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권선언 70주년을 맞은 10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페미니즘을 다시 쓴 인권선언 발표’ 기자회견에서 페미니즘으로 쓰는 인권선언 추진단 관계자들이 인권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우리는 모두 존엄한 사람이다. 누가 더 많이 차별받고 있는지 경쟁하기보다 이 차별적 구조를 바꾸기 위해 싸우자.”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등 시민단체 8곳이 주축이 돼 만들어진 ‘페미니즘으로 쓰는 인권선언 추진단’이 기자회견을 열고 ‘2018 페미니즘으로 다시 쓴 인권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대한민국 국회는 성차별과 성폭력에 반대하는 입법을 하고 있지 않다”며 “국회의 역할을 촉구하기 위해 국회 앞에서 ‘페미니즘으로 다시 쓴 인권선언’을 발표한다”고 말했다.
이날 발표된 ‘페미니즘으로 다시 쓴 인권선언’은 1948년 유엔이 발표한 ‘세계인권선언’에 새롭게 페미니즘적 시각을 더해 재구성한 것이다. 이들은 “유엔이 공포한 세계인권선언은 1948년이라는 시대적 한계와 국가 간 협의라는 한계가 있으며, 보편성은 남성으로 대표되고 왜곡됐다”며 “인권선언의 보편성은 소수자들의 운동, 특히 페미니즘으로 풍부해졌다. 한국 사회와 전 세계에 있는 여성들을 비롯한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펼치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다른 세상을 향한 실천과 열망을 ‘페미니즘으로 다시 쓴 인권선언’에 담고자 했다”고 제작 배경을 밝혔다.
총 28개조로 구성된 ‘페미니즘으로 다시 쓴 인권선언’에는 1조 ‘인간의 조건과 인권의 성격’부터 28조 ‘페미니스트의 결의’까지 차별은 지양하고 평등을 지향하는 다양한 내용들이 담겼다. 특히 3조 ‘몸에 대한 권리와 성적 권리’, 6조 ‘재생산 권리’ 등에서 ‘여성의 몸은 출산의 도구가 아니다’고 정의함으로써 ‘낙태죄 폐지’에 힘을 실었다.
또 5조 ‘사생활의 권리’에서는 ‘모든 사람은 사이버 성폭력(몰카, 지인능욕, 비동의 촬영물, 불법촬영 등)을 비롯한 성폭력 범죄로부터 안전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12조 ‘사상·양심·학문·종교·표현·집회의 자유’에는 ‘누구든지 페미니즘 사상이나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차별과 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내용도 담겼다.
‘페미니즘으로 다시 쓴 인권선언’이 장애여성, 청소녀, 이주여성, 난민여성 등에 대한 차별 문제도 지적하면서 이날 기자회견에는 관련 단체의 활동가들도 나와 지지발언을 했다. 사회적 소수자들이 처한 실상을 고스란히 담은 이들 발언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장애여성의 권리-장애여성네트워크 김라현
장애여성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가해지는 사회적 편견과 배제,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게 되는 성차별과 불평등을 동시에 경험하는 복합적인 차별 구조에 놓여 있습니다. 많은 장애여성들이 어린 시절 가정에서부터 차별을 겪어왔다는 것은 장애여성의 무학(無學) 비율이 장애남성에 비해 4배 가까이 높으며, 그 이유 중 ‘가족들의 진학 반대’가 장애남성보다 10배(여성 20.1%, 남성 2.2%)나 높다는 연구 결과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인간의 기본권인 교육기회에 대한 차별은 직업 선택의 제한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경제 수준과 사회적 지위에 대한 차별과 불이익을 가져와 결국 장애여성이 평생 고립된 삶을 살며 빈곤을 경험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어 왔습니다.
이처럼 장애인의 사회 통합과 자립생활이 이야기되고 있는 시점에도 많은 장애여성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영역에서 소외되고 있습니다. 이는 장애여성에 대한 법 제도가 장애여성을 빈곤과 폭력으로부터 보호 받아야 하는 ‘취약 계층’으로 규정하고 최소한으로 구제하는 데 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장애여성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꼭 필요한 사회 보장 또는 복지 제도조차 우리나라에서는 가부장적 사회 안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 혜택에 있어 기본적으로 성별 간 불평등이 존재해 왔습니다. 여성들은 주로 모성 혹은 양육을 지원하기 위한 공공부조의 수혜자인 반면, 남성들은 보험과 같은 ‘권리’에 기반한 프로그램의 청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장애여성은 비장애남성, 비장애여성뿐만 아니라 장애를 가진 남성에게서도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구조에 놓여 있게 됩니다.
