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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다·만·세 100년,영국 마을 ‘뉴몰동’서 그려 본 ‘작은 남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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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다·만·세 100년,영국 마을 ‘뉴몰동’서 그려 본 ‘작은 남북’

한국 이민·탈북자 10여년간 공존

일상 함께할 미래 ‘통일 사회’ 단서

북한 출신인 김복순 할머니(가명·가운데)가 지난달 30일 영국 코번트리대 한국학연구소 개소식에 초대받아 남한 할머니들과 함께 부채춤 공연을 펼치고 있다. 코번트리대  한국학연구소 제공 사진 크게보기

북한 출신인 김복순 할머니(가명·가운데)가 지난달 30일 영국 코번트리대 한국학연구소 개소식에 초대받아 남한 할머니들과 함께 부채춤 공연을 펼치고 있다. 코번트리대 한국학연구소 제공

분홍색 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고, 머리에 족두리를 쓴 김복순 할머니(77·가명)가 무대에 올랐다. 두 손에는 부채를 쥐었다. 김 할머니는 북한에서 왔다. 2003년 남한으로 내려왔고, 2008년 다시 영국 런던의 뉴몰든으로 건너왔다.

그 옆에는 전정숙 할머니(70)가 섰다. 전 할머니는 30년 전 한국에서 영국으로 이주했다. 지금은 뉴몰든에서 민박집을 운영한다. 전 할머니는 “북한 사람은 다 머리에 뿔 달린 줄 알았다”고 했다. 평생을 그렇게 배웠다. 이북에서 왔다고 하면 민박집 손님으로도 받지 않았다. 낯설고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랬던 전 할머니가 이제는 김 할머니와 한 무대에서 함께 호흡을 맞춰 춤을 춘다.

두 할머니는 뉴몰든 영국 한인노인회에서 처음 만났다. 노인회 문화센터에서 함께 가야금·부채춤을 배웠다. 지역 안팎에서 행사가 열리면 여러 차례 공연도 했다. 오늘도 그런 날이다. 최근 문을 연 코번트리대 한국학연구소에서 개소식 공연을 해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다른 노인회 회원들과 함께 아침 일찍 뉴몰든 노인회관에 모여 이곳에 왔다. 차로 두 시간 거리다.

코번트리대 인근 세인트메리 길드홀. 700년 전 지어진 고풍스러운 중세 건물이다. 먼 옛날 지역 상인 길드가 본부로 썼다고 한다. 창마다 스테인드글라스가 반짝거리는 이곳 무대에서 한복을 입은 남북한 할머니들이 부채춤을 췄다.

할머니들이 거주하는 뉴몰든은 남과 북 주민들이 한데 부대끼며 살아가는 공간이다. 기존 한인타운에 탈북민들이 들어와 함께 산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흔치 않은 사례다. 뉴몰든의 하루하루가 궁금했다. 남북 화해와 평화, 통일에 대한 기대까지 커지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 북한을 잘 모른다.

남한 사람과 북한 주민들은 일상에서 만날 때 어떤 모습일까. 지난달 28일부터 일주일간 뉴몰든에 머물며 ‘작은 남과 북’을 살폈다. 그곳에서 공존을 위한 단서를 봤다.

<2부> 다시 100년의 꿈 … 공존과 평화로

③ 남·북한인 공동체 마을 ‘영국 뉴몰든’

[신년기획]다·만·세 100년,영국 마을 ‘뉴몰동’서 그려 본 ‘작은 남북’

◆뉴몰든 남북한인, 10년을 함께 살았지만 ‘가깝고도 먼 이웃’

뉴몰든은 런던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런던 킹스턴어폰템스구와 머턴구에 걸쳐 있다. 뉴몰든에는 대기업 주재원들을 중심으로 1990년대 초반부터 한인타운이 본격 조성되기 시작했다. 김 할머니 같은 탈북민도 700명 정도 산다. 대부분 남한에 내려왔다가 다시 영국으로 이주한 경우다.

