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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의 삶을 봐야" 여성의 일터로 걸어들어간 과학자, 캐런 메싱·김승섭

캐나다의 직업보건학자인 캐런 메싱 퀘벡대학 명예교수(오른쪽)와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김승섭 교수가 지난 2일 오후 서울 신문로의 카페 에무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캐나다의 직업보건학자인 캐런 메싱 퀘벡대학 명예교수(오른쪽)와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김승섭 교수가 지난 2일 오후 서울 신문로의 카페 에무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캐런 메싱(75)은 ‘보이지 않는 고통’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일터로 걸어들어간 과학자다. 분자유전학자인 그는 캐나다 퀘백대학교에서 생물학 교수로 일하던 1978년 방사선에 노출된 제련 노동자들의 작업환경을 조사하게 되면서 직업보건·작업환경 연구에 입문했다. 의자에 앉는 것이 허락되지 않아서 하루종일 서 있는 판매직원들, 구부정한 자세로 반복작업을 계속하는 청소원들, 감정적 폭력에 시달리는 콜센터 직원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고통을 수치화했다. 그 결과물인 저서 <보이지 않는 고통>은 일상 속에 감춰진 일하는 이들의 고통을 이른바 ‘전문가’ ‘학자’들이 어떻게 외면해왔는지 드러내보인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의 저자인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김승섭 교수의 연구는 메싱의 연구와 결이 같다. 그는 쌍용자동차 해고자와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이 어떻게 자살과 질병으로 이어졌는지, 백화점·면세점에서 일하는 화장품 판매직 노동자들은 왜 방광염에 많이 걸리는지 등을 연구하며 노동자의 삶의 조건과 작업환경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고 있다. 두 사람은 스스로를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는 사회역학자’라 부른다.

강연을 위해 한국에 방문한 캐런과 김 교수가 지난 2일 서울 신문로의 카페 에무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보이지 않는 고통’을 어떻게 사회구성원에게 설득력있게 제시할 것인가 등을 주제로 2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눴다.

김승섭= 아무리 뛰어난 통찰을 가진 연구라 해도, 사람들은 그 이야기가 자신의 삶과 무관하다고 느끼면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교수님의 책은 ‘보통 사람들’의 삶에 대한 연구일 뿐 아니라, 그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이기도 합니다. 제게 교수님은 그동안 측정되지 않던 여성 노동자의 작업환경과 고통에 대한 연구를 개척해오신 분입니다. 여성의 노동에 대해 연구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요.

메싱=책상에 앉아서 고민하다가 ‘아, 난 지금부터 여성의 노동을 연구해야겠다’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에요. 퀘백대학교에서 곰팡이의 분자유전학을 연구하던 시절, 우연히 맡은 제련 노동자들의 방사선 노출에 대한 프로젝트가 노동자 건강에 대한 첫 연구였어요. 그 이후에는 병원 노동자들을 만났습니다. 일하면서 방사선에 자주 노출되는데, 그로 인해 염색체 이상이 있는지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었어요. 막상 병원에 가보니 방사선의 양은 매우 적었고, 오히려 다른 것이 문제였어요. 병원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항상 땀을 뻘뻘 흘려가며 환자들을 번쩍 들어올려서 옮겨야 했기 때문에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렸어요. 그들만의 고통이었죠. 자리에 앉아만 있는 관리자는 에어컨 바람 때문에 추워했어요. 그런 경험들을 하면서 직업보건을 연구하기로 마음 먹었어요. 요즘에는 <보이지 않는 고통> 다음 책을 쓰고 있는데, 미투와 여성의 직업보건 같은 문제를 결혼과 엮어보려고 해요.

김승섭 교수. 김기남 기자

김승섭 교수. 김기남 기자

김=저는 최근에 백화점과 면세점에서 화장품을 파는 여성들의 작업환경을 조사했습니다. 사람들은 판매직원들이 깨끗하고 화려한 곳에서 샤넬 같이 값비싼 화장품을 팔고 있다고만 생각하지요. 그런데 그들 중 20.6%가 지난 1년 동안 방광염으로 치료받은 적이 있었어요.

메싱=이유가 무엇이었나요?