이렇게 성인지적 관점이 없는 법 제도 속에서 장애여성은 가족 내에서도 권력의 최하위에 위치하며 자신의 권리를 박탈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장애여성의 가정폭력 경험을 살펴보면 주로 배우자로부터의 폭력이 대부분인 비장애여성에 비해 배우자 외에도 부모나 형제 자매 등 다른 가족구성원에게 전 생애주기에 걸쳐 폭력을 당하는 경우가 높게 나타나고 있으며, 신체적·성적·경제적 폭력 외에도 어릴 때부터 삶의 전반에 걸쳐 기본적인 권리를 억압하고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갈 기회를 박탈당하는 ‘사회적 폭력’에 처하는 경우가 많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애여성에 대한 법 제도는 장애여성이 피보호자의 역할에서 벗어나 독립적 주체로 권리를 누리며 살 수 있도록 교육, 고용, 복지 등 보다 다각적 방면에서 적극적으로 장애여성을 지원해야 합니다. 장애여성은 여러 교차적 불평등을 겪으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장애로 인한 무능력 때문이라 치부하며 무기력하게 살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불평등이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함께 해결해 나아가야 하는 공공의 문제임을 알게 해야 하고, 보다 세심한 지원을 통해 여러 사회적 환경에서 장애여성으로서 느끼는 차별 요소를 없애 나가야 합니다.
장애여성의 인권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이야기되는 성폭력에 대한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애여성의 성 인권은 1980년대 시설에서 일어난 성폭력이 활동가들로부터 터져 나오기 시작하며 장애여성 이슈로 대두되었기 때문에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권리’만 이야기 되어왔습니다. 가족, 교사, 시설종사자 등 보호자의 위치에 있는 이들은 장애여성을 성폭력의 위험으로부터 지킨다는 명목 하에 장애여성이 성적 욕구를 갖는 것 자체를 금기시했고 장애여성이 자신을 꾸미고자 하는 욕구나 연애에 대한 욕구를 막고 무성적 존재로 살 것을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장애여성의 결혼은 사랑하는 두 사람의 평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지기보다 ‘돌봐줄 수 있는 보호자를 만나야 하는 행위’로 이야기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장애여성은 언제까지나 폭력의 피해자이거나 보호의 대상자로 이야기되기 바라지 않습니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장애여성도 이 지구공동체를 살아가는 인간이기에 누려야 할 권리들이 있습니다. 장애가 프라이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차별을 없애는 데 함께 해야 합니다. 여기 오늘 국회는 장애여성과 페미니스트의 목소리를 듣기 바랍니다!
▲청소녀의 정치적 권리-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양지혜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여성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에 대해, 그리고 왜 여성 청소년의 이름으로 인권선언이 다시 쓰여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올 한 해, ‘스쿨미투’라는 이름의 학내 성폭력 고발이 이어졌습니다. 11월부터는 스쿨미투 집회가 곳곳에서 열리기도 했습니다. 여성 청소년은 언론에서 소비되어 온 무기력하고 보호받아야 할 피해자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고발자로, 동등한 시민으로 광장에 나섰습니다.
그간 학내 성폭력이 은폐되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여성 청소년이 말할 권리가, 정치할 권리가, 시민권이 삭제된 사회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쿨미투 고발이 교권침해라며 명예훼손을 거는 학교에서, ‘말 안들을 거면 집에서 나가라’는 가정에서, 청소년을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서 어떻게 부당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성 청소년은 ‘아직 미성숙하여 보호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삶과 사회에 영향을 행사할 권리를 박탈당했습니다. 여성 청소년은 언제나 세상을 바꾸는 주체가 아닌 문제 해결의 대상이었습니다. 비청소년만이 선거권을 갖는 사회에서, 여성과 청소년을 가정에 종속케 하는 가부장제 안에서, 성평등이 아니라 성차별을 가르치는 학교 현장에서, 여성 청소년은 언제나 동등한 인간일 수 없었습니다.
여성 청소년이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가지는 것은 단순히 ‘투표지 한 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간 여성과 청소년을 정상시민이 아닌 보호받아야 할 이등 시민으로 인식해온 사회를 바꾸는 일입니다. ‘여성은 감정적이어서 큰 일을 못할 것이다’, ‘청소년은 어려서 안된다’고 말하며 여성과 청소년을 비청소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규정해온 구시대적 인식을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여성 청소년과 소수자를 보호의 대상이 아닌, 사회변화를 만드는 정치적 주체로 인정하는 일입니다. 기본소득 등의 제도를 통해 시민권의 물적 토대를 보장하는 일입니다. 페미니즘으로 다시 쓴 인권선언은 가부장적 가족질서에 의한 청소년과 여성의 예속 철폐,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 확대, 획일적인 제도교육에 대한 거부권, 페미니즘 교육과 학내 성폭력 근절 등 여성 청소년의 참정권에 필요한 핵심적인 부분을 잘 짚고 있습니다.
인권은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다시 쓰여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소수자의 위치를 지우지 않는, 비청소년 남성 중심의 권력구조를 해체하는, 모두가 나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필요합니다.