■ “통일촌 뉴몰동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탈북민들의 영국행은 2004년 영국 정부가 북한인을 난민으로 인정하면서 시작됐다. 특히 2006~2008년 성황을 이뤘다. 영국에 가면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 안정적으로 머물 수 있고, 복지 혜택도 크다는 소문이 남한 내 탈북민 사회에서 돌았다. 영국에 발을 디딘 탈북민들이 뉴몰든 한인타운에 몰려든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서 일자리를 구하려니 다른 길이 없었다. 생활편의도 뉴몰든이 다른 동네보다 훨씬 나았다.

남북에서 온 뉴몰든 주민들은 교회나 일터에서 일상의 이웃으로 만난다. 노인회의 남북한 할머니·할아버지들도 지난 10여년간 어울려 살았다. 지금도 노인회 문화센터에 모여 무용, 공예, 가야금, 필라테스를 배우고 점심식사를 함께한다. 화요일 하루는 북한 할머니들이 감자옹심이며 옥수수국수 같은 북한 음식을 만들어 내놓는다.

“이제는 남한이고 북한이고 구분 자체를 안 하게 됐어요. 이렇게 인터뷰할 때나 ‘아 맞다, 언니 북한이지’ 하고 한번씩 떠올리는 정도죠.” 무용반 자원봉사자로 코번트리대 무대에 함께 오른 손호자씨(53)의 말이다. 같은 자원봉사자인 하점순씨(54)가 웃으며 말을 보탰다. “통일촌 뉴몰동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영국 런던 뉴몰든 시내 한인 상점 창문에 한글로 ‘급구 직원모집’이라고 쓴 종이가 붙어 있다. 뉴몰든 | 심진용 기자

영국 런던 뉴몰든 시내 한인 상점 창문에 한글로 ‘급구 직원모집’이라고 쓴 종이가 붙어 있다. 뉴몰든 | 심진용 기자

■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뉴몰든 지하철역 앞을 가로지르는 하이스트리트 양편으로 식당 등 한인 가게들이 점점이 박혀 있다. ‘AGASSI, ‘BINGSOO’ ‘SORABOL’ 등 한국말을 영어 알파벳으로 표기한 간판이 눈에 띈다. 대형 한인마트도 걸어서 30분 거리에 2곳 있다. 많은 탈북민들이 이런 한인 식당이나 마트에서 종업원으로 일한다.

뉴몰든 한인과 탈북민 사이는 보통 이처럼 고용과 피고용 관계로 규정된다. 남북 모두 서로를 필요로 한다. ‘북한 사람 없으면 한인 가게 안 돌아간다’는 말이 나온 지 오래다. 이민 규제가 강화되면서 한때 2000명에 달했던 중국동포(조선족) 다수가 중국이나 한국으로 돌아갔고, 한인 유학생 취업도 어려워진 탓이다. 탈북민들도 한인들이 없었다면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남북한 모두 ‘서로 필요한 관계’를 넘어서기는 어렵다. 한 한인은 “물에 기름이 떠 있는 사이로 보면 된다”고 했다. ‘통일촌 뉴몰동’은 뉴몰든 분위기 전반과는 거리가 멀다. 노인회 사례는 예외에 가깝다.

살아온 문화도, 지금의 위치도 다르다. 속 깊은 대화를 나누기는 어렵다. 탈북민 김인수씨(53·가명)는 이렇게 말했다. “같이 술을 마셔도 이야기하는 주제가 달라요. 남한 사람들은 비즈니스 이야기해, 골프 치는 이야기해. 우리는 골프 안 쳐, 비즈니스 안 해. 이야기가 되겠냐는 말이에요.” 한인 주민 오영순씨(60·가명)는 “북한분들하고 대화하는데 ‘혁명’이니 ‘전투’니 하는 말들이 수시로 나오더라”면서 “그분들은 그냥 잘해보자고 하는 말이지만 거칠게 들리기는 했다”고 말했다. 한인 주민 박형식씨(60·가명)는 “대화하다 간단한 영어 단어 하나가 나와도 북한 분들은 잘 못 알아듣는 경우가 있다. 분위기가 썰렁해진다”고 했다.

