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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대총 출토 바둑통에 새겨진 이름 '마랑'···그는 3~4세기 커제?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황남대총 남분에서 확인된 ‘마랑’명 칠기. 동일한 크기, 형태, 문양의 칠기가 한 점 더 있다. ‘마랑’은 3~4세기 중국 서진시대에 바둑으로 이름을 떨친 기성의 이름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황남대총 남분에서 확인된 ‘마랑’명 칠기. 동일한 크기, 형태, 문양의 칠기가 한 점 더 있다. ‘마랑’은 3~4세기 중국 서진시대에 바둑으로 이름을 떨친 기성의 이름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마랑은 3~4세기판 커제(柯潔) 9단인가.’

1973년부터 2년동안 경주 황남대총 남분과 북분을 발굴조사한 결과 약 7만점의 유물이 쏟아졌다. 그중 여러 종류의 칠기가 확인됐는데 모두 중국에서 제작된 수입품으로 분석됐다. 이 가운데 남분의 주곽 수장부에 놓여있던 청동시루에서 확인된 ‘마랑(馬朗)’이라는 명문칠기가 유독 눈에 띄었다. 하지만 지난 43년 동안 이 ‘마랑’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파악하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 이 ‘마랑’이 3~4세기 중국 서진(266~316) 시대에 활약한 중국의 바둑 최고수인 ‘기성(棋聖)’ 칭호를 얻은 인물이라는 획기적인 연구성과가 나왔다.

‘마랑’명 칠기의 출토상황과 실측도. 같은 문양, 크기, 형태의 칠기가 한 점 더 나왔다. 이은석씨 등은 흰돌, 검은 돌을 넣은 바둑통이라 해석했다.|이은석씨 제공

‘마랑’명 칠기의 출토상황과 실측도. 같은 문양, 크기, 형태의 칠기가 한 점 더 나왔다. 이은석씨 등은 흰돌, 검은 돌을 넣은 바둑통이라 해석했다.|이은석씨 제공

이은석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양유물연구과장과 정일 목포대 교수(중국언어문화학과)는 학술지 ‘중앙고고연구’ 최신호에 실린 논문 ‘황남대총 남분출토 마랑명 칠기의 의미’ 논문에서 ‘마랑=3~4세기 중국의 기성’이라고 주장했다.

불꽃 문양인 ‘마랑’명 칠기는 똑같은 크기와 형태, 문양을 지닌 다른 칠기 1점과 포개진채 확인됐다. 두 연구자는 이 점에 주목했다. 두 사람이 수담(바둑)을 나눌 때 썼던 바둑통이라는 것이다. 마랑 관련 기록은 갈홍(283~343)이 저술한 <포박자>와 송나라 때(983년) 백과사전인 <태평어람> 등에 등장한다. <포박자>는 “마랑의 자(字)는 수명(綏明)인데, 바둑기술에서 적수가 없으니 기성의 칭호를 얻었다(馬朗 字綏明 圍棋藝無敵 有棋聖之稱)”고 했다. <태평어람>도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을 세상에서 기성이라 칭하니 그래서 엄자경·마수명(마랑)에게 기성이라는 호칭이 있다(善圍棋者謂之棋聖 故嚴子卿 馬綏明有棋聖人之明)”고 했다.

‘마랑’명 칠기를 복원한 모습. 바둑알통으로 추정된다. (정병호 소장-황남대총 도록)

‘마랑’명 칠기를 복원한 모습. 바둑알통으로 추정된다. (정병호 소장-황남대총 도록)

그런데 송나라 학자인 정초(1104~1162)가 쓴 사서 <통지> ‘예문학’을 보면 “원강연간(291~299) 조왕 륜의 사인인 마랑이 <위기세(圍棋勢)> 29권을 편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왕 륜은 사마륜(?~301)인데, 진 선제(사마의·179~251)의 9번째 아들이다. 따라서 마랑이 사마륜의 요청으로 바둑책인 <위기세>를 편찬한 것은 3세기 후반일 것이다. 한마디로 마랑은 서진(266~316) 시대에 실존한 인물이며, 바둑책을 29권이나 펴낼 정도로 이름을 떨친 기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으로 치면 중국 바둑계의 1인자인 커제 9단 정도의 기재가 아니었을까.

황남대총 남분에서는 ‘마랑’명 바둑통 뿐 아니라 총 243개의 추정 바둑돌이 확인됐다. 이 바둑돌들은 검은색, 흰색, 회색 등으로 분류되는데 크기는 직경 1~2㎝, 두께는 0.3~0.7㎝ 내외이다. 흰돌과 검은 돌의 차이가 모호하다. 그러나 이은석씨는 “원래 검은돌이 있었겠지만 오랜 세월을 지내는 동안 색이 떨어져 나갔을 수도 있고, 유물의 세척과정에서도 지워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이은석씨는 “신라가 중국과 바둑으로 교류했다면 마랑이라는 명문이 있는 최고급 칠기는 신라 상류층이 소장하고 싶어 했을 물건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추정’ 바둑돌은 황남대총 남분 뿐 아니라 천마총(350개)과 금관총(약 200개) 등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또 7세기에 조성된 용강동 6호분에서도 바둑알이 나왔고, 분황사지에서는 전돌로 만든 15×15줄 바둑판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 바둑판의 연대는 신라시대 말인 9세기로 추정된다. 이 모든 유물은 고신라와 통일신라 시대를 통틀어 바둑이 성행했음을 알려주는 증거들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에도 바둑관련 일화가 다수 등장한다. 예컨대 <삼국유사> ‘피은·신충괘관’을 보면 효성왕(재위 737~742)과 관련된 바둑 에피소드가 보인다.

