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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게 일하다 사라져버린 사람

“시골 저택에 사는 부인에게 ‘함께 사는 분이 없어요?’라고 물어본다고 가정하세. 질문을 받은 부인은 ‘하인 한 명, 마부 세 명, 하녀 한 명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라고 하지 않을 걸세. 비록 하녀가 방 안에 있고 하인이 바로 뒤에 있다 해도 말이야. 그 부인은 아마 이렇게 답하겠지. ‘네, 함께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무도 없다’가 이 사건에서의 ‘아무도 없다’일세. 하지만 어떤 의사가 전염병을 조사하면서 ‘함께 지내는 분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이 부인은 하녀와 하인,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을 기억해낼 걸세.”

[고병권의 묵묵]보이지 않게 일하다 사라져버린 사람

길버트 체스터턴의 추리소설 <보이지 않는 남자>에서 브라운 신부가 한 말이다. 범인이 예고한 살인을 저질렀는데도 입구를 감시하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지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범인은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와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 우편배달부였다. 체스터턴은 무언가를 숨기기 가장 좋은 장소가 평범한 일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물고기가 물을 보지 못하듯, 아이러니하게도 흔한 것은 흔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브라운 신부는 언어습관이 심리적 사각지대를 만들어낸다고 했다. 저택의 부인이 ‘혼자 산다’고 말한 것은 ‘남편이 없다’는 뜻이다. 다섯 명의 하인, 마부, 하녀가 ‘함께’ 살지만 부인은 적적하게 ‘혼자서’ 산다. 그런데 내 생각에 여기에는 언어습관 이상의 것이 담겨 있다. 본디 언어라는 게 삶에 대한 요약적 성격을 갖고 있어서 그럴 것이다(그래서 삶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말을 이해시킬 때 품이 더 든다). 하인, 마부, 하녀가 부인의 셈에서 빠진 것은 이들을 인생의 반려자로서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내 인생의 수고와 위험을 처리해줄 존재이지 나와 함께 그것을 헤쳐 나가는 존재는 아니다. 내 집에는 살아도 나와 함께 사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이처럼 언어의 사각지대는 살아가는 태도의 사각지대를 반영한다.

그러나 이들이 언제나 셈이 되지 않는 사물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전염병에 대해 조사할 때 부인은 이들을 빼놓지 않는다. 반려자로서는 한 번도 떠올리지 않은 존재들을 전염병의 보균자로서는 기막히게도 잘 떠올리는 것이다. 내 건강과 재산이 문제될 때, 다시 말해 문제의 존재로서는 이들이 내 눈에 너무 잘 띈다. 그러고 보면 ‘안 보이는 사람’은 어떤 때는 전혀 안 보이지만 어떤 때는 너무 잘 보인다.

태안화력발전소의 김용균. 그는 우리가 더 이상 볼 수 없는 젊은이지만 좀 전까지 회사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로서 살아 있었다. 그 말고도 이 발전소를 거느린 한국서부발전에는 네 명이 더 있었다. 보이지 않은 존재로 살다가 이제는 볼 수 없게 된 노동자들. 한국서부발전은 이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로부터 무재해 인증을 받았다. 덕분에 회사는 지난 5년간 산재보험료를 22억원 남짓 감면받았고 직원들도 무재해포상금을 5000만원 가까이 받은 모양이다. 한집에 살지만 함께 살지는 않았던 다섯 명의 하인처럼, 한 작업장에서 일했지만 함께 일하지는 않았던 하청업체의 다섯 명. 이들은 보이지 않게 일하다 끝내는 사라져버렸다. 죽거나 다친 사람은 없습니까. ‘네, 아무도 없습니다.’

김용균의 경우에는 심지어 시신도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구급대원이 시신을 수습하던 중에도 발전소 측은 컨베이어벨트를 재가동했다고 하니 말이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지만 발전소 측이 경찰 신고 15분 전에 컨베이어벨트 정비를 위해 정비업체에 연락했다는 보도도 있다. 만약 사실이라면 회사는 죽은 사람보다 멈춘 기계에 마음을 더 썼던 것이다.

태안화력발전소의 김용균. 그가 떠나면서 빈자리가 생겼다. 가족과 동료들은 그를 대신하는, 아니 그를 대신할 존재는 세상 어디에도 없음을 일깨우는, 빈자리를 껴안고 평생을 살아갈 것이다. 이 빈자리를 우리 사회가 소중히 생각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두렵다. 우리의 눈, 무엇보다 우리 사회 저택 주인들의 눈에는 함께 사는 사람이 보이지 않고, 그의 주검이 보이지 않고, 그가 떠난 자리가 보이지 않을 것 같아서.

장례식장에서 청와대 수석이 보인 태도는 정권 교체보다 어려운 것이 눈의 교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그는 “전국 발전소의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수는 알고 있냐”는 물음에 ‘토론하자는 거냐’는 식으로 답한 모양이다. 절망과 분노의 소리를 토론의 언어로 들었다는 것이 너무 놀랍다. 그가 보인 태도는 내 기억 속 가시 하나를 일깨운다. 2006년 9월이었다. 당시 정부는 주민들의 필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대추리의 빈집들을 철거했다. 그때 논평을 요구하는 기자에게 여당의 대변인이 했다는 말은 그와 그의 당, 그의 정부를 완전히 다시 보게 만들었다. 빈집 몇 개 부수는데 이야기할 게 뭐 있는가. 그는 그런 식으로 답했다. ‘있음’의 가장 쓰라린 형식일 수 있는 ‘비어 있음’을 ‘아무것도 없음’으로 치부했던 것이다. ‘네, 아무도 없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만납시다’라는 피켓을 든 김용균을 청와대가 만난 것은 그가 피켓 든 모습 그대로 영정이 된 후였다. 아마도 ‘대통령 만납시다’라는 말은 ‘대통령, 우리가 보입니까’였을 것이다. 그러니 대답을 해야 한다. 대통령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다. ‘네, 당신을, 당신의 빈자리를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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