탈북민들은 적지 않은 한인들로부터 ‘얕잡아 보는’ 시선을 느낀다고 했다. “잘사는 사람이면 자전거 타고 출퇴근해도 멋있게 봐요. 그런데 북한 사람이 그렇게 하고 다니면 차 살 돈도 없어서 그러고 다니냐고 하거든요.” 그러다보니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명품을 사고, 좋은 차를 사고, 자녀 교육에 투자하는 경우도 생긴다. 뉴몰든에서 2년째 이주민 사회를 연구 중인 런던대 동양아프리카연구원(SOAS) 김미선 박사는 이런 일들이 탈북민들의 자존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신년기획]다·만·세 100년,영국 마을 ‘뉴몰동’서 그려 본 ‘작은 남북’

■ “남한에서 정착지원금 받고 살더니…”

박수연씨(42·가명)는 2007년 영국에 왔다. 다른 탈북민들처럼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덕에 비교적 쉽게 영주권을 얻었다. 영주권을 얻으면 주거가 확보된다. 각종 복지혜택도 받을 수 있다. 박씨는 주거지원비와 양육비 등을 합쳐 매달 1600파운드(약 230만원) 정도를 정부에서 받는다. 딸 하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딸이 열 살 되면서 수급액도 약간 더 늘었다. 자녀 성별이 다른 만큼 방이 하나 더 필요할 것이라는 계산에서다. 영주권자 부모 아래 영국에서 태어난 두 자녀는 자동으로 시민권까지 얻었다.

영주권 얻기도 쉽지 않은 한인들 입장에서는 이런 ‘혜택’에 박탈감을 느끼기도 한다. “남한에서 정착지원금 받아먹고 살더니 여기 와서도 베니핏(benefit·복지수급) 받고 산다” “편법으로 난민 인정 받아서 나보다 더 편하게 산다” 이런 말들이 나오는 이유다.

남한에서 영국으로 재이주한 탈북민들은 원칙적으로 난민 신분을 인정받기 어렵다. 돌아갈 곳이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탈북민들은 남한이 아닌 북한에서 왔다고 주장해 난민 지위를 얻었다. 2008년까지만 해도 난민 심사가 비교적 허술했기 때문에 통했던 방법이다.

김인수씨는 한인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 대해 “대한민국도 아니고 영국 와서 세금 좀 받아먹으면 안되느냐. 그걸 그렇게 못마땅하게 생각해야 하느냐”고 말했다. “같은 민족끼리 왜 그렇게 야박하게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쥐구멍 안 같은 어두운 인생 살다가 이제 겨우 숨 좀 쉬고 산다. 우리는 도움이 필요하다. 지난 인생 어디에서든 보상받고 싶은 심리가 있다”고 그는 말했다.

탈북민들은 한인들의 소득과 생활수준을 계속 비교하게 되는 자기 모습도 싫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한인들과 거리를 두게 된다. 일터에서 마주치는 관계로만 제한하게 된다.

“우리는 수입이 다르니까 한국 엄마들 식으로 애들 공부를 가르칠 수가 없어요. 억지로라도 공부 시키려고 하면 ‘너희가 무슨 돈이 있어서 그런 걸 하냐’ 이런 말도 나오고.” 두 딸을 키우는 탈북민 엄마 조유라씨(37·가명)는 “계속 비교당하고 위축당하고 하다보니, 차라리 ‘그러면 안 만나고 살지’ 하게 되더라”고 말했다.

뉴몰든 탈북민 사회는 지난해 한인회장 선거로 들썩였다. ‘탈북민도 한인들과 똑같이 선거에 참가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투표는 해도 후보 출마는 안된다’ ‘투표도 출마도 안된다’고 한인들은 갑론을박했고, 탈북민들 반응도 엇갈렸다.