▲차별금지법제정의 필요성-차별금지법제정연대 장예정
오늘은 세계인권선언 70주년입니다. 오늘 아침 정동 성공회 성당에서는 세계인권선언 7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 문재인 대통령도 축사를 하러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권단체들과 장애등급제 폐지를 바라는 장애인차별철폐연대활동가들이 모였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활동가들이 피켓시위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문이 아닌 지하통로를 통하여 기념식장에 들어갔습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 장애등급제를 폐지하라 라는 이야기도 듣지 않겠다고 외면하고 들어가는 대통령이 세계인권선언70주년을 어떤 언어로 축사를 하시려는겁니까. 지난 토요일 새벽, 국회는 200여개의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 중 차별금지법은 없었습니다. 아직 발의조차 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된 지 70년이 되는 오늘, 차별금지법이 발의조차 되지 못하는 현실을 정부와 국회는 뼈아프게 성찰하여야 할 것입니다.
▲인권선언70주년을 맞아 정부와 국회의 역할-세계인권선언70주년조직위원회 심기용
오늘은 세계인권선언이 공표된지 70년이 되는 날입니다. 세계인권선언은 전쟁 포화의 아픔을 딛고 삶과 생명의 존엄을 다시 세웠던 역사적 선언입니다. 한반도에 평화 바람이 부는 올해가 인권에 있어 기념비적인 해라는 것이 매우 뜻깊고 또한 기쁜 일이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제가 세계인권선언 7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국회와 정부에 인권이라는 말을 제대로 알고나 있느냐고 묻게 되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촛불 정부라고 자임하는 문재인 정부의 제3차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NAP가 올해 수립되었습니다. 내용과 구성이 엉망진창이라고 수 십개의 인권단체가 비판하여 미루고 미루다가 발표된 NAP에는 성소수자 인권 항목이 아예 삭제되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당선 이래로 한결같이 성소수자와 난민 등 시급히 대책이 마련되어야 할 혐오와 차별 사안에 방관했고 중립이라는 이름을 표방하며 적극적으로 차별의 편에 나서고 있습니다. 급기야 본인들의 경제적 무능을 노동자들에게 책임전가 하는 것을 보면서도 사람이 먼저라는 슬로건은 사실 당선이 먼저다라는 말을 숨기고 있었다는 점을 새삼 다시 깨달았습니다. 평화체제와 포용국가를 운운하면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 챙겨가겠다는 그 태도 어디에 인권이 있습니까. 그 누구도 내버려두고 가지 않겠다는 유엔 총회 기조연설은 모두 거짓입니다.
국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미투운동이 떠들썩하게 진행되는 요즘에 와서야 선심 쓰듯 여성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너도나도 자임하지만, 여론의 눈치를 보며 나아갈 뿐 근본적인 해결법은 제대로 논의되고 있지 않습니다. 인권에 관심 많은 척 하지만 살려달라고 국회에 뛰어들어가야 관심이라도 받을까 말까 합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라는 이름만 봐도 벌벌 떠는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들을 보십시오. 여당이고 의석도 제일 많이 차지하고도 여전히 표가 모자르다며 입법 논의조차 기피하고 있습니다. 국정감사와 인사청문회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동성애에 대한 혐오발언이 쏟아집니다. 인사청문회에선 신임된 인물들이 국회의원들이란 작자들의 ‘눈치’를 보게 되어 “성소수자 차별해서는 안 되지만 제도적으로는 차별해도 된다”는 요지의 발언이 가장 현명한 입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정말 전쟁이 끝났습니까. 그런데 이 나라에 인권이 어딨습니까. 정부와 국회가 인기와 인권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권은 환심을 사는 거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국회와 정부는 유관 인권단체들이 아니라 혐오와 차별을 선동하는 사람들과 인권 정책을 논의합니다. 부당한 차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과 곁을 나누지 않고, 가짜뉴스와 네이버 댓글과는 친하게 지내는 것 같습니다. 정부와 국회는 공공사회의 기강을 근본부터 흔들고 있습니다.
부디 죽음에게 너무 많은 역할을 맡기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오늘 세계인권선언 70주년을 맞아 페미니즘 선언을 다시 하고자 하는 것은 특정 여성의 권리를 상기시키고자 함이 아니라 평화라는 기만 속에 가려진 가혹한 차별들을 고발하고자 함일 것입니다. 세계인권선언70주년 조직위원회는 지난 주간에 인권주간을 실시하고 많은 행사를 치뤄왔습니다만, 그 어느 인권 부문에서도 자축하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올해도 너무 많은 죽음과 폭력과 모욕이 있었습니다. 돌아봐야 합니다. 한국이 유엔인권 국가 중 하나라는 사실이 오늘처럼 부끄러운 날이 없습니다. 국회와 정부는 뼈저리게 각성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