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도 모르고 쉴 줄도 모르는 88세 화가의 붓···국립현대 ‘박서보 회고전’

홍진수 기자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박서보-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전시 간담회에서 박서보 작가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박서보-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전시 간담회에서 박서보 작가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화가 박서보(88)는 말했다. “여러분들이 날 만나기 전에 들은 여러가지 풍문에는 내가 뿔난 도깨비 같은 사람이라고 묘사가 되어있을 것이다. 아침에 (뿔을) 다 밀어내고 왔다.” 모자를 벗어 민머리를 드러낸 박서보는 이렇게 덧붙였다. “(회고전을 앞두고)내가 발가벗고 서있는 입장이다. (내게서)그림이 다 빠져나가 난 배만 볼록나온 노인이다.”

박서보가 1977년에 내놓은 ‘묘법  No.01-77’.  르몽드 신문에 연필과 유채로 그렸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박서보가 1977년에 내놓은 ‘묘법 No.01-77’. 르몽드 신문에 연필과 유채로 그렸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박서보는 한국 추상미술의 선두주자였다. 그가 1957년에 발표한 작품 ‘회화 No.1’은 국내 최초의 앵포르멜(비정형 추상) 작품으로 꼽힌다. 끊임없는 변신으로 한국미술의 세계화에 기여했고 2016년 한국화가 중 처음으로 영국 최대 화랑인 런던 화이트큐브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의 이름난 작품은 해외 경매시장에서 100만달러 이상에 거래되기도 한다. 또 홍익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교육자이자 행정가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부정적인 평가가 항상 따라다닌다. 변신을 거듭했지만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고, 미술계 파벌인 ‘홍익대 사단’의 핵심으로 불렸다. 구순이 가까운 나이에도 신작을 발표하는 그의 열정 뒤에는 ‘욕심’이 자리하고 있다는 비난도 있다. 지난 3일 마로니에북스가 펴낸 평전 <박서보:단색화에 닮긴 삶과 예술>의 저자 케이트 림(미술저술가)은 출간을 앞두고 미술계 지인들에게 이런 ‘경고’를 들었다고 썼다. “박서보 화백이 얼마나 악명 높았는 줄 알아요?” “박서보 사단의 얘기를 모르시는군요” “뭘 몰라서 그러는데 아마 책 내면 이래저래 말들이 많을 겁니다”

어찌됐든 박서보는 한국 미술계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고, 여전히 신작을 발표한다. 지난 18일부터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행적이나 평가를 뒤로하고 그림만으로 ‘화가 박서보’를 평가할 수 있는 자리다.

전시는 1950년대 초기작부터 올해 내놓은 신작까지 총 5개 공간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70여년 동안 꾸준히 붓을 놓지 않고 걸어온 작가의 여정을 작품 129점과 아카이브를 통해 소개한다.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박서보-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전에 나온 설치 작품 ‘허의 공간’. 1970년 일본 오사카 엑스포 한국관에 전시됐다가 반정부 성향이라는 이유로 철거된 뒤 49년만에 재현됐다. 연합뉴스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박서보-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전에 나온 설치 작품 ‘허의 공간’. 1970년 일본 오사카 엑스포 한국관에 전시됐다가 반정부 성향이라는 이유로 철거된 뒤 49년만에 재현됐다. 연합뉴스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작품은 올해 완성한 대작 2점이다. 핑크색과 하늘색 바탕에 유백색 물감을 바르고, 그 위에 연필로 촘촘히 선을 그었다. 어린 아들의 서툰 글쓰기에서 착안했다는 대표작 ‘묘법’(描法)에 색채를 얹었다. 이어 시대 역순으로 작품이 이어진다. 깊고 풍성한 색감을 강조한 1990년대 ‘후기 묘법’에 이어 한지의 물성을 극대화한 1980년대 ‘중기 묘법’ 작품이 나온다. ‘초기 묘법’을 지나면 1969년 미국의 달 착륙에 영감을 받아 만든 ‘유전질’ 연작이 소개되고 한국 앵포르멜 회화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원형질’ 연작도 볼 수 있다. 사람이 빠져나가고 옷만 남은 형태의 설치작품 ‘허의 공간’은 이번 회고전을 맞아 49년만에 재현했다. 이 작품은 1970년 일본 오사카 엑스포 한국관에 전시됐다가 반정부 성향이라는 이유로 철거된 뒤 볼 수 없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박서보: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전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박서보: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전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번 회고전의 제목은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다. 박영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은 “전시를 준비하면서 뛰어난 작품성과 독창성 뿐만 아니라 치열함, 치밀함까지 발견해 학예실 사람들 사이에서는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란 말이 나왔다”고 말했다. 이 ‘별명’이 전시 제목에도 반영됐다.

박서보는 “아날로그 시대에 익숙하게 70년을 살았는데 21세기 디지털 시대가 와서 자살까지 고민하다 끝까지 해보자 마음을 먹었다”며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시대를 꿰뚫어보는 통찰력과 식을 줄 모르는 열정”이라고 말했다. 이어 “스트레스 병동처럼 된 디지털 시대의 지구에서 예술은 편안함과 안정감을 주는 흡입지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9월1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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