지난해 12월 지역 한인신문에는 “참가 여부는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 왜 우리들의 참여 문제를 한인회가 마음대로 결정하는가”라고 따져 묻는 탈북민의 기고글이 실렸다.

한인들이 탈북민을 표몰이 대상으로 생각한다는 말이 나왔다. 한인들 일부는 자칫하다 탈북민 회장 나오는 거 아니냐며 민감하게 반응했다. 한인회장 선거는 결국 파행됐다. 갈등이 커지면서 후보 2명 중 1명이 사퇴했다. 남은 후보가 선거 없이 회장에 당선됐다.

뉴몰든 한인 가운데 탈북민을 ‘2등 시민’으로 보는 이가 없지 않다. 소득과 학력 차이를 그 근거로 삼는다. ‘믿지 못할 나라’ 북한에서 왔다는 사실도 편견을 키운다. 그래서 탈북민들은 한인들에게 무시당한다고 여긴다. 자격지심도 느낀다. 일터와 교회의 일상은 평온해 보이지만 속사정은 다르다.

뉴몰든 중심가 뒤편의 주거 구역. 한인들과 탈북민들이 모여 사는 공간이다. 뉴몰든 | 심진용 기자

뉴몰든 중심가 뒤편의 주거 구역. 한인들과 탈북민들이 모여 사는 공간이다. 뉴몰든 | 심진용 기자

■ 서울과 뉴몰든

탈북민들은 남한과 비교하면 그래도 뉴몰든이 훨씬 살기 편하다고 말한다. 런던 인구 과반수가 이민자 출신이다. 최근 몇 년, 급격히 보수화하고 있다지만 다원주의 측면에서 영국은 한국보다 훨씬 더 열려 있는 사회다. 탈북민 구승민씨(40)는 “남한에서 하던 식으로 북한 사람들 대하면 여기서는 큰일난다”고 말했다. 남한 사회에서 탈북민은 숨죽여 살아야 하는 낯선 손님이었다. 뉴몰든은 다르다. 김인수씨는 “여기서는 남한이든 북한이든 다 같은 이방인”이라며 “너 잘났니, 나 잘났니 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말이 안되는 일”이라고 했다.

뉴몰든에서도 한인 인구가 더 많다. 경제력도 차이가 난다. 하지만 그 격차는 남한 사회에서보다 훨씬 작다. 같은 소수민족 처지에서 한인이 탈북민을 무작정 무시할 수는 없다. 탈북민 자체도 ‘대체할 수 없는 인력 공급원’이라는 힘을 가지고 있다. 탈북민들은 한인들과의 격차가 줄수록 관계도 건강해진다고 생각한다.

구승민씨는 “성공하는 북한 사람이 많아지고, 입장이 대등해져야 된다. 그러면 정착금 받아먹고 산다는 소리부터 많이 줄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탈북민들은 영국 사회에 빠르게 정착했다. 영어 한마디 못하면서 무작정 식당 홀에 서야 했던 조유라씨는 이제 한인 손님과 현지인 손님을 각각 어떻게 응대해야 하는지 구분하게 됐다.

경제적 성공사례도 늘고 있다. 한인 식당에서 서빙하던 탈북민이 자기 가게를 차리고 분점을 낸다. 임대주택에 살던 탈북민이 자기 집을 사서 세를 놓는 경우도 생겼다. 오종호씨(52·가명)가 그런 경우다. 그는 ‘뉴몰든에서 성공한 북한 사람’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오씨는 뉴몰든 한인 마트 부점장이다. 한인 사장과 점장을 제외하고 그가 관리하는 직원이 100여명이다. 한국, 북한, 중국, 인도, 파키스탄, 에스토니아, 폴란드, 영국까지 직원들 출신지도 다양하다.

