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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 전사-4화]“광주 시민들, 숱한 왜곡·고통의 시간 속 역사 바로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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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 전사-4화]“광주 시민들, 숱한 왜곡·고통의 시간 속 역사 바로잡아”

당시 시민학생수습위원장 맡았던 김종배 전 의원

“시신 임시 안치한 상무관서 27일 진압되며 강제 연행…장례 못 치러드려 원통”

[5공 전사-4화]“광주 시민들, 숱한 왜곡·고통의 시간 속 역사 바로잡아”

“ ‘폭도’ ‘불순분자’로 규정됐던 광주 시민들이 지금은 민주화운동을 한 이들로 불립니다. 구 망월동 묘역에서 제사도 못 지내게 하더니, 이제는 국가에서 5·18을 기리고요. 우리를 내란 혐의로 재판한 신군부가 오히려 내란세력이었다는 게 인정됐죠. 숱한 왜곡,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힘들게 꾸준히 진상을 밝히면서 역사를 바로잡아온 것입니다.”

김종배 전 국회의원(64·사진)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학생수습위원회 부위원장 겸 장례위원장이었다. 당시 5월25일부터는 새로 조직된 시민학생수습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27일 계엄군이 도청에 진입할 때까지 최후의 항쟁을 지휘하다 붙잡혔다. <제5공화국 전사> 본문 4편 1602~1603쪽에는 “25일 저녁 조선대생 김종배는 정부 당국에 대한 요구사항이 관철될 때까지 무기반납을 보류하고 투쟁을 계속한다는 자기주장에 동조하는 YWCA 계열의 청년들을 도청에 불러모아 새로운 집행부를 구성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지난달 30일 서울 여의도에서 김 전 의원을 만났다. 그는 계엄군에 체포된 뒤 재판에서 1심 사형, 2심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82년 특사로 풀려났다. “신군부는 위원장인 나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연결시키려고 했는데, 나는 김 전 대통령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어요. 일주일 정도 수사 진행을 멈추더니, 5·18 직전 예비검속으로 이미 체포돼 있던 정동년씨를 끌어내 연결고리로 삼아 조작하더군요.”

김 전 의원은 인터뷰 내내 조목조목 <5공 전사>의 왜곡을 지적했다. “그때의 진상을 알리는 게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시민들이 식량을 빼앗고 강제 헌혈을 시켰다는 대목에선 “말이 안되는 이야기”라고 했다. “함께 목숨을 걸고 나섰던 사람들입니다. 주먹밥을 만들어 서로 나누었던 이들입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가 시민들 스스로 치안을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5공 전사>는) 시민들을 폭도화시키기 위해 쓴 거죠. 누구의 지시에 의해 어떤 자들이 썼는지가 더 명확히 조사돼야 합니다.”

<5공 전사> 본문 4편 1603쪽에는 1980년 5월25일 구성된 시민학생수습위원회 지도부 계보도가 실려 있다. 맨 위 위원장 자리에 김종배 전 의원이 적혀 있다. 국방부가 민간인 이름을 지운 채 공개한 문건 속 인물을 경향신문이 확인한 것이다.

<5공 전사> 본문 4편 1603쪽에는 1980년 5월25일 구성된 시민학생수습위원회 지도부 계보도가 실려 있다. 맨 위 위원장 자리에 김종배 전 의원이 적혀 있다. 국방부가 민간인 이름을 지운 채 공개한 문건 속 인물을 경향신문이 확인한 것이다.

‘북괴’ 개입설을 두고도 “계엄군이 광주를 다 에워싸고 있는데 북에서 누가 광주로 들어올 수 있나. 그 많은 사람들이 죽고, 구속될 때 북한과 관련된 사람은 없었다”며 ‘황당한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25일 도청에서 일명 ‘독침 사건’이라는 게 있었는데 이는 보안사에서 ‘도청에 불순분자가 있다’는 걸 대외적으로 보이기 위한 쇼였지요. 독침에 맞았다며 병원에 간 뒤 사라진 사람이 나중에 계엄사 영창 앞에서 마스크를 쓰고 우리를 딱딱 지목해주고 있더군요.”

38년간 이어진 진상규명은 그날의 기억을 치유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끝내 ‘한’으로 남은 순간들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총 맞아 죽은 이들, 죽은 이를 붙들고 우는 가족들…. 날은 덥고 시체 냄새가 가득했어요. 관 짊어지고 금남로를 걸으며 장례식을 치러 명예롭게 보내드리고 싶었는데…. 27일 진압되면서 그대로 끌려나와야 했어요. 시신들은 군인들이 일방적으로 묻었고요. 그게 아직도 원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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