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1919년 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이 위대한 역사는 조선의 위정자들에 의한 것이 아닌 민초들이 만든 것이다. 여기에 3·1만세운동의 대표자들이 그랬듯이 민중이 의지한 종교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종교야말로 위기의 시대에 사랑과 희생,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는 것이 본래의 역할이다. 백범 김구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민족독립을 위해 동학에 입문하고, 승려생활도 하였으며, 기독교에 입교하기도 하였다. 오직 한 가지 소원이 민족의 독립이었기에 종교의 힘을 빌리고자 한 것이다.
종교학자 류병덕은 최제우의 후천개벽사상, 김항의 정역사상, 강일순의 신명사상, 나철의 삼일철학, 박중빈의 일원철학을 근대 5대 철학이라고 불렀다. 통일이 되면 분단 이전의 이들 철학을 되살려 평화세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를 하워드 제어의 ‘회복적 정의’ 개념을 빌려 회복적 평화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자주적인 정신에 의거한 이 땅의 회복적 평화는 어떤 모습일까.
첫째, 개벽의 세상을 실현하는 것이다. 민중은 개벽을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가렴주구와 외세로부터 해방된 반봉건과 반외세의 자유로운 세상이다. 근대종교인들이 주창했던 다시개벽, 후천개벽, 정신개벽 등은 계급, 남녀, 직업, 빈부의 차별이 없는 세상으로 오늘날 민주주의사회에서 적폐를 청산하는 모든 과정과 상통한다. 이는 김구가 원했던 수준 높은 문화국가를 만들어가는 길이기도 하다.
유럽 국가들이 근대 식민지 약탈을 통해 물질적으로 번영한 것과는 달리 우리는 참된 인간의 가치, 즉 하늘의 마음, 하느님의 인격, 부처님의 성품을 가진 인간을 절대적 존재로 떠받드는 세상을 만듦으로써 세계인들이 인정하는 정신적인 선진국을 열망한다. 높은 도덕성을 갖추면 평화통일이 된 후에 세계 모든 종교는 물론 국가, 기업, 사회단체들이 이 땅에 자신의 기반을 두고 활동하길 희망하리라.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평화가 곧 경제”, “머지않아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와 함께 잘사는 혁신적 포용국가가 우리 앞에 도달할 것”이라고 언급한 것은 이러한 평화의 종주국이 되겠다는 포부인 것이다.
둘째, 종교의 황금률을 구현하는 나라다. 안중근 의사의 위패가 모셔진 일본 센다이의 대림사에는 안 의사가 쓴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이라는 족자의 복사본이 걸려 있다. 안 의사의 인품에 감동한 간수장 지바 도시치가 용서를 빌자 그에게 써준 것이다. 이 절이 간직했던 원본은 한국에 보냈다. 안 의사는 전쟁 중 포로로 잡힌 장군으로서 대접해 주기를 원했지만 일본은 테러리스트로 몰아갔다. 군인으로서 당당히 독립전쟁에 참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이 일본인에게도 그의 역할 또한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군인의 본분이라고 말한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상대방을 배려한 위대한 혼이다.
동학혁명의 강령인 ‘4대명의’에서는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기는 것을 으뜸의 공으로 삼고, 어쩔 수 없이 싸우더라도 사람의 목숨은 해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내 목숨이 중하면 남의 목숨도 중하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는 최제우의 가르침을 실천한 것이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고 말한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종교적 황금률인 것이다.
셋째, 인류를 한 집안 삼는 세계일가의 모습이다. 우주 저편에서 볼 때, 한 점에 불과한 이 지구는 하나의 세계일 수밖에 없다. 임시정부의 주석이 된 백범은 1941년에 ‘대한민국건국강령’을 발표했다. 조소앙의 삼균주의가 근간이 된 이 강령의 핵심이 균등사회 실현과 세계일가다.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통해 개인과 개인 간의 평등을 실현하고, 이를 확장하여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간의 평등을 이루자는 것이다. 최종 목표는 세계일가다. 대외전쟁을 위해 일왕을 정점으로 한 가족국가관을 국민에게 주입시킨 일본과는 격이 다르다.
우리 선조들은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의 근원이 동일성에 대한 욕망에 있음을 알았다. 같은 뿌리 위에 다양성의 조화라는 의식을 갖고 있던 것이다. 안 의사는 옥중에서 쓴 <동양평화론>에서 각 나라가 서로 존중하는 가운데 상부상조하며 동양 및 세계 평화를 이루길 염원했다. 최시형이 설한 인오동포(人吾同胞), 물오동포(物吾同胞), 즉 나와 남은 물론 모든 존재와 내가 한 포태라는 사해동포주의에 다름이 아니다. 이러한 회복적 평화가 이 땅에서 이뤄진다면 머잖아 지구촌에 평화의 한류바람이 태풍처럼 휘몰아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