“영어 못해, 컴퓨터 못해, 거기에 북한놈이지. 무시도 적잖게 받았지만, 결과로 승부 보면 된다고 생각했지요.” 오씨는 영국에 오기 전 남한에서 트럭을 몰고 과일장사를 했다. 마트에서는 그 경험을 살려보라며 청과부에 배치했다. 일솜씨가 야무져 빠르게 승진했다. 입사 일주일 만에 청과부 팀장이 됐고, 1년 만에 부점장이 됐다. 오씨는 “마트가 막 개점했을 때라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나 스스로도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영국 런던 뉴몰든의 한인 아이들과 북한난민 아이들, 영국인과 한인 부부 아이들이 한데 모여 공부하는 런던한국학교에서 지난 2일 윤하나양(11·왼쪽)과 어머니를 만났다. 윤양 어머니는 “아이들 다니는 학교에는 남한도 북한도 없다”고 말했다. 뉴몰든 | 심진용 기자

영국 런던 뉴몰든의 한인 아이들과 북한난민 아이들, 영국인과 한인 부부 아이들이 한데 모여 공부하는 런던한국학교에서 지난 2일 윤하나양(11·왼쪽)과 어머니를 만났다. 윤양 어머니는 “아이들 다니는 학교에는 남한도 북한도 없다”고 말했다. 뉴몰든 | 심진용 기자

◆‘노스’와 ‘사우스’ 구분 희미해진 이 아이들이 새 미래 열까

■ 뉴몰든의 아이들이 자라면

탈북민 사회 내부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한인들에게 다가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인들 도움이 없었다면 탈북민의 영국 정착은 쉽지 않았다. 이를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뉴몰든의 남과 북은 앞으로도 부대끼며 협력해야 하는 사이다. 지금보다 깊이 있는 관계가 서로 낫다.

다만 시간이 필요하다. 분단의 간극은 아직 엄연하다. 지난해 남과 북 정상이 평화와 화해를 두고 대화했다. 한인들은 환영했지만 탈북민들은 냉소했다. 탈북민들에게 북한은 언젠가 돌아가야 할 고향인 동시에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가득한 공간이다. 정권이 무너지기 전에는 변화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번엔 다르지 않겠냐는 뉴몰든 한인들을 보며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생각한다.

학자들은 이주민 사회가 오히려 더 보수적인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본국을 떠나던 당시 인식이 박제된 상태로 남아버리기 때문이다. 한인도, 탈북민도 오래전 고향을 떠나왔지만 간직한 기억은 그대로다. 제3의 공간에서 만났지만 결국 남한 사람은 남한 출신, 북한 사람은 북한 출신이라는 선입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오종호씨는 “우리 세대에서 남북한 차이를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뉴몰든 한인·탈북민 자녀들

수많은 문화·인종 속에 자라

분단의 기억과 경험은 흐릿

영어가 편한 3공간의 정체성

뉴몰든의 다음 세대에 기대를 걸어볼 수는 있을까. 지금 뉴몰든 탈북민 대다수는 40~50대다. 이들의 자녀가 이제 10대 초중반으로 접어든다. 남한에서 태어나 아주 어린 나이에 이곳에 왔거나 영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은 어른들과 세상을 향한 시야가 다르다. 영국인으로 태어나 다양한 문화와 인종 속에 자랐다. ‘노스’와 ‘사우스’의 구분도 흐릿하다. 분단의 기억과 경험은 이 아이들과 거리가 멀다.

김인수씨 아들 민호(15·가명)를 만났다. 민호는 한국말이 서툴다. 인터뷰도 영어로 했다. 민호는 주중에는 일반 학교를 다니고, 토요일 하루는 차로 20분 거리인 런던한국학교에 간다. 한인 자녀, 탈북민 자녀, 영국인과 한인 부부 자녀들이 한데 어울려 공부하는 학교다.

