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을 어떻게 왜곡했나…노영기 조선대 교수 기고
![[5공 전사-4화]신군부 입맛대로…지우고 비틀고 매도한 ‘민주화 열망’](https://img.khan.co.kr/news/2018/10/15/l_2018101501001646000128731.jpg)
무림의 비기(秘記)처럼 떠돌던 <제5공화국전사(第五共和國前史)>가 세상에 제 모습을 드러냈다. 간혹 언론에 인용됐지만 전체가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신군부의 자화자찬으로 꾸며진 채 완성됐음에도 불구하고 <5공 전사>는 왜 빛을 보지 못했을까? 필자가 이 책을 처음 접할 때부터 들었던 의문이다. 아마도 신군부는 1961년 5·16군사쿠데타 이후 만들어진 <한국군사혁명사>와 같은 책을 흉내 내려 했던 것 같다. 신군부의 집권이 대한민국을 구한 ‘구국의 결단’이며 ‘역사의 필연’ 정도로 자랑할 의도였을 것이다.
![[5공 전사-4화]신군부 입맛대로…지우고 비틀고 매도한 ‘민주화 열망’](https://img.khan.co.kr/news/2018/10/15/l_2018101501001646000128732.jpg)
하지만 신군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한국 사회가 나아갔다. 신군부는 5·18을 ‘내란’ 또는 ‘폭동’으로 매도했으나 국민들은 신군부의 거짓말을 믿지 않았다. 되레 국민들은 제5공화국을 ‘피 묻은 권력’ ‘학살정권’으로 비판하며 저항했다. 신군부가 <5공 전사>를 세상 밖으로 내놓지 못한 이유일 것이다.
<5공 전사>는 5·18을 어떻게 서술하고 있을까? <5공 전사>의 서술 기조를 보여주는 구절이 있다. “결국 광주유혈소요사태의 주요 발단 동기는 다년간 누적되었던 지역감정과 5·17조치로 김대중이 연행되자 호남인들을 탄압하는 것으로 판단하였고, 이러한 상황을 악용한 김대중의 추종세력의 사태악화 유도 및 배후조종과 불온분자들의 책동으로 온갖 기상천외한 악성 유언비어가 날조 유포됨에 따라 이에 자극된 시민들이 흥분하여 가세하였고 불만계층의 무분별한 행동으로 결국 유혈사태로 전개하였다.”
지역감정, 김대중 연행, 불온(불순)분자의 책동,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 시민들의 흥분과 가세, 불만계층의 소요로 인한 유혈사태 등이 <5공 전사>에서 그리는 5·18의 원인-과정-결과이다. <5공 전사>는 5·18을 시민들의 투쟁과 계엄군의 작전으로 나누어 서술한다. 가장 많이 인용된 군 자료에는 군이 주어로 등장하지 않는다. 시민들이 계엄령을 어기고 불법시위를 했기 때문에 군이 질서와 치안을 유지했다는 투이다. <5공 전사>는 이 같은 군 자료를 여과 없이 인용해 사실을 왜곡하는 근거로 활용한다.
<5공 전사>는 군에 불리한 사실은 왜곡하거나 아예 누락시켰다. 5월18일 공수부대는 진압봉을 사용하지 않았다며 사실과 정반대되게 서술하거나 5월19일 오후의 최초 발포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5월20일 광주역 앞에서의 최초 집단발포는 ‘공포’로 둔갑시켰다. <5공 전사>는 5·18을 불량배와 불온분자들이 선동하는 폭동에 시민들이 합세해 계엄군을 공격한 것으로 서술한다.
5월21일 오전 왜 그렇게 많은 시민들이 분노하며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 집결했는지 그 이유를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이날 시민들이 금남로에 몰려든 것은 공수부대가 철수한 광주역에서 참혹한 두 구의 시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1960년 4월11일 처참한 김주열의 시신을 보고 마산 시민들이 다시 봉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광주 시민들도 공수부대에 분노한 것이다. <5공 전사>는 5월21일 오후 시민들이 먼저 발포하고 공수부대를 비롯한 계엄군은 “자위를 위한” 대응 차원에서 “위협사격”한 것으로 서술한다. 명백한 사실의 왜곡이고 오늘날 5·18을 왜곡하는 중요한 근거 중 하나이다.