김=화장실에 갈 수 없으니까요. 관리자들은 판매직 여성들이 고객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했어요. 그래서 직원용 화장실을 써야만 하는데, 직원용 화장실은 멀리있고 개수도 적어요. 게다가 매장에서 혼자 근무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화장실에 갈 때 자리를 지켜줄 사람이 없죠. 고객을 만나며 계속 말을 해야 하지만, 화장실에 가야 할까봐 물을 마시지도 않아요. 생리대도 자주 갈지 못해 피부염에 시달리는 이들이 17%가 넘었어요. 고가의 화장품을 파는 여성 노동자들이 겪는 이런 고통은 너무나 모순적이예요. 게다가 이들은 비슷한 연령대 여성에 비해 하지정맥류를 가지고 있을 위험이 25배나 높았어요. 의자에 앉을 수 없기 때문이죠.

메싱=미국 도살장 노동환경에 대해 조사한 사회학 연구가 생각납니다. 도살장에서는 남녀 모두 기저귀를 찬다고 합니다. 화장실에 갈 수 없으니까요. 화장실에 안 보내주면, 화장실에 가려고 하지 말고 기저귀를 차라! 스웨덴의 한 연구에서도 백화점 화장품 판매대의 여성이 불편한 신발을 신고 일하면서 발 문제가 생긴 케이스가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고통>에는 한국의 화장품 판매원들이나 마트 직원들처럼 의자에 앉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노동자들 이야기가 나온다. 캐나다에서도 “계산원들은 고객을 상대할 때 서 있어야만 하며, 왜냐하면 앉아 있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 보이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컸다고 한다. 특히 이런 차별적인 대우를 받는 ‘낮은 계급’의 노동자들은 여성인 경우가 많다. 메싱은 스스로 설명했듯 여성의 노동에 관심이 많아서 연구를 하게 된 것이 아니라, 감춰진 고통 속에 일하는 사람들 상당수가 여성이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연구로 나아갔다.

김=당신의 책에 ‘남성 직업보건 연구자들이 여성의 건강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내용이 나와요. 건설노동자가 추락해서 다치는 부상은 중요하게 여기지만 여성노동자들이 서비스나 감정노동을 하면서 겪는 질병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습니다. 저는 판매직 연구를 노동조합과 함께 진행했는데, 이런 연구들은 기업은 물론이고 정부로부터도 지원을 받기가 많이 힘들더군요.

메싱=어떤 이들은 노동자들과 함께 연구하는 것을 두고 ‘정치적인 행동’이라고 비난하기까지 하죠. 노동자의 작업환경에 대해 고용주에게 물어보면 그건 과학적인 연구가 되는데, 일하는 당사자들에게 물으면 정치적인 행위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고용주들은 실제로 작업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답을 줄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류로 정리된 6개월 전의 작업환경 수치를 고용주에게 얻어서 볼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현장에서 오래 일한 노동자에게 물으면 ‘A라는 물질을 담은 트럭이 목요일에 들어왔으니 목요일 오후의 측정치에 A라는 물질이 높게 나타날 것’이라는 구체적인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죠

노동자들, 특히 여성 노동자들이 일을 하면서 겪는 고통과 건강 문제에 천착해온 메싱은 “학자들이 현장에 나가 직접 노동자들을 눈으로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기남 기자

노동자들, 특히 여성 노동자들이 일을 하면서 겪는 고통과 건강 문제에 천착해온 메싱은 “학자들이 현장에 나가 직접 노동자들을 눈으로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기남 기자

김=과학이 ‘남자들의 세계’라고 여겨지던 1960년대에, 페미니즘 덕에 장벽을 극복하고 과학자가 될 수 있었다고 저서에 쓰셨지요.

메싱=1963년에 저는 미국 하버드에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과학분야 연구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좀 겁을 먹었던 것 같아요. 그때 베티 프리던의 <여성의 신비>를 읽고 ‘여성도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받았어요. 제 외할머니는 러시아에서 유대인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와 급진적인 사회주의자들과 어울린 페미니스트였어요. 화가였던 어머니는 급진적인 무정부주의자였고요. 어릴 때부터 그분들에게 받아온 교육과 프리던의 책이 제가 과학자가 되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해줬어요.