민호의 가장 친한 친구는 움마와 리오다. 움마는 파키스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리오는 어디에서 왔는지 잘 모른다고 했다. 토요일 한국학교에서는 준규와 가장 친하다. 한인 아이다. 민호에게 북한은 교과서에나 나오는 나라다. 아버지는 “북한에 두고 온 네 누나를 꼭 한번 찾아봐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피부로 와닿지 않는다. 다른 아이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박수연씨의 열 살 큰딸은 어머니의 나라를 모른다. “목숨 걸고 이 나라까지 왔다고 해도 딸은 이해를 못해요. ‘기차 타고 오면 되지 않느냐’ ‘배고프면 라면 사서 먹으면 되지 않느냐’ 그렇게 물어봐요.”

영국 일정 마지막 날인 토요일, 민호가 다니는 런던한국학교를 찾았다. 아이들은 각층 교실마다 반별로 흩어져 수업을 듣고 있었다. 바깥 놀이터에서는 서른 명 남짓한 아이들이 어울려 놀고 있었다. 지난밤 쌓인 눈을 던지며 놀았다. 아이들 얼굴로 남북을 구분할 방법은 없었다. 억양으로도 구분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태어나 자란 나라의 말, 영어가 훨씬 편할 수밖에 없다.

한국학교 학생은 350여명이다. 탈북민 가정 아이는 30명 정도다. 배동진 학교장(50)은 “출신을 밝히지 않는 분들도 있어서 실제로는 좀 더 될 것”이라며 “정확하게 몇 명인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북한인지 남한인지 캐물을 이유도, 필요도 없다는 설명이었다.

이들이 앞으로 펼쳐갈 관계

남북이 건강한 관계 맺는데

필요한 모범답안이 될 수도

이날 한국학교에서는 민호가 속한 중학교 3학년 아이들과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의 졸업식이 열렸다. 중학교 3학년 아이들은 이제 영영 한국학교를 떠난다. 이 아이들이 성장해 어떻게 서로 어울리게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아이들이 남한, 북한 구분 없이 살게 될지도 확신할 수 없다. 부모세대가 못 이룬 통일을 이 아이들이 해낼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도 어렵다. 졸업하는 민호는 교지에 “앞으로 한국학교를 안 오면, 그동안 지내던 친구들이랑 연락이 끊길 것”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뉴몰든 아이들의 관계는 부모세대와는 다를 것이다. 한반도 남과 북의 관계와도 다를 것이다. 문화 다양성을 체화하고, 어릴 때부터 한데 어울린 아이들이다. 뉴몰든 탈북민들도 아이들은 자신들과 다른 식으로 한인 아이들과 관계 맺기를 소망하고 기대한다. “우리 대에서는 남한이다, 북한이다 그 차이를 못 없앤다. 불가능하다”라던 오종호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한국에서 왔지, 북한에서 왔지 그런 거 없어요. 그냥 브리티시(British)예요. 그런 아이들끼리는 앞으로 뭐가 달라도 다르지 않겠습니까.”

◆“영국서 살기 더 편하다는 북한난민들 한국 사회는 다원주의 수용 고민해야”

‘뉴몰든’ 연구논문 쓴 이수정 덕성여대 교수

이수정 덕성여대 교수가 지난 18일 서울 광화문의 한 커피숍에서 한인과 북한난민이 모여 사는 영국 런던 뉴몰든 사례가 남북 협력과 교류에 무엇을 시사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이수정 덕성여대 교수가 지난 18일 서울 광화문의 한 커피숍에서 한인과 북한난민이 모여 사는 영국 런던 뉴몰든 사례가 남북 협력과 교류에 무엇을 시사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위계관계 아닌 대등한 관계

공동 목표와 협력 필요 조건

북 지하 자원·값싼 노동력 등

희망사항만 갖는 건 큰 착각


“한인과 북한난민이 모여 사는 영국 뉴몰든의 북한난민들이 가장 많이 얘기하는 것 중 하나가 ‘여기는 다원성이 강한 사회다. 그래서 한국보다 오히려 여기가 훨씬 더 살기가 편하다’는 것입니다.”