같은 황남대총 남분에서 확인된 ‘추정’ 바둑돌. 바둑돌로 보이는 유물들은 천마총과 금관총에서도 다수 확인된다.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같은 황남대총 남분에서 확인된 ‘추정’ 바둑돌. 바둑돌로 보이는 유물들은 천마총과 금관총에서도 다수 확인된다.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효성왕의 태자 시절, 어진 선비 신충과 함께 궁정의 잣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면서 굳게 약속했다. ‘내 그대를 잊지 않겠소. 혹여 나중에 내가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거가 될 것이요.’”

그러나 왕위에 오른 효성왕은 신충을 까맣게 잊었다. 신충이 원망하면서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였다.

“질 좋은 잣나무가, 가을이 채 안돼 떨어지니, 너를 어찌 잊으랴 하신, 우러러 보던 얼굴이 바뀌게 되었네…. 세상 다 잃은 처지여라.”

신충의 노랫말이 붙은 나무는 갑자기 말라버렸고, 노래는 삽시간에 퍼졌다. 그때서야 왕은 신충을 기억해냈다. 신충에게 벼슬을 내리자 잣나무는 다시 살아났다.

또 신라와 당나라간 바둑교류의 기록도 생생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효성왕조’에 신라-당나라간 친선바둑대회 이야기가 등장한다. 즉 738년(효성왕 2년) 당나라 현종이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두가지를 당부한다.

“신라는 군자의 나라란다. 중국과 비길만 하다는구나. 신라인들에게 대국(당나라)의 유교가 융성함을 자랑해라.”

또 하나의 당부가 있었다. “당의 바둑실력을 뽐내고 오라”는 것이었다. <삼국사기>의 내용을 그대로 전제한다.

“(현종은) 신라사람들이 바둑을 잘 둔다고 하여(以國人善碁) (바둑을 잘 두는) 양계응을 부사로 삼아 보냈다. 신라의 고수들이 모두 그의 아래에서 나왔다.(國高혁皆出其下) 이때 왕(효성왕)이 당나라 사절단에게 금·보물·약품 등을 하사했다.”

당시 당나라의 바둑은 최절정기였다. 궁정에 기대소(棋待詔)라 하는 전문기사제도를 두었다. 그런 판국이니 당 현종은 당나라의 바둑 실력을 뽐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신라-당나라간 자세한 승패의 상황을 기록하지 않았다.

분황사에서 확인된 전돌로 만든 바둑판. 15줄 바둑판이다. 신라에서는 전시대에 걸쳐 바둑을 애호했으며. 당나라와 친선바둑대결을 벌였다는 생생한 기록도 남아있다. 당시 신라는 15줄 바둑을, 당나라는 지금과 같은 19줄 바둑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분황사에서 확인된 전돌로 만든 바둑판. 15줄 바둑판이다. 신라에서는 전시대에 걸쳐 바둑을 애호했으며. 당나라와 친선바둑대결을 벌였다는 생생한 기록도 남아있다. 당시 신라는 15줄 바둑을, 당나라는 지금과 같은 19줄 바둑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그러나 아마도 신라의 바둑고수들은 돌아가면서 당나라 국수(國手) 양계응과 흥미진진한 친선대국을 펼쳤을 것이다. 서라벌 전체가 바로 신라-당나라간 반상대결로 들썩였을 것이고….

당나라측 사서인 <구당서> ‘동이전·신라조’는 이때의 신라-당나라 바둑대결을 소상히 전하고 있다..

“황제(당현종)는 신라사람들 중에 바둑 잘두는 이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 바둑에 능한 솔부병조 양계응을 부사로 삼아 파견했다. 사신단은 신라인들로부터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신라의 바둑수준은 낮았다. 그리하여 신라는 중국 사신단에게 금보(金寶)와 약재 등 푸짐한 선물을 주었다.”

<구당서>의 기록이 ‘참’ 이라면 신라고수들은 당나라 국수 양계응에게 연전연패했다는 얘기다. 지난 2006년 분황사에서 발견된 바둑판은 15줄 짜리다. 당대 당나라에서는 지금과 같은 19줄 바둑이 성행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15줄 바둑에 익숙한 신라 고수들이 19줄 바둑으로 무장한 당나라 양계응에게 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은석씨는 “당대 중국 바둑 최고수인 ‘마랑’의 이름을 새긴 바둑통이 5세기 초중반에 조성된 신라고분에 묻혔다는 것은 중국과 신라간 바둑교류 역사가 최소한 1700년 이상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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