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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걷는다

입력 2018.10.28 20:20

수정 2018.10.2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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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심한 애인처럼 불친절했다. 이화여대 후문을 나서 금화터널을 지나 독립문 쪽으로 갈 참이었는데 당최 터널입구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모처럼 연휴에 친정 나들이를 걸어서 가자고 가족들과 나선 길인데 터널을 앞두고 의견이 갈려 우왕좌왕했다. 우선 차도 옆 흰줄표시 길을 따라갔더니 길 끝이 뾰족하게 꼭짓점처럼 끝나버렸다. 터널입구로 질주하는 차량들과 마주 본 상태로 마음 졸이며 되돌아왔다. 그다음엔 인도를 따라 언덕 위로 올라갔다. 터널 위를 지나 다시 언덕 아래로 내려오니 왼쪽에 잡초가 무성한 좁은 길이 있고, 그 길 끝에 금화터널의 인도가 붙어있었다. 터널까지 걸어가는 길은 짧았지만 자동차들의 소음과 위세에 눌려 심히 위축되었다. 이화여대 후문쯤 어딘가에 금화터널로 걸어가려면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고 알려주는 표식이라도 있었다면 조금은 편히 갔을 텐데….

[정동칼럼]나는 걷는다

제주올레길엔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리는 작은 길안내 표식이 있다. 때론 바닥의 화살표이기도 하고 때론 색깔리본이 달려서 초행에 혼자서 가도 안심하고 걸을 수 있다. 제주올레는 걷기로 새역사를 쓴 좋은 사례로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언론사 편집국장을 끝으로 탈진한 서명숙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후, 여기보다 더 멋있는 고향 제주에 길을 내기로 결심한다. 마침내 26개 코스 425㎞에 달하는 올레길을 냈고, 하루에 1코스씩 걸으려면 최소 26일이 소요되면서 육지인들 사이에 ‘제주 한달살이 열풍’을 몰고 왔다. 그 경제적 효과가 수천억원에 이른다고 하니 걷기는 개인을 넘어 지역사회에 큰 기여를 한 셈이다.

꼭 산티아고나 올레가 아니더라도 걷기는 발걸음의 규칙적인 생체리듬 때문에 명상과 같은 특별한 정신상태를 만들어준다. 특히 자동차를 타고 가며 보던 것과 다른 눈높이가 늘 보던 것들을 달리 보이게 해준다. 자주 쓰던 뇌를 쉬게 하고 낯선 것들로 관심을 돌릴 때 안 풀리던 문제가 갑자기 해결되는 ‘부화효과(incubation effect)’를 체험하게 해주는 것도 걷기의 또 다른 미덕이다.

기계 문명의 발전이 거세지고 잠시도 벗어날 수 없는 일종의 디지털 감옥에 살고 있는 터라 아날로그 세계와의 균형을 위해서라도 더 많이 걷고 싶다. 그런데 도시에서 길이란 그저 버스나 자동차를 위해서 기능하는 것 같다. 대한민국, 특히 거대도시 서울에서 사람은 언제나 차 앞에서 주눅든다. 길찾기를 검색하면 자동차 아니면 대중교통 안내만 한다. 걸어서 가면 대강 몇분 내 갈 수 있다는 안내는 어디에도 없다. 왜? 아무도 걷지 않기 때문이다. 왜? 걸어서 갈 엄두가 안 나서다. 왜? 이 길을 걸어서 가도 되는지 확신이 없어서다. 왜? 일상이 정신없이 바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서울로 7017’은 서울역 앞 차로를 가로질러 사람이 걸어서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600년 도읍 한양 성곽길을 따라 걷는 ‘한양순성놀이’가 시작된 것도 고무적이다. 서울에서 단풍을 감상하기 좋은 길 90곳을 작정하고 걷는 것도 멋진 일이다. 그런데 한걸음 더 나가고 싶다. 그냥 일상적으로 어디든 걸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강남북을 오가던 시절에도 가끔 걸어서 반포대교를 건넜는데 새벽에 다리까지 닿으려면 좁고 무서운 지하도를 건너야 해서 특공대같이 긴장하곤 하였다. 게다가 3호터널을 걸어서 건너는 것은 지옥훈련 같았다. 해방촌으로 가려면 너무 가팔랐고 삼각지 쪽은 너무 뺑돌아 오래 걸렸다. 차들은 아스팔트 매끈한 길을 따라 편안하게 가는데 차 없이 가려면 두 다리가 너무 고생한다. 과연 이런 인프라 속에서 차를 타지 말자고 하면 몇 사람이나 따를 수 있을까?

지난 10월1일 인천 송도에서 IPCC 총회가 열렸다. 기후변화에 대한 정부 간 협의체가 결성된 이후로 가장 중요한 회의였다. 지구온난화가 너무 심각해서 지구 평균 온도 상승을 1.5도 이하로 억제하지 않으면 인류가 멸망할 것임을 경고하는 보고서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올여름 무시무시한 폭염을 경험했고 심한 미세먼지는 봄철에 이어 가을 문턱을 넘고 있다. 기후변화를 포함한 환경문제는 죽고 사는 문제다. 온난화의 주범인 탄소를 배출하고 녹스, 삭스 같은 오염물질로 미세먼지를 생산하는 차량운행을 멈추든지 특단의 대책이 아니면 사실 해답은 요원하다.

런던처럼 서울도 4대문 안에 차량 진입을 금지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해운대에 쓰나미가 몰려와서 부산을 초토화시키는 기후재난 발생 전까지 그런 일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넛지(nudge)’ 방식으로 서울부터 그냥 걸을 수 있는 길이 많아졌으면 한다. 그래서 어지간한 거리는 걸어서 다니는 문화가 피어났으면 좋겠다. 제주올레축제가 11월1일부터 3일까지 열린다는데, 걸어보면 묘안이 생길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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