<5공 전사>는 1980년 5월 광주를 “무법천지의 공포의 도시”, 불법과 폭력이 난무하는 무질서한 도시로 표현한다. 그러나 1980년 5월21일 계엄군이 물러난 광주는 상처를 치유하고 주먹밥과 피를 나누었다. 한 연구자의 평가처럼 “절대공동체”가 만들어졌다.
<5공 전사>는 군이 집단 발포해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하고 난 뒤 무장한 시민들의 행동을 ‘소요의 확산’이자 ‘폭동’으로 깎아내린다. 그리고 시민들의 폭동이 실제 행동으로 옮겨진 대표적 사례로 광주교도소 습격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는 공수부대가 광주교도소 부근을 지나던 차량에 무차별 발포, 많은 희생자들을 발생시킨 것을 시민들의 교도소 습격에 대응한 군의 작전활동으로 서술한다.

<5공 전사>는 5·18민주화운동을 고첩(고정 간첩)과 불순분자, 외부에서 잠입한 폭도 등의 소행으로 왜곡했다. 사진은 계엄사령관 명의의 ‘경고문’(왼쪽 위)과 1980년 5월23일 전후 뿌려진 전단(왼쪽 아래), 계엄군에 의해 손이 뒤로 묶인 채 강제연행되는 광주시민들. 전단과 경고문은 <5공 전사>의 ‘부록 2편’ 690~694쪽에 걸쳐 수록돼 있다.
<5공 전사>는 5월22일 오전 10시30분 경찰과 군에 자위권이 발동됐다고 서술한다. 그러나 이전부터 군은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고 있었다. <5공 전사>는 시민군을 복면을 한 ‘불순분자들’이며 치안을 깨뜨리는 집단으로 폄하한다. 역설적이게도 이 책은 ‘북한의 남침 책동’은 제시하지만 오늘날과 같이 ‘북한군 특수부대의 침투’는 아예 언급하지 않는다.
<5공 전사>에는 5월19일 이후 군 수뇌부 회의가 매일 열려 신군부의 핵심 인사들(전두환 보안사령관·노태우 수경사령관·정호용 특전사령관)이 회의에 참여해 날마다 광주 상황을 보고받으면서도 최대한 자제력을 잃지 않았다고 서술한다.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이다. 공수부대의 폭력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쓰러졌다. 5월19일 한낮의 금남로에서는 공수부대원들이 연행한 시민들을 속옷만 입힌 채 기합을 줬다. 이렇듯 신군부가 5·18에 깊이 개입했음을 자인하면서도 공수부대의 폭력과 야만은 은폐한다. <5공 전사>는 자료 또한 조작하고 있다. <5공 전사>에는 ‘자위권 발동’의 발언자가 이희성 계엄사령관으로 뒤바뀌었다. 이 회의의 내용을 손으로 기록한 원 자료에는 “전 각하(全 閣下)”의 발언으로 적혀 있다. 이렇듯 <5공 전사>는 불리한 자료는 비틀어 사실을 왜곡했다.
5월27일 ‘상무충정작전’이 끝난 뒤 신군부는 5·18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불순분자들’이 일으킨 ‘내란’이라며 그 주역들을 ‘폭도’로 처벌했다. 신군부의 논리는 <5공 전사>에 그대로 투영되어 5·18을 “1980년 5월18일부터 5월28일(인용자: 5월27일의 오타)까지 광주권 일원에서 있었던 반정부 무장폭동 소요사태”로 규정했다. 전체적으로 <5공 전사>의 서술은 잘못 기록된 자료에 근거해 사실을 왜곡하며 신군부와 군에 불리한 사실을 빠뜨리거나 자료마저 조작했다. <5공 전사>는 신군부의 의도에 맞춰 편견과 선입견으로 각색된 ‘거짓투성이 역사’이며, 그 중심에는 신군부의 입장을 충실하게 따른 5·18에 대한 평가와 서술이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