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의혹의 정점으로 꼽힌 양승태 전 대법원장(71)이 24일 구속됐다. 서울중앙지법 명재권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전날 양 전 대법원장의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진행한 뒤 이튿날 오전 2시쯤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명 부장판사가 밝힌 양 전 대법원장의 구속영장을 발부 사유는 크게 ‘중대한 범죄사실 소명’과 ‘증거인멸 우려’로 나뉜다. 명 부장판사는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하면서 “범죄사실 중 상당부분 혐의가 소명되고, 사안이 중대하다”고 밝혔다. 검찰이 수사해 제시한 양 전 대법원장의 40여개 혐의 중 상당수가 인정된다는 뜻이다.
23일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영장실질심사를 마치고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을 나서고 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검찰이 밝혀낸 양 전 대법원장의 대표적 혐의는 ‘박근혜 청와대’와 재판 거래를 통해 일제 강제징용 사건 등 재판에 부당하게 직접 개입한 부분이다. 양 전 대법원장이 일제 전범기업에 대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직접 개입한 정황이 검찰 수사 과정에서 다수 드러났다.
양 전 대법원장은 주심인 김용덕 전 대법관에게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확정되면 국제법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또 양 전 대법원장은 대법관회의에서 외교부가 의견서를 낼 수 있게 민사소송규칙을 바꾸고, 전범기업 측을 대리한 김앤장 법률사무소의 한모 변호사를 세 차례 이상 만났다.
검찰은 이밖에 이규진 전 양형위원의 업무수첩에 대법원장 지시사항이 적혀 있고, ‘판사 블랙리스트’ 문건의 법관 이름 옆에 양 전 대법원장이 직접 V자 표시한 점을 결정적인 직접 개입의 증거로 판단했다.
검찰은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양 전 대법원장의 직접 개입 증거가 많았기 때문에 이미 구속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장(60)과 공모관계를 입증할 필요성이 줄어들었다. 앞서 법원은 양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장을 지낸 박병대(61)·고영한(62) 전 대법관의 사전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법원은 이들이 직접 범죄혐의에 개입한 증거가 뚜렷하지 않은 상황에서 구속된 임 전 행정처장과 공모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점을 기각 사유 중 하나로 들었다.
법원은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 사유 중 하나로 ‘피의자의 지위 및 중요 관련자들과의 관계 등에 비추어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는 점을 들었다. 증거인멸 우려는 양 전 대법원장의 ‘모르쇠’ 전략이 자초했다는 분석이 많다. 양 전 대법원장은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기억이 안난다”,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일관했다고 한다. 그는 23일 영장실질심사에서 증거가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고, 모함이라는 취지로 의혹을 제기했다.
법원은 양 전 대법원장이 증거 조작 의혹까지 제기하자 불구속 상태에서는 수사선상에 오른 다른 인사들과 말을 맞출 우려가 크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법원이 구속영장을 발부하면서 ‘피의자의 지위’를 언급한 것은 양 전 대법원장이 후배 판사들에게 회유, 압박할 가능성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양 전 대법원장은 이미 검찰 조사에서도 후배 판사들이 알아서 한 일이라는 취지로 진술했다. 후배 판사들에게 책임을 떠넘긴 셈이다.
결국 법원은 전직 대법원장으로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양 전 대법원장 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