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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놈, 김 과장

정치학자 전인권의 글은 가수 전인권의 노래만큼이나 빼어났다.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글은 다시 읽어도 여운이 짙다. 그가 겪은 얘기 한 토막을 잘라서 옮겨본다.

[김택근의 묵언]전라도 놈, 김 과장

“나는 판매부서에 근무했던 영업사원이었다. 그 당시 광주·전남지역의 영업소장은 전라도 광주사람이었다. 이름은 김영진(가명)씨였고, 직급은 과장이었다. 어느 날 영업회의가 끝난 후 회식을 하는데 옆 부서의 박 부장이 동석했다가 아주 끔찍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야! 김영진, 전라도를 뚝 떼어다가 대동강 김일성 별장 옆에다 갖다 붙이지그래!’ 나는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그때가 85년, ‘광주사태’가 발생한 지 5년이 지난 후니까, 그것이 새삼스럽게 화제가 되리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너 그때 김일성찬가 불렀지? 아주 전라도 인민공화국을 만들어버리지 그랬어! 빨갱이 새끼, 여기는 뭐하러 왔어?’ 시간이 지나고 술에 취할수록 박 부장의 인신공격은 더욱 심해졌다. 나도 대학생 운동권 시절 경찰서에 끌려가 ‘이 새끼는 빨갱이야!’라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무지막지한 인신공격은 처음 보았다.

참으로 안타까웠던 일은 김 과장의 태도였다. 그런 폭언을 듣고도 김 과장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거의 할 말을 잃고 있었다. 그런데 김 과장은 가끔 가다가 모깃소리만 하게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평화적인 시위였다고……태극기를 흔들고. 아줌마들이 김밥을 싸오고…….’

나는 그게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그 마당에 평화와 태극기는 뭐고, 김밥이 뭐가 중요하다는 것인가? 나 같으면 당장 술상을 엎어버리고 박 부장과 맞붙었을 테지만, 김 과장은 알아듣기 어려운 소리만 중얼거릴 뿐이었다.”<김대중을 계산하자>

강원도 사람 전인권은 연민의 눈으로 ‘전라도와 전라도사람’을 읽어내고 있다. 그때 박 부장은 전라도 사람들을 빨갱이라 믿어서 그리 막말을 했을까. 아니다. 그에게 전라도 사람은 그냥 기분 나쁜, 막연히 불온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김 과장에게 고향 전라도는 생존의 걸림돌이자 수모의 원천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달라졌는가. 아니다. 지금도 지역차별은 여전하다. 장관 몇 자리 더 챙겼다고 달라진 것은 없다. 5·18민주화운동을 향한 왜곡과 조롱은 끊이지 않고 있다. 아무나 아무 때나 5·18을 모독하고 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음에도 변함이 없다.

다른 도시였다면 난리가 났을 일들이 태연히 벌어지고 있다. 광주시민 학살의 수괴 전두환은 전라도 땅에 와서도 소리쳤다. “이거 왜 이래.” 전라도 사람 귀에는 이렇게 들렸다. ‘이거 왜 이래, 전라도 놈들.’

또 전두환을 추종하는 무리가 ‘전두환 물러가라’라고 외친 초등학교를 찾아가 구호를 외치고 시가지를 누볐다. 극우의 테러이며 난동이다. 그럼에도 전라도는 그날 평온했다. 5·18을 향해 망언을 쏟아낸 국회의원들은 ‘예상대로’ 건재하다. 저들을 규탄한다고 올라온 광주의 어머니들만 땅을 쳤다. 그리고 이내 끝이다. 아마 그 어머니들도 지쳐서 지금쯤 돌아갔을 것이다.

선거법보다 중한 것이 ‘5·18왜곡처벌법’이다. 지역 차별로 민족을 분열시키는 것보다 더 나쁜 범죄가 있는가. 전라도를 고립시켜 남남 갈등을 부추기는 극우의 망동이야말로 북이 좋아할 빨갱이짓이다. 5·18을 제자리에 세우지 않으면 나라의 미래도 없다. 그럼에도 김 과장들이 뽑아준 전라도 의원들은 뭐가 중한지를 모른다. 처음에는 핏대를 세우다가 이제는 더듬이를 세워 정계개편 향방을 좇으며 조용히 여당에 아부하고 있다. 국회 내의 얌전한 김 과장들이다.

“5·18 진상규명은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과 정의의 문제”라던 대통령은, 그리고 여당은 또 무얼 하는가. 5·18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겠다는 약속은 어찌 되어 가는가. 아마 다른 현안이 엄중하고 정권의 힘이 빠져서 5·18 문제는 챙길 여력이 없다고 할 것이다. 이러다가 5·18은 역사에 이렇게 기술될지 모른다. ‘5·18민주화운동은 군부독재에 맞선 민주화투쟁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북한개입설이 나돌고 있다.’

전라도는 여전히 개똥쇠, 리꾸사꾸, 더블팩들이 살고 있는 하와이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속의 김 과장들은 여전히 평화와 김밥을 중얼거리고 있다. 모깃소리만 하게. 이제는 끝내야 한다. 기억하며 분노하라. 전라도에는 전라도라서 죽은 이들이 있잖은가. 산 자들은 죽을 각오로 싸워라. 그래야 ‘전라도 빨갱이 새끼’에서 겨우 ‘빨갱이’ 하나 지울 수 있다. 지난 무술년은 전라도가 생겨난 지 1000년이 되는 해였다. 천년의 전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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