지난 18일 서울 광화문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덕성여대 이수정 교수(문화인류학)는 이렇게 말했다. 이 교수는 2013년 한 달 동안 뉴몰든 현지에 머무르면서 한인들과 북한난민들 관계를 연구한 후 논문을 썼다. 꾸준히 뉴몰든을 방문하며 관련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 뉴몰든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앞으로 남북한이 보다 활발하게 상호작용을 한다면 탈북민들이 국내에서 원주민들과 관계를 맺는 모습보다는 영국 사회에서 북한난민과 한인 이주민들의 모습을 닮아갈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 왜 그런가.

“국내에 있는 탈북민들은 위계구조에서 철저한 아래다. 남북이 앞으로 전면적인 교류를 한다고 했을 때, 북한 주민들이 그런 위치에 만족할지 생각해야 한다. 뉴몰든 북한난민들이 많이 이야기하는 게 ‘우리가 한국에서 너무 기죽어 살았는데, 여기 와서는 달라졌다. 한국 사람들이 탈북민 대하듯 북한 주민을 대하면 북한 주민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는 거다.”

- 국내 탈북민들과 관계하는 방식이 문제라는 것인가.

“서로 다른 문화가 성공적으로 접촉하기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조건이 있다. 공동의 목표가 있어야 하고, 협력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굉장히 중요한 게 관계가 대등해야 한다는 거다. 위계관계로 만나게 되면 하위집단들이 접촉 자체를 불만스러워한다.”

- 통일·교류를 말하면 북한 지하자원이나 싼 노동력을 어떻게 이용할지 이야기가 먼저 나온다.

“큰 착각이다. 북한 주민들 입장이라든가 받아들이는 마음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얘기들이다. 우리들만의 희망사항을 얘기하는 것일 수 있다. 남북의 관계가 그렇게 간단하게 될 수는 없을 것이다.”

- 뉴몰든 북한난민들은 남북 대화에 부정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북한이 경제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고난의 행군’ 무렵에 북한을 떠난 분들이 많다. 체제를 신뢰했는데, 어느 날 사회가 무너지고 가까웠던 사람들의 죽음까지 목격했다. 처참했던 기억과 배신감 때문에 북한은 변화할 수 없는 사회라는 인식을 가진 경우가 많다.”

- 북한난민들이 다양성을 계속 이야기하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뉴몰든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이 그 부분이다. 우리 사회를 보면 남북 평화라든가 관계맺음의 담론을 다원주의나 다문화를 수용하는 담론과 전혀 별개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남북 통합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과 우리 사회에서 차별에 반대하고 다원주의를 수용하는 것은 분리돼 있지 않다. 뉴몰든 북한난민들이 가장 많이 얘기하는 것 중 하나가 ‘여기는 다원성이 강한 사회다. 그래서 한국보다 오히려 여기가 훨씬 더 살기가 편하다’는 것이다.”

- 한국 내부의 다원성 수준이 중요하겠다.

“2013년 영국 정부 관계자들한테서 ‘북한 난민들은 모델난민’이라는 말을 들었다. 어떤 난민 집단들보다 정착이 빠르고, 생활력도 강하다고 했다. 한국에서 탈북민을 위험하고 문제있는 집단으로 여기는 것과 인식이 다르다. 같은 북한 출신 집단인데 어디서 그런 인식 차이가 나오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 뉴몰든의 후속 세대들이 성장하고 있다.

“다른 이주민 사회를 보면 어릴 때는 민족 정체성을 생각하지 않다가도 성장한 뒤 주류사회의 ‘유리천장’에 부딪히면서 다시 민족 정체성이 강화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금 뉴몰든 북한난민 1.5세대는 이제 막 대학생이 되거나 10대 중반에 접어들고 있는데, 이 세대들이 앞으로 한인들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게 될 것인지는 더 지켜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특별취재팀 | 강병한·유정인·심진용·박광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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