색빛에 조금씩 밝은색을 입히려는 듯 역동적이었다.
닮은 듯하면서도 서로 다른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사실 관계가 좋지 않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둘러싼 분쟁이 무력충돌로까지 번진 이후 외국인은 양국의 국경도 넘기 힘들다. 그래서 코카서스 3국을 여행할 때는 완충지대처럼 중간에 조지아가 있다. 가이드는 입국심사 때 상대국에서 구입한 물건은 눈에 띄지 않도록 하라고 주의를 줬다. 관광객이라도 압수당할 수 있단다. 물론 아제르바이잔이나 아르메니아나 상대국과 관련된 게 아니라면 여행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잘 보존된 문화유산, 개발 바람이 닿지 않은 자연, 현지인들의 생생한 생활 현장을 온전히 보고 즐기고 느낄 수 있다. 게다가 낮은 물가와 안전한 치안까지 여행자에겐 숨겨진 낙원 같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