메싱은 부유한 사업가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혼을 했다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편견을 겪었다고 책에서 털어놓는다. 노동자들의 건강에 관심을 갖는다는 이유로 배척당하고 연구비가 끊기고 과학자 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그가 가장 심각한 문제로 인식한 것은 과학자들과 노동자들 사이를 끊어놓는 공감의 부재다. 메싱은 그것을 ‘공감격차’라고 부른다. “사업주와 과학자, 행정가들이 노동자를 존중하지 않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노동조건과 노동자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김=책에서 당신은 ‘140편의 꽤 많은 학술 논문을 내면서 한 연구결과가 노동자들의 삶을 실제로 더 낫게 만든 것 같지는 않다’고 고백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당신은 빛나는 성공보다는 실패의 경험을 많이 풀어놨습니다.

메싱=여성 노동자의 일에 대해 연구하면서 그들이 겪는 성희롱이나 신체적 폭력 등을 알 수 있었지만 막상 그들 편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는 경우가 많았어요. 현실을 바꾸고 싶다면 과거와 어떻게 다르게 접근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고,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놓쳤는가를 봐야죠.

김=지난해 학술지에서 당신이 쓴 논문을 읽었습니다. 병원 청소 노동자들의 성별 임금격차를 없애기 위해 남녀 업무를 구분하지 말 것을 권했는데, 십여년 후 돌아가보니 평등해지기는커녕 고용주들이 여성 고용을 꺼리게 됐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현장을 고려하지 않고 내놓은 해결책은 오히려 여성들에게 해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메싱=저희에게 그 연구를 요청한 것은 중앙노동조합의 여성위원회였어요. 그런데 지역 노조는 우리 연구에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여성이면서 청소노동자인 사람들은 노조에서 매우 소수였을 뿐 아니라 힘이 없었어요. 다시 현장을 찾아가보니 우리가 제안했던 것들 중에 실제로 적용된 것들은 없었고 여성 청소노동자들은 주눅이 들어있었습니다.

김=작업환경을 둘러싼 정치적 맥락을 고려해야 마땅하지만, 연구를 진행하는 입장에서 정치적 환경을 측정하고 감안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요.

메싱=맞아요. 정치적인 맥락을 고려하고 분석하는 것은 노조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대개의 경우 노조와 함께 일하고, 노조와 연구팀의 협업이 잘 이뤄져야 바람직한 해결책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노조의 역할이에요. 제가 노조를 도울 수는 있지만, 직접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대담]"현장의 삶을 봐야" 여성의 일터로 걸어들어간 과학자, 캐런 메싱·김승섭

김=우리의 연구를 통해 부조리하고 위험한 작업환경에 대한 정보를 얻은 노동자들이, 그 연구결과를 기반으로 작업환경을 바꾸려는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싸움들은 목표를 이루지 못할 때가 많고, 그 과정에서 직업을 잃거나 상처받는 사람들도 생깁니다.

메싱=연구자의 역할은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고, 어떤 위험을 감수할지 판단하고 싸움을 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노동자입니다. 과학자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노동자들에게 작업환경 문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까지입니다.

김=노동자들의 삶을 잘 이해하고 오랫동안 현장에 있어온 연구자이기에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실제 작업환경과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당신은 책에서 ‘과학자들은 노동자에게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학습하게 된다’면서 공감격차를 지적했습니다.

메싱= 오늘날 과학계는 정글과 같습니다. 연구 지원금은 적은 수의 과학자에게 집중되고, 지원금을 받으려면 수치로 평가받아야 합니다. 특권을 가진 소수의 과학저널에 얼마나 많은 논문을 냈는지, 그것이 다른 연구자들에게 얼마나 많이 인용됐는지가 중요하죠. 이런 평가들은 과학자의 연구가 일하는 이들의 삶을 얼마나 개선시켰는지는 반영하지 못합니다.

김=공감격차를 줄이기 위해 노동안전 연구자들은 뭘 해야 할까요.

메싱=제 학생 하나는 공장 감독관이었는데, 몇년 동안 주말 내내 직업보건 수업을 들었습니다. 그 학생이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일하면서 지켜보니 노동자들의 작업방식이 교실에서 배운 이론에 따르면 몸을 해치는 방식이었어요. 그래서 “무거운 것을 들어 옮길 때는 몸을 한 번에 90도 이상 틀지 말고, 조금씩 틀면서 여러 차례 나눠서 옮기라”라고 권고했지만 아무도 따르지 않더랍니다. 여러 차례 나눠 옮기면 생산라인의 속도를 맞출 수 없으니까요. 연구자들이 밖으로 나가서 일하는 이들의 삶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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